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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여미리 나전헌]
단아한 선비를 연상케 하는 집

충?남 서산에 있는 나전헌(螺田軒)은 대원군때 벼슬을 지낸 이가 서울 운현궁을 본따 지은 집이다. 엄격한 유교의 원리를 따라 사랑채와 안채를 담장으로 분리시키고 출입문도 별도로 두었다. 집안 곳곳에 전통의 멋이 배어 있고, 특히 집의 본채 뒤쪽으로 둥그런 반원 모양의 흙담으로 담장을 두른 점이 특이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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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헌의 사랑채. ‘나전심경’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나전의 서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을 취재하다보면 지역마다 다른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흔히들 남부지방이나 중부지방 등으로 분류하며 특성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기실 세부적으로 보면 같은 지역에서도 조금씩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에 사는 사람의 입장이나 지형적 특성에 따라, 또는 고유의 상황에 따라 집을 짓는 모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집앞의 산 중턱에서 본 집의 전경. 이 집터는 좌청룡 우백호가 집을 감싸안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餘美里)에 있는 나전헌의 경우 일반적인 집의 모양과는 상당히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앞으로 나란히 서 있고, 경사진 지형에 커다란 반원형으로 담장을 둘렀다.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선 것도 그렇거니와 각각의 대문을 따로 둔 점 또한 여느 가옥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다.

 

 

 

 

집 뒤에서 본 모습. 안채와 사랑채를 담장으로 구분해 놓았다.

 

이처럼 특이한 형태를 띤 것은 집을 지은 이의 건축적 구상에 지형적·풍수적 특성이 가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집을 지은 이는 유상묵으로, 구한말 종5품의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그가 집을 지을 당시 운현궁(雲峴宮)의 모습을 본땄다고 하는데, 지금의 모습은 운현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집을 지은 연대도 서산시나 백과사전 자료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5년 무렵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집안에서 만들어 놓은 자료에 따르면 실제 건축연대는 그 이전으로 기록돼 있다. 즉 이 집을 처음 건축한 것은 1896년이고, 이를 유상묵이 매입해 확장, 중수하면서 운현궁의 모습을 가미한 것이라고 한다.

 

 

안채 전경.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의 격식을 갖추면서도 실용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불사이군의 절의 지킨 서령 유씨 집안

서산군 운산면은 내포문화의 중심지인 가야산을 대부분 접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예로부터 문화가 융성했던 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여미리는 운산면에서도 중요한 지역이다. 여미리라는 이름은 기원전에 있었던 염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려초부터 사용된 이름이라고 한다.

 

 

안채의 뒷모습. 대청 뒷 부분에 퇴가 없다. 아마도 뒤뜰이 급격한 경사지여서 활용가치가 별로 없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때에는 여촌현으로 편제됐다가 통일신라시대때 경덕왕이 여읍현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들어서는 양광도(지금의 충청도) 홍주의 영현인 여미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미현은 현재의 운산면과 이웃한 음암면을 관할했다. 이곳은 한때 채운포에서 뱃길로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번성했다.

 

 

1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일각문. 어르신들이 정한 택일에 맞춰 아들 내외가 이 작은 일각문을 통해 합방을 하기 위한 비밀통로이다. 2 안채 뒤쪽의 굴뚝 모습이 특이하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곳은 행정구역의 변화를 몇차례 겪게 된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때 해미군 운천면과 부산면, 이도면을 통합해 지금의 운산면이 됐는데, 이때 여미리는 이도면 소속으로 운산면에 편입됐다. 그후 1914년에는 서산군 정미면에 속했다가 1957년 정미면이 당진군에 편입됐으며, 1973년에서야 다시 서산군 운산면으로 돌아왔다.

 

 

안채 부엌 아랫방으로 출입할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안방에서는 부엌 위로 난 다락을 통해 건너다닐 수 있다.

 

이 집을 지은 유상묵의 본관은 서령으로, 서산의 옛 지명이다. 서령 유씨가 서산에 터를 잡게 된 것은 고려때 서령부원군(府院君)을 지낸 유성간(柳成澗)때부터다. 이후 본관을 서령으로 정하고 고려에 충성했던 집안이다. 서령 유씨의 선조들은 조선건국 시기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인물들이다.

 

 

안채의 후면. 안채 측면으로 퇴를 놓은 것이 보인다. 이곳은 안방의 뒤쪽으로, 이곳에 장독대와 우물 등이 있음을 감안하면 실용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상묵은 이중 금헌(琴軒) 유방택(柳方澤)의 후손인데, 금헌은 천문학에 뛰어나 오늘의 기상청장에 해당하는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절의를 맹세하고 은둔했다. 그러나 당시 역서와 천문도 등의 문제로 그를 찾게 되자 할 수 없이 벼슬에 나가 권근(權近) 등과 함께 새로운 천문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 국보로 지정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이다.

 

 

1 방 위에 작은 창호를 만들어 두었다. 이 창은 환기를 위한 창이다. 2 부엌 아랫방 밑에 만들어놓은 수납공간

 

이 공로로 태조가 그에게 1등 개국공신의 녹권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또다시 김포 인근에서 자취를 감추고 은둔했다고 한다. 그는 비록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에 절의를 지켰지만, 그의 자식들에게는 ‘너희는 조선의 사람이니 새 임금을 섬기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고려왕을 지키지 못한 불충을 한탄하며 읊은 술회시도 남아 있다.

 

그후 서령 유씨의 17세손으로 호조참판을 지낸 유춘배(柳春培)가 여미리의 이웃마을인 음암면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가좌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유춘배의 이주를 두고 평산낙안일안동비(平山落雁一雁東飛)라고 한다. 기러기가 평산에 자리잡았으나 한 마리가 다시 동쪽으로 날아갔다는 뜻이다. 음암이나 여미리는 모두 서산의 동쪽에 위치한다.

 

 

장독대. 한쪽에 아궁이가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장을 담그기 위해 만들어 놓았다. 장독대 앞으로 비가 올때도 안방이나 부엌쪽에서 흙을 밟지 않고 건너다닐 수 있는 댓돌이 놓여 있다.

 

그리고 가좌리에 집성촌을 이룬 서령 유씨중 22세손인 유상묵이 자수성가하면서 여미리에 있던 현재의 집을 매입해 옮겨온 것이다. 이 집 인근에도 역시 문화재로 지정된 유기방 가옥이 있다. 나전헌을 관리하고 있는 신재선(辛在宣)씨에 따르면 유기방 가옥과 이집과는 사촌간이라고 한다. 서령 유씨 여미파가 새로 형성된 셈이다.

 

유상묵의 아들 유정로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나와 평생을 교육에 헌신한 인물이다. 이 집의 이름을 나전헌이라고 한 것도 그의 호를 딴 것이다. 집 앞으로 옛 부족국가 시절 만들었던 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라산(田螺山)이 있는데, 집의 선산이기도 한 이 산의 이름에서 호를 따온 것이다. 지금은 집과 산 사이에 국도가 놓였다.

 

 

사랑채 전경. 단아한 선비를 연상케 한다. 오른쪽에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유교사상의 원리를 엿볼 수 있는 공간구성

이 집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돼 있다. ‘ㄱ’자형의 안채는 동쪽에, ‘ㅡ’자형의 사랑채는 서쪽에 배치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안채와 사랑채의 대문을 따로 두고 있는 점이다. 대개는 큰 대문안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을 따로 두고 있는데 반해 이 집에서는 아예 별도의 대문을 설치한 것이다. 안채에는 ‘을좌문(乙佐門)’, 사랑채에는 ‘나전헌’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사랑채 대문. 이집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대문을 따로 만들었다.

 

안채는 2칸 규모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위치하고 있다. 건넌방에는 방 뒤쪽으로 작은 고방을 두었고, 방 앞쪽으로는 밑에 아궁이를 두고 마루를 올려 마치 작은 누마루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에는 ‘청송백학루(靑松白鶴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선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안방 옆으로 부엌이 있고, 부엌 옆으로는 아랫방이 있다. 안방의 다락이 아랫방까지 연결돼 서로 오갈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이 아랫방 밑에는 작은 공간도 하나 숨어 있다. 수납공간이다. 부엌일에 필요한 간단한 물건들을 저장해놓은 곳인 듯하다. 선조들의 살림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랑채 앞에 자리한 행랑채의 모습. 오른쪽으로 방을 두고, 왼쪽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는데 내외벽을 둔 모습이다.

 

안채 옆쪽으로는 커다란 우물과 장독대가 있다. 그리고 이 우물이 있는 공간과 안채의 기단을 길다란 돌로 연결해 놓았다. 비가 오거나 해서 길이 젖었을 때에도 건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장독대 옆에 아궁이가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장을 담글 때 등에 쓰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는 대문을 따로 둔 만큼 내부에서도 담장으로 서로 분리해 놓았다. 안채에 비해 규모가 작은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사랑채 굴뚝. 안채의 부드러운 굴뚝에 비해 남성적이다. 2 사랑채 중문을 나서면 솔잎부리가 있다. 땔감을 젖지 않게 보관하는 장소다.

 

사랑방 앞으로는 대청과 이어지는 너른 퇴가 있다. 사랑채에는 ‘나전심경(螺田心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나전의 서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채 뒤로 높게 선 굴뚝은 여느 집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띠고 있다.

 

안채에서 사랑채 사이에는 중문을 만들어놓았는데, 이 중문과 별개로 안채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있다. 이 문은 시어머니가 특별히 열어주는 문이다. 즉 집안에서 길일을 정해 신혼의 아들 내외가 합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내외가 엄격하던 시절의 풍속을 엿보게 해준다.

 

 

 

 

유상묵 가옥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가 바로 담장이다. 경사지형을 따라 반원형으로 둘러친 담장의 모양도 그렇거니와 흙으로 만든 벽의 형태도 찾아보기 드물다.

 

 

땔감 등이 젖지 않도록 보관해둔 ‘솔잎부리’

사랑채 밖으로 통하는 중문을 나서면 볏짚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더미가 있고, 다소 멀리 떨어져서 해우소가 있다. 볏짚을 쌓아놓은 더미는 ‘솔잎부리’라는 것으로 땔감 등이 젖지 않도록 보관해두는 장소다. 당시 이 솔잎부리는 부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해우소도 용인민속촌 조성 당시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

 

이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토담이다. 이 토담은 이 집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순수하게 흙으로 담장을 올린 형태이다. 담장의 아래쪽은 흙과 돌을 섞어 놓았지만, 담장의 위쪽은 흙으로만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담장은 다른 고택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면에서 본 집의 전경. 안채와 사랑채에 별도로 만든 대문이 보인다.

 

담장의 모양도 반원형으로 특이한데, 이는 이 집의 지세를 본따 만든 것이라고 한다. 즉 집 뒤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 집의 터가 좌청룡 우백호가 품에 안고 있는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을 두른 담의 모양도 좌청룡 우백호의 모양을 본따 반원형으로 만들었다. 내포지방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지역에서 유기방 가옥과 함께 유일한 담장형태라고 한다.

 

집 뒤로는 소나무 숲이 조성돼 있다. 바다가 가까워서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으로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두채가 있는데, 당초 이 집의 머름집이었다고 한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곳곳에 전통의 멋이 배어 있는 단아한 선비를 연상케 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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