황학동 벼룩시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들이 있다.
오래된, 손맛이 가득한, 낯익은, 향수어린, 다채로운 등등.
조각가 오광섭(60)의 브론즈 작품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진하게 풍겨난다.
양평 엘렌킴머피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서 그 향기를 느껴보자.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촬영협조 엘렌킴머피갤러리 031-771-6041
1982년, 청년 오광섭은 돌조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에 첫 발을 내딛는다.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도 창작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했던 그는 조각의 고장 토스카나로 건너가 카라라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남한강변에 자리한 엘렌킴 머피갤러리의 전시장 풍경. 오광섭 작가의 전시는 흔하게 열리지 않아서 더욱 반갑다. 평생 엑기스 작품만을 모아 내놓는 개인전을 고집해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수학하는 동안 정작 몰두했던 것은 조각가들의 작업실과 주물공장을 속속들이 탐방하는 일이다. 토스카나 지역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업실이 모여 있는데, 그들의 창작 세계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그곳엔 역사 깊은 주물공장들도 즐비하다. 저마다 특별한 노하우를 지닌 작업 현장들을 답사하는 사이, 청년 작가의 가슴에는 평생 예술가의 길을 걷게 만든 창작 혼이 쌓여갔다.
▲동구릉을 다녀온 후 만든 작품으로 누구든 돌아갈 때 모든 물질을 놓고 가야 하는 생의 원리를 표현했다.
▲오광섭의 조각이 특별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중 표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재미를 준다.
“유학시절 전혀 새로운 조각의 세계에 들어갔죠. 한국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출발했으니까요. 이태리 작가들에게도 큰 자극을 받았어요. 그들은 주인의식이 강해요. 남과 비슷한 것은 하지 않죠. 남과 비슷한 작품은 다 버려집니다. 오로지 내 작품, 진정 자신이 빚어낸 단 하나의 창작물을 완성하는 데만 몰입합니다.”
이후 30년, 오광섭 역시 자신만의 오롯한 창작세계를 찾기 위한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에서의 탐험은 조각가로서의 그를 우뚝 세우는 토양이 되어 주었다.
1 30년 넘게 조각가로 한 길을 걸어온 오광섭 작가. 작품을 다루는 예리한 촉수와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정신 등 타고난 기질이 천상 예술가다. 2 악몽처럼 다가오는 중국의 산업화를 강시를 등장시켜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물질에 갇힌 현대인의 치유제는 ‘자연과 인간애’
조각가 오광섭은 한국 현대조각사의 3세대 작가로, 그가 즐겨하는 밀납주조 방식은 독보적이다. 보통의 브론즈 작품들은 흙으로 본을 뜬 다음 브론즈를 입혀 형태를 완성하는데, 작가는 흙 대신 밀랍(벌꿀에서 채취한 물질)로 본을 뜬다.
“유학시절 미술주물공장에서 처음 본 밀랍주조는 공법자체가 완전히 새로웠고 정밀해서 처음부터 나를 매료시켰죠. 소량의 밀랍을 얻어 와서 붙였다 떼어내고 자르고 지지고 가늘게 혹은 굵게 마음대로 만져봤어요. 조형에 대한 무한한 승부욕을 가졌던 그 시절의 나에게 돌파구를 찾아준 참말로 고마운 재료였죠.”
밀랍주조 방식으로 빚어낸 오광섭 작가의 브론즈 작품들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섬세함과 다채로운 조형성을 뽐낸다. 그의 작품에서는 선과 면과 3차원 공간이 자유자재로 얽혀 있다. 새로운 철 조각이 공간을 통과하기도 하고 공간 속으로 들어가 앉아있기도 한다. 크고 작은 기계뭉치와 사람형상이 유기적으로 결합되기도 하며 곤충이나 벌레의 형상마저도 세밀하게 표현되고 있다.
“밀납주조는 마치 연극 무대를 올리는 것 같은 섬세한 연출이 가능해요. 작품 하나하나 마다 작가가 의도하는 비유나 은유, 해학과 위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거죠.”
▲곤충으로 은유된 자연으로부터 치유 받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표현한 작품 ‘콘서트-자연에로’
그래서인지 작품들은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둘러매고 있다. ‘콘서트-자연에로’는 그의 예술관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곤충(자연)이 피아노(치유)를 치고 일그러진 형상(현대인의 자화상)이 파이프를 통해 피아노 소리를 수혈하고 있다. 자연만이 현대문명에 지친 현대인을 치유할 수 있음을 은유하는 작품이다.
그 밖의 작품들도 기계문명으로 점철된 현대의 물질주의를 미키마우스, 강시, 뒤뚱거리는 오리 등을 등장시켜 비유하고 있다. 빌딩 위에 앉은 거대한 거대한 새가 사람을 물고 있는 ‘파수꾼’이라는 작품 앞에서는 마음이 처연해진다. 작가 자신이 새라면 자연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마다 깃든 독특한 상상력과 해학은 작가의 성장기에 모태를 두고 있다. 인천 제물포역 수봉산 아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에게 자연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놀이터였다. 하지만 자연과 함께 지척에 있는 기찻길, 고아원, 가난한 이웃, 개발우선주의에 억압당한 자연을 보며 비판의식이 자랐다.
▲나비부인(Madame Butterfly) 25×31.4×h29.5cm 브론즈 2015
작품에 담긴 스토리를 탐구하는 것에서 나아가 다채로운 발색을 음미해 보는 것도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다.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그의 작품들을 두고 마치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느낄법한 ‘골동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평론했다. 앤틱한 컬러를 입힌 고철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듯한 전시장 풍경이 그럴법하다. 이런 골동정서를 불러오는 발색 작업은 오광섭 작가가 긴 시간 시행착오 속에서 찾아낸 숨은 비법이다. 작가는 머지않아 워크샵을 열어 자신의 노하우를 하나씩 풀어내며 세상과 공유할 계획이어서 기대가 된다.
▲누워있는 철인(鐵人) 33×43.8×h31.6cm 브론즈 1994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조각가로부터 얻는 ‘위로’
작가는 30여년 전업조각가로 살아온 지난 생활을 ‘어둡고 긴 터널’로 비유했다. 가난한 생활에 쪼들렸지만 가식 없는 진심과 본성에 충실하며 살려 애쓰면서 내성도 생겼다고 전했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교단에 서지 않았다. 오로지 작가 본연의 자세로 살기 위해서다.
그가 얼마나 고독한 작업을 이어왔는지는 그동안의 작품 계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광섭 작가는 시리즈물을 만들지 않으며 단체전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오로지 독창적인 한 점의 완성 도를 높이는데 집중하는 게 예술가가 할 일이라고 믿고 따라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밀랍과 약품에 노출된 양손의 상처가 마를 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쇠와 불과 씨름하는 주물과정을 손수 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세상은 둥글둥글해야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죠. 그러나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그러지 못해요. 예술가는 촉이 있어야 해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매순간 각성해야 창작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외로워요. 외톨이, 아웃사이더가 되죠. 그래도 작가는 철저히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 촉도 무뎌지는 거니까. 작가로서 나에게는 당대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아요. 후대에 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것, 그것이 내 존재이유입니다.”
작가를 닮은 작품처럼 섬세한 촉으로, 마치 주물을 다루듯 자신을 강하게 단련해온 육순의 조각가 오광섭. 그가 꿋꿋함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작품은 큰 산이 되고 큰 울림이 되어 문명에 갇힌 현대인을 위로해 주리라 기대한다.
▲마테리얼 걸(Material Girl) 26.2×29.2×h32.5cm 브론즈 2015
1 파수꾼 26.2×29.2×h32.5cm 브론즈 2015 2 접시돌리기(촛대) 26.2×29.2×h32.5cm 브론즈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