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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정선군 정선읍 고학규 고택]
500년 내력의 사대부 집

조선초 중앙의 정쟁을 피해 정선으로 낙향한 제주 고씨의 입향조가 건립한 집으로, 500년이 넘은 정선읍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ㄷ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구성 등에 특이한 점이 있다. 집앞에 보호수로 지정된 뽕나무 두그루가 눈길을 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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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정선(旌善)은 예로부터 ‘아우라지’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 정선이라는 이름은 신라때부터 얻었으며, 고려때는 명주(溟洲, 현 강릉)의 속현으로 한때 도원(桃原), 심봉(沈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려말 다시 정선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이후 주변지역의 통폐합 등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됐다.

 

고학규 고택이 있는 정선읍 봉양리(鳳陽里)는 읍 소재지로, 주산인 비봉산(飛鳳山) 남쪽과 민둥산 남쪽 조양강(朝陽江) 사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다. 배산임수의 지형을 하고 있는 셈이다. 봉양이라는 마을이름도 비봉산의 ‘봉’과 조양강의 ‘양’을 한글자씩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고학규 고택은 봉양리에서도 군청이 있는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집의 전경. 앞에 사랑채가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자리잡아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다.

 

 

계유정난 피해 낙향, 한동안 벼슬도 안나가

현재 집을 지키고 있는 종손 고종헌(高種憲, 61세)씨에 따르면 이 집을 지은 이는 그의 23대조인 고순창(高順昌)이라고 한다. 고삼창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으나 단종때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피해 이곳 정선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당시 정선에는 그의 형님인 고순성(高順成)이 먼저 내려와 있었다는 것이 고종헌씨의 설명이다.

 

‘계유정난’은 조선 단종때인 1453년 10월10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다. 임금의 삼촌이던 수양대군이 당시 권력자이던 김종서(金宗瑞)를 비롯한 그의 정적들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사건을 일컫는다. 그런 계유정난을 피해 낙향한 것이라면 1450년대에 이곳으로 내려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집을 처음 지은 때로부터 따지면 500년이 넘은 셈이다.

 


사랑채 전경. 오른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누마루다. 왼쪽 낮은 지붕은 마굿간으로 쓰던 곳이다. 그 옆으로 안쪽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집 뒤의 비봉산을 배경으로 앉은 고택의 모습이 고즈넉한 풍경을 연출한다.


 현재 이 집 담밖에는 커다란 뽕나무 두그루가 서 있다.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 나무로 수령 500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다. 특히 이 나무는 이 집과 관련이 깊다. 형에 이어 동생이 이곳으로 낙향해 집을 지으면서 함께 심은 뽕나무라는 것이다. 그 뽕나무가 이 집과 내력을 함께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곳 봉양리는 고려시대때부터 ‘상마십리(桑麻十里)’로 불렸던 곳이다. 즉 뽕나무와 마나무가 많아 길쌈이 성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 지역이기에 집을 지으면서 뽕나무를 심은 것은 자연스러웠던 일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 뽕나무의 높이는 25m, 둘레 2.5m이며, 밑둥둘레도 3.25m로 전국에서도 크고 오래된 뽕나무의 하나로 꼽힌다.



1 마당 한켠에 놓인 장독대가 정겨운 느낌을 준다. 2 집앞에 서 있는 두그루의 뽕나무. 이 집과 내력을 함께 해온, 수령 500년이 넘은 나무다.


뽕나무는 그 쓰임새도 여러 가지라고 한다. 명주실을 만드는 누에고치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열매인 오디는 먹거리로도 유용하다. 또 뽕나무의 껍질이나 뿌리, 그리고 최근에는 죽은 뽕나무 줄기에서 상황버섯이 자라고, 누에로 동충하초를 만드는 등 약재로도 널리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곳으로 입향한 입향조가 나름대로 뽕나무를 심은 의미도 여러 가지였을 듯 싶다.

 

당초 이곳으로 낙향하게 된 동기가 조정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낙향 이후 후손들은 한동안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종손의 9대조인 고필항(高必恒)이 종2품 무관벼슬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그 아들인 고진악(高鎭岳)이 광흥부 주부(主簿)를 지낸 것을 빼면 벼슬을 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안채와 안마당. 안채 오른쪽 대청이 있어야 할 곳에 안방이 위치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다.

 

 

누마루 형식 갖춘 사랑채, 체험고택으로 개방

이 집은 그간 몇차례의 중수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집을 해체 복원할 때 확인된 상량문에 따르면 1772년(영조 49년) 집을 중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후기인 1805년에도 보수한 흔적이 있고, 일제때인 1921년 이후에도 몇차례 고쳤다. 최근에는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안채와 사랑채를 전면 해체보수해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이 집은 당초 마을의 형국과 같은 배산임수의 지형을 살린 형태로 앉혔던 것으로 보인다. 집 뒤로 주산인 비봉산이 있고, 집 앞으로는 강이 흐른다. 그러나 지금은 집뒤로 군청과 의회가 들어서 집 뒤의 풍광이 많이 가려졌다. 집 앞으로도 집보다 높은 건물이 들어서 있어 경관을 막아서고 있는 점이 흠이다.

 

 


1 사랑마당 한쪽에 놓아둔 디딜방아. 당초 헛간채에 있던 것을 헛간채가 허물어져 따로 둔 것이다. 2 사랑마당에 설치된 굴뚝에서 옛 정취가 느껴진다.

 

집의 구성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돼 있다. 집이 정선군청과 의회 바로 옆자락에 붙어 있어 군청쪽에서 볼라치면 안채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침 집앞에 서 있는 뽕나무 두그루도 일각문 옆에 위치하고 있어 일각문을 출입문으로 잘못 알기 쉽다. 그래서 일각문 앞에 집의 출입문은 옆으로 돌아 따로 들어가야 한다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다.

 

큰 길쪽에서 출입문을 들어서면 먼저 널찍한 사랑마당을 만날 수 있다. 대문의 왼쪽으로는종부가 작은 전통차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 집은 ‘상유재(桑惟齋)’라는 이름으로 전통체험고택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차를 대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굳이 고택 체험자가 아니더라도 지나던 길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 한잔 들면서 더위를 식히기에도 좋은 곳이다.

 

사랑채는 현재 고택체험을 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공간이다. ‘ㅡ’자형의 평면에 대청마루가 돌출돼 있는 형태이다. 강원도의 집들은 대부분 겨울의 추운 기온을 견디기 위해 겹집형태로 구성하는 예가 많고, 마루에도 문을 다는 것이 보통이다. 이 집 역시 대청을 누마루 형태로 돌출시켜 사대부의 격식을 따르는 한편으로 사방에 창호를 내어 추운 겨울에 대비하고 있다.

 

 


사랑채 누마루 내부. 사방의 창호를 만들어 개폐가 가능하다. 추운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다. 창호를 열면 사방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마루 뒤에는 큰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있다. 큰 사랑방에서는 마루에 들어열개를 설치해 창호를 들어올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추운 겨울에 대비하는 것과 함께 더운 여름에 공간을 모두 개방하거나, 또는 집안 식구들이 모였을 때 넓게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담긴 공간구성이다.

 

사랑방 옆으로는 부엌이 있고, 그 옆에는 마굿간이 자리하고 있다. 마굿간 옆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안채를 찾는 손님들은 대문을 통해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 중문으로 안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사랑방 뒤로도 안채로 통하는 작은 창호가 설치돼 있다.

 

 


사랑채 옆에 담장을 따로 설치해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 밖으로 약간 높게 전체 담장이 보인다.


 

이 사랑채에는 어릴적 할아버지가 기거하고 계셨다는 것이 종손 고종헌씨의 기억이다. 큰사랑방에 작은 줄을 매달아 할아버지가 이 줄을 당기면 소리가 나도록 해 기척을 알리고 필요한 일을 시킬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집의 구성을 보아도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면서도 소통의 통로를 열어놓았던 것이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이어지는 사랑방. 사랑방 창호앞에는 들어열개가 설치돼 문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안채 공간구성 특이, 내외구분도 엄격

사랑채 뒤로는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집이 마당을 감싸듯 ‘ㄷ’자형의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안채에서는 특이한 공간구성이 눈에 띈다. 일반적으로 대청은 집의 가운데에 넓게 자리잡는 것이 보통인데, 이 집에서는 건넌방쪽으로 치우쳐 대청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구조다.

 

대청의 규모는 2칸이다. 사랑채쪽 정면을 향하고 있는 부분이 1칸 규모이고 건넌방쪽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칸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래 대청이 있어야 할 부분에 안방이 들어가 있다. 건넌방쪽 공간을 대청에 내준 대신 안방이 한칸 앞당겨 대청쪽으로 들어온 형국이다. 그리고 안채쪽에서는 외부와 바로 출입할 수 있는 예의 협문이 따로 설치돼 있다.

 


사랑채는 체험고택으로 개방해 이 집을 찾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다.

 

이 집은 ‘ㅡ’자형의 안채와 ‘ㄷ’자형의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사랑공간과 안채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체의 담장 안쪽에 사랑채 담장을 낮게 별도로 설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안채와의 공간을 확실히 분리하고 있다. 또 이 담장으로 외부 담장과 사랑담장 사이에도 작은 공간이 생겼다.

 

종손 고종헌씨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의 규모가 1000평을 넘었다고 한다. 대문옆에 행랑채가 붙어 있었지만, 6.25동란때 소실됐다. 안채 뒤편에도 방앗간이 있었지만 허물어졌다고 한다. 또 군청이 들어서면서 집의 일부가 도로에 편입돼 면적이 줄어들었다. 뽕나무가 담장밖에 놓이게 된 것도 그때문이라는게 종손의 설명이다.

 

고종헌씨는 이 집에서 나서 지금까지 이집에 죽 살고 있다. 이 집을 지켜오면서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었다. 그나마 지금은 문화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나아져 다행이다. 그러나 종가집으로서, 또 종손으로서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고민이 많다. 종가를 어떻게 지켜가야 할지 종손은 숙명처럼 그 과제를 떠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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