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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교동의 한옥들]
전통한옥에 근대한옥의 양식과 실용성 가미

 

 

경남 밀양시 교동의 밀양향교 아래에는 밀양 손씨가 세거해온 일단의 한옥들이 모여 있다.

이들 한옥들중 상당수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교동에 입향한 교동파의 종가로부터 99칸에 이르는 대규모 가옥도 있다.

또 몇몇 한옥들이 구한말에 건립되면서 근대적인 건축수법이 가미되는 등 한옥의 변화양식도

보여준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밀양강앞 모례에 서 있는 오연정. 밀양 손씨 교동파의 파조인 손영제가 퇴계를 그리며 건립한 별서이다. 모례라는 지명도 손영제가 퇴계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교동(校洞)’이라는 지명은 예로부터 향교(鄕校)가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주요 도시에는 교동이라는 지명을 가진 지역이 많다.

그리고 향교가 있는 곳이다보니 향교 주변으로 선비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럽게 반촌(班村)이 형성된다. 교동이라는 지역에 전통한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종택을 지나 향교쪽으로 더 올라가면 마을 고택중 규모가 가장 큰 인묵재 고택이 있다. 교동 열두대문집으로 통한다.

 

밀양시 교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곳에는 밀양지역 주요 성씨인 밀성(密城) 손씨(孫氏)들이 향교 주변에 모여 살면서 세거지로 자리잡았다.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현재 향교 주변으로 전통가옥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밀양 손씨의 가옥들이다. 그리고 이들 가옥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원래 손씨는 신라때의 구례마(俱禮馬)를 뿌리로 한다. 동국통감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때 육촌의 촌장이던 구례마에게 손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밀양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인 손순(孫順)을 시조로 한다. 밀양손씨 세계도에 따르면 손순의 손자 대에 본관이 나뉘는데, 응천군(凝川君)으로 봉해진 큰 손자 익감(翼減)이 밀양을 본관으로 삼는다.

 

 

교동의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향교의 내부.

 

그리고 손순의 7세손인 손긍훈(孫兢訓)이 밀양 손씨 가문의 중흥을 가져온 중시조로 꼽힌다. 그는 고려 창건때 태조 왕건을 도와 견훤의 아들인 신검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사도에 이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다. 그가 죽은 후에 밀양의 북쪽 춘복산에 묻고 동쪽 추화산에 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그의 묘비명에는 대장군(大將軍)으로 표기돼 있다.

 

손순의 19세손인 손빈(孫贇)도 가문의 현조(顯祖)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때 급제해 충선, 충숙, 충혜 네 왕조에 걸쳐 여러 관직을 거치며 명성을 얻었고 공적도 많았다. 북벌을 통해 여진을 물리치는가 하면 반역을 일으킨 무리도 토벌해 왕실을 지켰다. 이같은 공으로 정당문학 상장군을 지내고 사도에 올라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향교의 풍화루의 모습. 마을을 굽어볼 수 있다.

 

 

퇴계의 문인인 추천 후손들이 교동에 세거

밀양 손씨가 처음 밀양에서 터를 잡은 곳은 용평(龍平)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용활동(龍活洞)이다. 교동에 세거한 것은 그 이후인데 지금으로부터 350년쯤 전이었다는 게 교동파 종손 손백식(孫伯植)씨의 추정이다. 마을앞에 서 있는 밀양 손씨 교동 세거기념비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교동파의 파조는 추천(鄒川) 손영제(孫英濟)다.

 

 

종택의 대문

 

그는 손응(孫凝)의 아들 5형제중 셋째로 성의 동문밖 용성리(龍城里)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벼슬에 나선 후에도 거기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임진왜란때 한때 남가곡(南嘉谷)으로 옮겨 살기도 했으나, 전쟁후에 후손들인 손분(孫昐)과 손창조(孫昌祖) 부자가 향교 복원에 참여하면서 세거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창조의 아들인 석보(碩輔), 석필, 석좌(碩佐), 석빈(碩賓), 석익(碩益) 등이 명망높은 선비로 이름을 떨쳤고, 그 후손들도 벼슬과 문장 등으로 가문을 빛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식화(食貨)가 넉넉해 큰 기와집으로 처마를 맞대 교남(嶠南)의 집성명촌(集姓名村)이라는 평판을 얻기도 했다.

 

 

종택의 전체적인 구성은 비교적 단출하다.

 

특히 추천 손영제는 퇴계(退溪)의 문인으로, 퇴계에 대해 각별한 흠모의 정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선 명종때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典籍)과 예조좌랑(禮曹佐郞),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예안(禮安)현감과 울산군수를 지냈다. 그가 예안현감을 지낼 때 하루도 빠짐없이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종택의 문간채

 

퇴계의 사후에도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도산서원을 건립하는데도 자신의 사재를 털어 도우는 등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914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한 퇴계의 제자록인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는 앞부분에 추천의 이름이 당당하게 실려 있다. 도산의 유림들에 의해 추천의 역할이 인정받은 셈이다.

 

 

종택 사랑채. 종손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다. 안채를 제외하고 다른 건물들은 대부분 최근에 보수했다고 한다.

 

벼슬을 그만둔 후에도 밀양에 내려와 밀양강 앞에 오연정(鼇淵亭)이라는 별서를 지었는데, 이 또한 퇴계를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당시 그가 사는 마을의 이름을 모례(慕禮)라 하고 마을 뒷산도 모례산이라 했는데, ‘모례’란 곧 ‘예안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도산을 사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손긍훈의 묘가 있는 춘복이나 모례나 모두 지금은 교동에 속한다.

 

 

안채와 아래채. 아래채는 살림을 내기 전에 기거하는 공간이다.

 

 

안채 부엌 아궁이 위에 마루방 설치한 종택

파조인 추천의 후손들이 모여살던 교동은 한때 향교 인근에만 밀양 손씨들의 집이 70~80호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20호 남짓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도 밀양 손씨들이 지역을 대표하는 성씨로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아직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재계 등에서도 이 지역 출신들이 명망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안채 건넌방 아궁이 위로 높은 마루방을 설치한 것은 보기 드문 특이한 예이다.

 

손씨들의 집은 향교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은지가 오래 된 집들도 있지만, 구한말에 지어진 집들도 적지 않다. 특히 구한말에 지어진 집들의 경우 전통적인 건축수법에서 근대기의 건축수법으로 변화가 이루어진 부분들을 볼 수 있다. 즉 이곳에 있는 집들은 왕조시대에서 근대시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한옥의 변화를 보여주는 셈이다.

 

교동 손씨들의 집중 마을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채와 중사랑, 안채, 아래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이 안채로 1910년경에 건립됐다고 한다. 정면 7칸의 건물에 5칸 규모의 아래채가 덧붙여져 전체적으로 ‘역ㄱ자’ 모양의 형태를 띄고 있다.

 

 

향교 아래쪽에 밀양 손씨 교동파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특히 이 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안방에서 부엌쪽으로 작은 문을 낸 점이다. 안방쪽에서 부엌으로 창호를 내는 경우 대개는 방 앞으로 퇴를 내고 작은 창호를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고 있는데, 부엌 아궁이쪽으로 직접 작은 문을 낸 예는 드물다.

 

아마도 근대시기에 접어들면서 실용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하나는 건넌방과 아래채 사이에 높직한 마루방을 마치 누다락처럼 설치해놓은 점이다. 대개 아래채를 두더라도 건넌방 아궁이 윗부분을 비워두는 것이 보통이다. 이 또한 근대기 한옥의 실용성을 보여주는 공간구성으로 보인다. 종손 손백식씨의 설명에 따르면 부녀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아래채는 살림을 별도로 내기 전에 기거하기 위한 공간이다.

 

 

사랑채와 사랑마당. 사랑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작은 사랑이다.

 

안채의 종손이 기거하고 있는 사랑채와 아래채 등은 새로 짓거나 보수하는 등으로 원래의 모습에서는 다소 변형된 상태로 보인다. 교동파 16대손인 종손은 현재 91세로, 공직 등을 지내다 68세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종가를 지키고 있다. 마을앞 세거 기념비도 그가 주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99칸 사대부의 격식 갖춘 인묵재 고택

종가에서 향교쪽으로 골목길을 조금 더 올라가면 이 마을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밀양 손씨 고택이 있다. 이 마을 고택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가장 앞선다. 전체적으로 집의 규모가 크고 사랑채와 안채 등 공간구분이 세밀하고 엄격하게 이루어져 사대부가의 위엄과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집 또한 안채는 지은지 300년이 넘었지만, 사랑채는 그보다 한참 뒤인 구한말에 지은 집이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이는 인묵재(認默齋) 손성증(孫聖曾)으로, 숙종 연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밀양문화원의 인물자료에 따르면 그는 ‘천자(天資)가 이범(異凡)해 효우(孝友)가 견실했으며,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를 보지 않고 재야에서 독서로 학문을 닦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사가독서를 한 것이다.

 

 

사랑채 옆에 난 작은 일각문은 사당으로 바로 통하는 문이다.

 

인묵재 고가는 교동마을 손씨 고택들가운데서도 솟을대문이 있는 두집중 하나다. 그만큼 격식을 제대로 갖춰 집을 지었다는 얘기다. 집의 규모만 해도 99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측량을 해본 결과 100칸이 넘었다고 한다. 집의 재산도 많아서 만석꾼으로 불린 집이기도 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이 있고, 문간마당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을 지나야 사랑채로 들어선다. 가장 처음 지은 안채는 전통적인 한옥 양식으로 건립됐지만, 사랑채는 전통한옥 양식을 기본으로 하되 근대적인 건축수법이 가미돼 있다. 예컨대 사랑채 전면에 유리창호를 둔 것이나 내부복도를 통해 실내에 화장실을 둔 것 등이 그렇다.

 

 

1 사랑채 대청의 창호. 문양도 격식을 갖추고 있고, 겹문으로 만들어 바깥문을 들어열개로 처리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근대한옥의 기법인 듯하다. 오른쪽 벽 위로 한승수 총리가 쓴 글이 편액돼 있다. 2 사랑채 대청 뒤로 난 복도. 복도를 따라가면 실내 화장실이 있다. 3 작은 사랑방. 사랑방 앞의 문을 열면 누마루가 나온다. 4 작은 사랑방 앞에 ‘인묵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창호의 모습이 특이하다.

 

사랑채에서는 또 대청과 사랑방 사이 창호를 겹문으로 만든 점이나, 분합문을 접혀 들어가도록 만든 점도 눈에 띈다. 전통적인 한옥의 창호의 경우에는 실내 문에는 겹문 형태가 없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접이식 겹문 형태로 창호를 만들고 겉의 문은 들어열개로 처리했다. 아마도 이는 단열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

 

작은 사랑방 앞으로는 넓은 누마루를 설치했다. 누마루 밑부분은 벽돌을 받쳐 놓았는데, 당초는 필로티 형식으로 누마루 밑부분에 기둥외에는 비어 있던 것을 후에 벽돌로 메운 것이라고 한다. 사랑방 옆에는 작은 침방도 있다. 이 침방에는 심부름하는 하인이 기거하면서 필요한 심부름을 해주기 위한 공간이다.

 

사랑채 맞은 편에는 작은 사랑이 있다. 그러나 1935년에 이 집에 큰 화재가 나서 안채와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에 타는 바람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당초 작은 사랑채는 큰 사랑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모양은 오히려 더 단아하고 좋았다는 것이 현재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인묵재의 후손 손중배(孫重培)씨의 얘기다.

 

 

인묵재 고택 안채. 가장 먼저 지은 건물로 지은지 3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안채는 사랑마당을 지나 다시 계단을 통해 더 올라가서 중문을 지나야 한다. 안채 중문간에는 서고가 있다. 지금은 서고에 있던 책들을 모두 밀양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문간마당에서 사랑채를 통하지 않고 안채로 바로 통할 수 있도록 작은 사랑 뒤로 길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이 길은 바깥 화장실과도 연결되는 길이다.

 

 

교동 마을에 있는 손정식 가옥의 부엌이다. 부엌 모양도 다소 특이하고 지붕도 부엌을 따라 덧달아낸 모양이 다른 고택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정침인 안채는 정면 7칸 규모다. 안채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창고 등 부속채 건물이 있고, 맞은 편에도 도장방을 비롯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 좌우에 있는 부속채 건물에는 모두 마루방을 두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이곳 또한 일하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도장방에는 지하 수장고가 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김치 등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인묵재 고택 문간마당에서 작은 사랑 뒤를 거쳐 안채로 바로 통하도록 돼 있다. 주로 하인들이 이용하던 통로로 이곳에 바깥 화장실이 있다.

 

안채의 뒤편으로 가묘가 있다. 이곳에는 조상 4분의 신위가 모셔지는 곳이다. 손중배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러나 지금은 4대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가묘의 형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랑채에서 가묘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는 제사를 지낼 때 남자들이 안채를 정면으로 통하지 않고 사당으로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연정 전경. 파조인 추천 손영제가 건립한 별서다.

 

 

퇴계를 그리며 건립한 오연정

인묵재 고택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도 찾았던 집이다. 손중배씨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이 집을 방문했고, 한승수 국무총리도 이 집을 찾았다. 특히 한 총리는 2009년 방문 당시 ‘한수이남무비주의(漢水以南無比住矣)’라는 글을 남겼다. ‘한강 이남에서 이 집과 비교할 집이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건축규모나 집의 위용에서 훌륭하다는 의미일 게다.

 

손중배씨의 설명에 따르면 교동파 파조인 추천외에도 이 집안은 도산서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손씨의 고조부인 손창현(孫昌鉉)이 도산서원장을 지냈는데, 도산서원장은 유림에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앉기 어려운 자리다. 이 때문에 도산서원에서도 밀양 손씨들이 방문하면 극진하게 예를 갖춰 대접한다고 한다.

 

 

오연정 뒤에 건립된 판각

 

그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밀양 손씨 가문들은 다른 지역의 명문가문들과도 혼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도 결혼한 예가 있다고 한다. 인묵재 고택 안채의 경우 원주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당시 민가에서는 원주를 사용할 수 없고, 다만 왕실의 인물과 결혼한 경우 등에 한해 예외적으로 인정됐다. 

       

밀양 손씨 종택과 인묵재 고택을 빼고 다른 집들은 제대로 관리가 돼 있지 않아 부분적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교동의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손정식 가옥의 경우에는 부엌의 모습이 특이했다. 특히 기존의 지붕옆에 부엌의 내민 모습을 따라 지붕을 덧붙인 모습은 보기 드문 형태다.

 

밀양 손씨 교동파의 파조인 추천이 건립한 오연정은 마을의 중심부와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정자와 부속건물은 그가 퇴계를 그리며 지은 것으로, 몇차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재건한 것이다.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재건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추천의 8대손인 행남(杏南) 손갑동(孫甲東)과 일족들이 1771년 중건했다. 지금의 건물들은 후손들이 1936년 확장, 재건한 것이다.

 

 

오연정은 건물 자체로도 우리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거니와 오연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2000년대 초반에 밀양 교동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다른 집을 찾지 못하고 인묵재 고택 한 채만 방문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인묵재 고택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간 부분이 많았으나 이번에 다시 둘러볼 수 있어 좋은 기회가 됐다. 인묵재 고택은 지금은 ‘열두대문집’이라는 한정식도 겸하고 체험고택도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인묵재 고택에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음식이 있다. 이 때문에 찾는 사람들도 많고, 외부 사람들에게 밀양 손씨와 고택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우리 전통가옥의 우수성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문화재적 가치와 이를 활용한 관광의 부가가치 창출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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