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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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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철]
대한민국 건축계의 큰 별이 지다

김석철 교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천재소리를 들었던 그는 대학교에서도 2년만 공부한 후 설계사무소에 들어갔다. 김중업과 김수근 모두에게 사사한 유일한 건축가인 그는 특히 도시설계에서는 르꼬르뷔지에와 견줄 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갖고 있다. 중국의 취푸신도시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를 설계했고, 한반도에도 그랜드디자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정리 권혁거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20년 넘게 처음에는 ‘하우징투어’라는 이름으로, 이후에는 ‘김석철의 도시건축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본지에 컬럼을 연재해 왔던 김석철 교수이기에 그를 웬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와 관련된 여러 글을 보면서 내가 알지 못하던 부분도 적지 않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김석철 교수의 특징중 하나는 잘 웃는 것인데 알고 보니 그 웃음의 비밀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는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남들은 그가 말을 잘 못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베개를 들리는 쪽으로 베고 누우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이 되어 그안에서 자신과 만나고 공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구상하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다방면의 학문적 소양을 갖춘 건축대가이자 석학

김석철은 우리나라 건축계를 대표할 수 있는 건축대가이자 여러 학문에 두루 깊이를 갖춘 석학이기도 하다. 20여년동안 주택저널에 연재된 그의 글을 읽노라면 그의 인문학적 소양과 학문적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건축을 위해 거의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 ‘궁극(窮極)’이란 바로 이런 경지를 두고 하는 말일 터다.

 

 

1 1969년 여의도 마스터플랜 모형사진 2 취푸신도시 조감도

 

건축가로서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는 당시 르꼬르뷔제에 사사한 후 우리나라 현대건축을 대표하던 김중업 선생에게 들어가 건축설계를 배웠다. 그리고는 다시 김중업 선생과 쌍벽을 이루던 공간의 김수근 선생에게 배웠다. 우리나라 건축가중에 두사람 모두에게 건축을 배운 이는 아마도 그가 유일하다.

 

그는 불과 29세의 나이에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맡아 현재 여의도의 기본골격을 짰다. 이후 서울대 관악캠퍼스 마스터플랜을 계획했고, 경주 보문단지 마스터플랜도 설계했다. 40대에 서초동 예술의 전당 국제현상설계에 당선돼 예술의 전당을 설계했다.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한국관을 설계해 한국 건축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의 집안은 함경남도 안변 출신으로 6.25때 밀양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중추원 의관을 지낸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공부했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고전한문과 사서삼경을 배웠다. 당시 그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집에서는 의대에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결국 집안과 친분이 있던 박종홍 교수와 진로를 상의해 건축가로서의 길을 택했다.

 

 

 

김석철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건축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비유한 바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기실 그가 그린 그림은 20점에 불과하고 그중에서도 인정받는 것은 8점 정도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로서보다는 건축을 비롯해 수리학, 물리학, 해부학, 도시설계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천재였다.

 

실제로 건축가 김석철도 건축뿐만 아니라 수학이나 물리학, 동양학, 철학 등 다양한 방면의 학문적 소양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에 응용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을 맡은 것도 그의 학문적 소양을 보여주는 예다. 젊은 시절 ‘현대건축’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주간을 맡기도 했다. 그는 건축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고, 그것이 그의 건축과 도시설계의 바탕이 됐다.

 

해외교수 활동도 활발, 건축과에 5년제 처음 도입

그는 2000년대 초 첫 암수술을 시작으로 지난 10여년에 걸쳐 모두 4차례의 암수술을 받았다. 2000년대 중반 암수술을 받은 후 그가 쓴 원고의 내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가득 담은 통 사진을 보냈는데, 암수술후 서재에서 혼자 부인 몰래 숨어서 와인을 마시느라 코르크 마개를 모아둔 것이었다. 그의 순수함과 진솔함이 묻어나는 내용이어서 주택저널에도 그대로 게재했다.

 

그가 주택저널에 게재한 글중에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로 맨시니 교수에 관한 내용이 있다. 맨시니 교수는 김석철 교수와 오랜 기간 함께 교류해온 인물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이다. 그 맨시니 교수가 그의 저서를 통해 김석철 교수를 평하면서 ‘르꼬르뷔제 이후 건축과 도시를 함께 그릴 수 있는 사람으로 이만한 사람이 다시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고 밝힌 바 있다.

 

김석철 교수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초기의 두손갤러리를 비롯해 1992년 제1회 건축문화대상을 받은 한샘 시화공장, 예술의 전당, 아키반 북촌 스튜디오 등이 있다. 한샘 시화공장은 환경친화적이고 미적인 건물로 꼽힌다. 아키반 북촌 스튜디오는 한옥의 새로운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해외에도 중국의 취푸신도시를 비롯해 베이징 경제특구, 쿠웨이트 자하라신도시, 아제르바이잔 바쿠신도시 등 다수의 도시설계 작품이 있다.

 

 

1 두손갤러리 2 제1회 건축문화대상을 수상한 한샘 시화공장 3 베니스대학초청 포스터 4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5 한샘디지안센터 전경

 

김석철 교수는 국내외를 망라해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탈리아 베니스대학 객좌교수를 지낸 것을 비롯,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도 몇년동안 강의를 했다. 또 중국 베이징의 칭화대학에서도 초빙교수를 맡았다. 칭화대 우량륭 교수와의 친분도 돈독하다. 그의 해외교수 시절 역정이 주택저널의 글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국내에서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건축대학장을 맡으면서 국내 건축대학에 5년 학기제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건축설계부문에 5년제 학기를 도입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건축계획 부문에서는 거의 모든 대학이 5년제를 도입, 운영하고 있다. 건축의 제 자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1 김석철 교수는 마지막으로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에 천착했다. 2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 조감도

 


‘한반도 프로젝트’ 마지막까지 심혈 기울여

김석철 교수는 최근들어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에 천착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있던 직책이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다. 그가 암 수술을 네 번이나 한 건강상태여서 주변에서 그 자리를 맡는데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기꺼이 맡았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한반도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황해공동체를 비롯해 새만금 프로젝트, 제주 만인성채, 그리고 두만강 하구의 다국적도시 건설 등 한반도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우리 한반도를 개조하고 통일에 대비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를 책으로도 출간한 바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이 프로젝트의 내용과 의미를 알리고 싶었던 때문일 게다.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한라힐링파크 설계 조감도

 

기자가 김석철 교수를 처음 안 것은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들이 모여서 만든 ‘목구회(木口會)’라는 모임을 통해 발간된 책을 통해서였다. 당시 그 책에는 목구회 회원들이 모여 좌담회를 한 내용이 수록돼 있었다. 그 내용을 통해서 김석철 교수와 처음 접했고, 그것이 기자에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목구회 회원들은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이다.

 

그리고 그후 원고청탁을 위해 그를 처음 찾아간 곳이 동숭동에 있는 아키반도시건축연구원이다. 일반적인 건축설계사무소 이름과는 생소한 것이어서 다소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이는 그가 하려고 하는 건축의 영역이 단순히 건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장에 취임한 후 그와 마지막 인터뷰를 한 곳도 바로 동숭동 사무실이었다.

 

 

 

1 아키반 북촌 동재 윗집 내부에서 바라본 중정 2 아키반 북촌 스튜디오 서재의 내부

3 아키반 북촌 동재 아랫집 입구 4 아키반 북촌 동재 아랫집의 지붕

 

그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두만강 하구의 다국적 도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그는 몇 번의 암수술 후유증으로 하루중 몇 시간 정도만 제대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는 일정으로 짜여져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시간을 쪼개 시간을 내 준 것은 바로 프로젝트에 대한 열정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기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올해 초 그와 통화하면서 오히려 건강이 더욱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한국 건축계로서는 건축을 넘어서는 건축가인 큰 별 하나를 잃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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