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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 만산고택]
우국충정과 선비의 기개를 담은 집

만산고택은 ‘춘양목’으로 유명한 경북 봉화의 춘양면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이 집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잘 보존돼오고 있다. 특히 이 집에는 흥선대원군이나

영친왕 등이 쓴 친필 현판이 남아 있어 가문의 내력을 짐작케 한다.

또한 집의 구조나 평면 등에서도 경북 북부지방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위를 잘 보여준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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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류헌에서 들어열개를 올려 밖을 내다본 풍경. 우국충정과 선비의 기개를 품은 이 집은 명문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위를 보여준다.

 

봉화를 가자면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IC에서 나와 봉화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예전에는 오지로 꼽히던 곳이지만, 경북 북부지방을 관통하는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이제는 그리 멀지많은 않은 곳이 됐다.

 

봉화로 가는 길은 가을 산하를 즐길 수 있는 좋은 여행길이다. 길 위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계절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소백산을 끼고 있는 죽령을 넘어갈라치니 밑으로 내려온 단풍이 내뿜는 정취가 완연하다.

 

 

사랑마당. 마당에 조성된 작은 화단들이 운치 있다. 대문옆 행랑채에 마루공간이 설치된 것이 보인다. 아래사람들에 대한 집주인의 배려다.

 

예로부터 봉화는 자연과 산수가 좋기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 그래서 경북지역에서도 안동 못지않게 양반들이 많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다. 특히 누(樓)와 정(亭)이 많아 남아 있는데, 이는 바로 이곳이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임을 말해준다.

 

봉화에서도 춘양면은 예로부터 금강송(金剛松)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의 소나무는 다른 곳의 소나무보다 훨씬 질이 좋고 튼튼한 것으로 잘 알려져 특별히 ‘춘양목’이란 이름이 붙어 있을 정도다. 한양의 궁궐을 지을 때는 춘양목을 운반해 가져다 썼고, 일반 민가건축에서는 웬만한 대가집이 아니고서는 춘양목을 가져다 쓸 수 없었다.

 

이곳 춘양면 의양리에 자리잡은 만산고택은 바로 춘양목으로 지은 집이다. 집이 춘양에 있다보니 춘양목을 쓰기도 한 것이겠지만, 집에 사는 이가 춘양목을 가져다 쓸 수 있을 만큼 대가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기단위에 서 있는 사랑채. 사랑대청과 사랑방, 그리고 제사공간인 감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대청에도 들어열개를 달았다.

 

 

3형제가 모두 벼슬에 나선 명문가

실제로 이 집을 지은 만산(晩山) 강용(姜鎔)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학문도 높아 우리나라 정통 유학의 산실인 도산서원 원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이 집에서는 특히 편액이 많이 걸린 점이 눈에 띈다. 이 편액들중 대원군이나 영친왕의 친필도 있는데, 이는 이 집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집을 지키고 있는 만산의 고손자인 강백기(姜百基)씨에 따르면 만산의 부친인 백초(白樵) 강하규(姜夏奎)가 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1 사랑채의 측면의 모습 2 사랑방위에 ‘만산’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집에 걸린 현판이나 편액의 원본은 모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만산의 가문이 봉화로 내려온 것은 병자호란때라고 한다. 만산의 선조인 강위빙(姜渭聘)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임금을 호종하다가 포로로 붙잡혔는데 “너희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하면서 순절한 인물이다. 병자호란때 내려왔다면 아마도 강위빙의 아들대 쯤에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만산은 강위빙으로부터 8세손이 된다. 그의 증조부는 송서(松西) 강운(姜橒)으로 그는 순조때 문과에 급제해 이조정랑까지 역임하고 이곳으로 귀향해 송서정(松西亭)을 건립해 자연을 벗하며 학문과 시가를 즐기며 유림의 사표가 됐던 인물이다. 특히 그는 학문과 문장이 높았고, 경학에 밝았다고 한다.

 

부친 강하규는 동부승지와 이조참의, 대사성 등을 지냈다. 특히 부친대(代)에서는 3형제가 모두 벼슬에 나가 활동했는데, 한 집안의 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이 집안이 명문가문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 대청. 대청에 놓인 도기들은 이집 안주인의 작품이라고 한다.

 

 

을사조약체결 이후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

만산이 어릴 때 학문을 배운 이도 바로 자신의 백부인 현파(玄坡) 강한규(姜漢奎)였다. 만산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그는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특히 윤리와 도덕에 뛰어났고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고 한다. 그를 가르친 백부 강한규도 그가 가문의 명망을 높일 인물이라고 기대했다.

 

만산은 음서(蔭敍)로 영릉참봉에 제수됐고, 천릉도감 감조관을 거쳐 통정대부에 올라 당상관인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집옆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다. 이때 그의 호도 만산에서 정와(靖窩)로 바꿨다.

 

 

사랑채 뒤편 안채와 이어지는 공간이다.

 

이집 사랑채에는 ‘만산’이라는 현판과 ‘정와’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만산은 대원군이 그에게 내려준 호로 친필로 써서 내려준 것이고, 정와는 을사조약 이후 낙향하면서 스스로 고쳐지은 호이다.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정와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정와’ 현판은 당대의 서예가인 강벽원(姜壁元)의 글이라고 한다. 

 

만산이 대한제국 말기 벼슬을 접고 이곳에 터를 잡고 들어온 것은 조용히 은신하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음식과 약물도 내치며 ‘죽지 못한 고신(孤臣)이 들창아래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죄’라 하면서 온화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는 사후 그의 아들인 필(泌)과 함께 부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아들 필은 학생봉기를 주도했다. 만산이 망국의 한을 읊은 시 ‘망미대’에 대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는 ‘슬프고 처량해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왼쪽)과 안채 뒤뜰로 연결되는 일각문

 

 

경북 북부의 기후 감안해 폐쇄형으로 구성한 본채

봉화군 춘양면 면소재지의 큰 길을 따라가다보면 ‘만산고택’과 ‘권진사댁’이라는 고택표시를 만날 수 있고. 이 표지를 따라 들어가면 만산고택을 만날 수 있다. 권진사댁은 만산고택 한쪽에 별도의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강백기씨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이 집과 한 채였으나 분가하면서 별채로 나뉜 것이라고 한다.

 

고택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높은 솟을대문이다. 특히 만산고택의 솟을대문은 정면 11칸 규모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대개 솟을대문이 있는 경우에도 대문과 행랑채의 규모가 11칸이나 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이 솟을대문에 딸린 행랑채에 대청마루가 놓여 있다. 일종의 하인들을 위한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아랫사람들을 배려한 실용적인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별채인 칠류헌. 본채에 있는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큰 이곳은 접객장소였다. 사랑채가 많은 손님을 맞기에는 비좁아 이곳에 별채를 마련한 것이다.

 

집은 크게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본채와 별채, 그리고 서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이어져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기단위에 ‘ㅡ’자형으로 우뚝 선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왼쪽에 넓은 대청을 두고 가운데 사랑방이 위치하고 있다. 사랑방 오른쪽으로는 제사공간인 감실이 있다.

 

안채는 사랑채에 둘러싸여 밖에서는 그 규모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사랑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들어가야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나온다. 이 중문도 곧바로 안마당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다시 꺾여서 들어가도록 돼 있다. 이같은 구성형태는 외부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내외구분과 더불어 경북 북부지방의 기후영향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칠류헌 대청. 분합문도 들어올릴 수 있도록 돼 있는데, 이들 공간을 모두 트면 100명이 넘는 인원도 수용할 수 있는 큰 공간이 된다.

 

집의 형태를 이런 모양으로 앉히다보니 대문과 사랑채의 좌향은 동향인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앉게 됐다. 안방은 남향, 대청은 동향으로 앉은 것이다. 일반적인 구성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다. 안채 중문외에도 안채의 뒤뜰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사랑채의 양옆으로 나 있다.

 

 

칠류헌으로 출입하는 일각문

 

사랑채 뒤쪽으로 자리잡은 안채는 부엌에서 안채로 들어오는 중문까지 ‘ㄷ’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랑채의 대청 뒤편으로 작은 사랑방과 작은 마루공간,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연결된 작은 방이 있다. 이곳은 안채 중문을 통하지 않고 안채와 곧바로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문인과 우국지사들이 자주 모였던 칠류헌은 옛 선비의 기개와 우국충정이 담긴 공간이다.

 

 

문인과 우국지사의 교류 이루어진 ‘칠류헌’

사랑채의 오른쪽으로는 별채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안채와 붙어 있는 사랑채 공간이 크지 않은 점을 감안해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칠류헌이야말로 사대부가의 격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본채에 비해 규모도 크고 너른 대청과 문을 들어서 열 수 있도록 한 들어열개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칠류헌은 방과 대청, 그리고 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필요할 경우 전체 공간을 모두 터서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문인들이나 우국지사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던 곳이다. 강백기씨는 “120명까지도 이곳에서 회합을 가진 적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전통가옥 공간의 특징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칠류헌 마루밑에 놓인 댓돌. 폐사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칠류’는 두가지 의미가 조합된 단어다. ‘칠(七)’은 ‘천지가 월화수목금토일을 따라 돌아오듯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류(柳)’는 우국충신이었던 중국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집 주위에 충성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옛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곧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담은 집이다.

 

 

1 사랑채 옆에 있는 서실. 2 사랑채 옆 서실에 걸린 ‘한묵청연’ 현판

 

사랑채 왼쪽으로 작은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서실이다. 원래 이곳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던 공간으로, 지금은 공간을 터서 방으로 개조했다. 이 서실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편액은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英親王)이 8세때 쓴 글이라고 한다.

 

강백기씨는 요즘 이 집을 체험고택으로 개방하고 있다. 칠류헌과 서실 등 일반인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해 전통가옥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특히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단체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칠류헌에서는 우리 전통가옥의 우수성과 함께 옛 선비들의 우국충정과 기개도 느껴봄직 하다. 

 

강백기씨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 이 집을 죽 지켜오고 있다. 특히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외지로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을 지키게 됐다고 한다. 대종가는 아니지만 작은 종가를 지키기 위한 후손의 어려움이 그 말속에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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