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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읍 거촌리 쌍벽당]
선조의 유훈 지키며 선비정신 이어온 종가

‘쌍벽당(雙碧堂)’은 500년 선비의 정신을 지켜온 전통 사대부 가옥이다. ‘벼슬에 나서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지키려 일부러 벼슬이 나지 않을 땅에 지은 집이다.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선비로서의 자세와 기개만큼은 올곧게 지켜왔다. 경사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앉힌 집의 높은 쪽에 들어선 안채의 굵은 원주가 쌍벽당의 정신을 받치고 있는 듯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쌍벽당 본채에 붙은 사랑채와 그 뒤로 별채인 쌍벽당이 서 있다. 마당에 서 있는 소나무가 5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듯하다.


 

요즘은교통의 발달로 서울에서 불과 두세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 됐지만, 경북 봉화는 예로부터 오지로 꼽히던 곳이다.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도 ‘병란(兵亂)과 세상을 피해 살만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이라는 의미다. 바로 이런 오지에 쌍벽당이 들어선 것은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화 지켜보며 ‘벼슬을 하지 말라’ 유훈 남겨

이 집은 광산(光山) 김씨 쌍벽당공파의 파종가이다. ‘쌍벽당’은 조선시대 학자인 김언구(金彦球)의 호이자 이집의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 중종 26년(1531)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물이다. 대신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는데 힘써 이 지역 유학과 유림의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광산 김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쌍벽당의 아버지인 죽헌(竹軒) 김균(金筠)때였다. 그가 바로 이 마을의 광산 김씨 입향조인 셈이다. 현재 이 집을 지키고 있는 종손 김두순(金斗淳) 옹의 18대조가 된다. 종손에 따르면 죽헌은 음직으로 습독관(習讀官)의 벼슬을 받아 집안에서는 ‘습독공’으로 부른다고 한다.

 

 


쌍벽당 전경. 전체적으로 집의 구성이 위계를 갖추고 있는 느낌을 준다. 집 뒤의 낮은 산에도 소나무가 많다.

 

습독공 김균이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인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담암은 당시 높은 학문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10철(十哲)중 한사람이었다. 즉 가장 뛰어난 제자의 반열에 들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이 즉위한 후 사화의 낌새를 채고 안동 풍산의 구담으로 내려왔다.

 

그의 예견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종직의 제자들을 비롯한 사림(士林)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 담암은 “선비로서 진사(進士)만은 아니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즉 후손들이 벼슬에 나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담암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습독공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으려 아예 벼슬이 나지 않을 외진 자리를 찾다가 마침 처가와 연고가 있는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집을 지을 때는 ‘배산임수’라고 해서 뒤로는 산을 두고 앞으로는 내가 흐르는 곳을 명당으로 일컬었다. 배경이 되는 산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거나 진산이 있으면 그 정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여겼다.

 

 


1 쌍벽당 대청. 쌍벽당은 본채보다 후에 건립된 건물로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공간과 함께 선비들이 모이는 정자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2 사당 내부. 4대 봉사를 하고 있다. 3 쌍벽당의 난간. 화려하지는 않지만 격식은 갖추고 있다. 4 쌍벽당 대청측면과 후면에 판장문을 달아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다. 더러는 시원한 공기를 통하게 하기도 하고 또 이곳을 통해 바깥 경치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습독공은 오히려 이를 거슬러 자리를 잡았다. 종손의 설명에 따르면 쌍벽당이 들어선 지역은 집 뒤로 작은 산줄기가 두 개 내려오고 앞은 어느 정도 트인 소쿠리같은 땅이라고 한다. 산세는 높지 않되 아늑한 주거지를 만들어 사람이 사는데는 큰 문제가 없는 곳이다. 그러나 집앞으로 큰 물줄기도 없는 등 풍수적으로 명당이라고 할 만한 곳은 아니다. 습독공은 아버지의 유훈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잡은 셈이다. 그는 이곳에 들어와 직접 농토를 만들고 하인들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터를 닦았다.

 

 

 

소나무와 대나무를 사랑한 선비

담암의 유훈과 관련해 종손이 들려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담암의 셋째아들은 아버지의 유훈을 어기고 성주로 내려가 그 지방의 목사를 지냈다. 그러자 담암은 자신의 유훈을 어긴 셋째 아들과 부자의 연을 끊고 아예 고향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담암이 자신의 유훈을 얼마나 중하게 여겄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곳에 정착한 후 습독공은 거촌은 물론 봉화 및 안동 등 인근 지역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행동규범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아 천성향약과 안동향약을 만들었다. 고장의 대표적인 선비로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드는 일에 앞장섰던 셈이다.

 

 


안채 대청. 원주의 기둥이 눈길을 끈다. 대청 뒤쪽의 판장문 사이에 작은 기둥이 있는 것이 보인다.


 

쌍벽당은 습독공의 큰 아들이다. 그가 사마시에 응시한 것은 벼슬에 나갈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쌍벽당’이라는 그의 호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유난히 사랑한 선비라는 데서 연유됐다는 것이 종손의 설명이다. 쌍벽당 중수기에도 ‘반송(盤松)과 수죽(脩竹)을 뜰에다 심어놓고 날마다 그곳을 거닐었다’고 기록돼 있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올곧게 자라는 대나무는 곧 선비정신의 상징처럼 여기던 나무들이다. 종손에 따르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집 마당에는 특이한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아마도 남아 있었다면 정이품송에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특이했다고 한다. 지금은 그 나무는 없어졌지만, 다른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어쨌든 그 이후 이 집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종손 김두순 옹은 “선조의 유훈을 지키다보니 집안에서 배출된 유명인이 없다”고 얘기한다. 종손 스스로도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외지의 자리를 마다하고 고향을 지켜왔다. 무려 500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집은 사화를 피해 안동으로 내려온 담암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안채 측면과 후면. 지붕이 맞배 형식으로 돼 있는데, 이 또한 이 집의 건축양식이 오래 된 것임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계단을 올라 만나는 높은 사랑마당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쌍벽당은 경사지형을 살려 집을 앉혔다. 솟을대문에서 집의 본채가 있는 사랑마당으로 오르자면 계단을 올라야 한다. 여기에서 안마당으로 가는데도 역시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쌍벽당 뒤쪽에 자리잡은 사당도 계단을 오르게 돼 있다. 마치 사람이 사는 곳에 따라 위계를 정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솟을대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집의 본채와 함께 오른쪽으로 서 있는 별채인 쌍벽당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경북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 형태인 ‘ㅁ’자형의 구성을 지닌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함께 붙어 있다. 안채 중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채가 자리잡았고, 왼쪽으로 행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에서 계단을 올라야 할 만큼 사랑마당을 높게 만든데 비해 본채의 구성은 안온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본채 내에서의 건물의 위계를 보여주는 구성이 눈길을 끈다. 즉 안채 중문 왼쪽의 행랑채와 오른쪽의 사랑채는 기단의 높이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중문을 들어가 만나는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집의 전체적인 모양은 ‘ㅁ’자이면서도 집의 앞부분에 날개를 한칸씩 더 뺀 모양을 하고 있다. 아마도 공간의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 중문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는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기품이 있다. 사랑방과 대청으로 구성돼 있는데, 대청은 창호를 갖춘 마루방 형태로 돼 있다. 마루방 앞에는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이는 경북 북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로,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창호를 닫아 두었다가 여름에는 들어열개로 창호를 들어올려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랑방에는 ‘송죽헌(松竹軒)’과 ‘하서(霞棲)’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쌍벽당 중수기에는 ‘하서’는 사랑채 중수때 만든 편액이라고 기록돼 있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은 전형적인 내외담이다. 즉 밖에서 바로 안채의 사정을 살필 수 없도록 꺾여진 구조로 돼 있다. 이는 부부유별의 유교적 원리에 따른 구조다. 내외담을 통해 들어간 안채는 이 집에서 가장 위엄있는 모습을 띄고 있다. 일반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굵은 원주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안채의 권위를 상징하는 듯하다.

 

안채 대청도 널찍하다. 이른바 대가집의 대청을 두고 이르는 ‘육간대청’이다. 육간대청이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체 넓이가 여섯칸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이 대청의 뒤에 뒤뜰로 통하는 판장문이 있는데, 이 판장문에는 가운데 작은 기둥이 있다. 이는 조선 중기 이전의 건축양식이다.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에는 판장문 사이에 기둥이 없다.

 

 


솟을대문에서 계단을 올라 만나는 사랑마당. 정면으로 사랑채와 마주하고 있다.

 

 

강학과 정자의 용도를 모두 갖춘 ‘쌍벽당’

본채 오른쪽으로는 별채 형식의 건물이 서 있는데 바로 쌍벽당이다. 쌍벽당 중수기에 따르면 본채는 1500년대에 건립됐고, 쌍벽당은 그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쌍벽당은 거주의 용도보다는 정자나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한 강학공간으로서의 용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 건물중 대청이 대부분이고 방은 왼쪽으로 한칸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집이 전체적인 건물 배치나 구조에서 나름의 위계에 신경을 쓴 것은 쌍벽당의 건립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쌍벽당은 본채 사랑채와 같은 레벨로 건립됐다. 이는 사랑채와 함께 이 집의 바깥 어른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쌍벽당의 넓은 대청은 강학의 용도와 함께 마을 선비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도 적합하다.

 

특히 이 집이 거촌 광산 김씨의 파종가인 점을 감안하면 본채에 붙어 사람을 수용하기에 한계가 있는 사랑채를 보완할 수 있는 공간적 용도도 있었음직 하다. 예부터 우리 종가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채에 모두 수용할 수 없는 공간적 제약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법하다.

 

쌍벽당 뒤로는 조금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대봉사를 하고 있다. 쌍벽당을 위한 불천위 사당은 인근 선산 근처에 따로 마련돼 있다고 한다.

 

 


1 사랑채에 걸려 있는 ‘하서’ 편액 2 종가를 지키기 위해 외지로 나갈 유혹을 뿌리친 채 집을 지켜온 종손 김두순 옹 

 

종손 김두순 옹은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45년동안 외지에서 밥을 먹지 않으며 집을 지켰다’고 한다. 한때 그도 외교관의 꿈을 꾸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종가를 지키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평생을 시골학교의 교사로 봉직했다. 고향을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교장자리에도 오르지 못한 채 퇴직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그가 이 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각별했다.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됐지만 정부의 예산이 제대로 지원이 되지 않아 사비를 털어 이곳저곳을 손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 전통한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안채 대청 마루나 기둥에 기름이나 페인트칠을 칠하기도 했다가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 다시 벗겨내는 곡절도 겪었다.

         

때로는 돌아가기도 했지만, 집을 지키겠다는 종손의 의지가 있었기에 쌍벽당은 500년의 원형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팔순을 넘긴 그는 “문화재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순히 집을 지키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통가옥을 취재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앞으로 누가 이 집을 지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김두순 옹의 얘기처럼 정부에서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쌍벽당은 종손의 큰 아들이 안동 국학대학원에서 고전을 공부하며 종가를 지킬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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