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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연수구 ‘원인재’]
인천 이씨의 부흥기틀 마련한 시조의 재실로 지은 집

‘원인재’는 인천 이씨를 일으킨 중시조 이허겸의 묘앞에 있는 건물이다. 당초 이허겸의 묘려로 지은 것이지만, 따로 떨어져 있다가 택지개발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현존하는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이 건립된 것은 1800년대이며, 지금은 이건 복원된 가옥외에 예전에 있던 집들도 함께 복원돼 있다.

취재 권혁거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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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재실인 원인재 전경.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배치돼 있다.

 

인천 지하철 1호선에는 ‘원인재역’이라는 곳이 있다. 이 역은 인천 지하철의 마지막 역이자 수인선과 연결되는 환승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원인재’라는 역명의 유래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다. ‘원인재’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역명에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인재(原仁齋)’는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재실이다. 이 이름에는 ‘인천 이씨의 근본이 되는 이’의 제사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인천 이씨가 시조로 모시고 있는 이허겸(李許謙)의 묘소 옆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원래 있던 곳은 현재 위치의 길 건너편이었는데, 택지개발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건축수법은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나름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김수로의 후손으로 고려때 전성기 누려

인천 이씨는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옛 가야국의 김수로왕이 선조라고 한다. 즉 김수로왕이 인도의 허 황후를 왕비로 맞아들여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 아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허씨였다가 신라 말기에 후손이 당나라에 갔다가 당시 당 임금인 현종에게 성을 하사받았다.

 

당시의 얘기를 잠깐 살펴보자. 김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 서기 400년경 고구려에 패전한 뒤 김수로의 후손은 신라의 귀족이 됐다. 그리고 어머니인 허씨 성을 쓰던 김수로의 후손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시절 아찬의 벼슬로 있다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됐다. 당시 당나라는 현종때로 안록산의 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때 황제를 호위한 인연으로 당 현종의 성인 이씨성을 하사받았다.

 

 

▲ 정문이 있는 승기천 쪽에서 바라본 원인재의 모습

 

즉 그동안 ‘허씨’ 성을 쓰다가 이때부터 ‘이씨’ 성을 쓰게 됐다는 얘기다. 그리고 역할을 마치고 돌아온 사신 허기에게 신라에서도 그간의 공을 치하해 인천지역의 식읍 1500호를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인천의 지명은 매소홀(買召忽)이라 불리었지만, 식읍을 내리면서 지명도 소성(邵城)으로 바꾸고 허기를 소성백(邵城伯)으로 봉했다. 1500호는 지금으로 따지면 충남 태안에서 파주에 이를 만큼 넓은 범위에 이른다.

 

 

▲ 이허겸의 묘가 있는 곳에서 원인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 돈인재 옆에는 작은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인천 이씨가 부흥을 이룬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인 고려조에 이르러서였다. 이씨 성을 하사받은 허기의 10세손인 이허겸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손녀와 혼인을 하고 이허겸의 딸이 김은부와 결혼을 해서 세딸을 두었는데, 그중 맏딸이 현종과 혼인을 해서 고려 9대왕인 덕종과 10대왕인 정종을 낳았다.

 

외손녀가 왕비가 되자 이허겸은 왕비의 외할아버지라 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후(邵城候) 식읍 1500호에 봉해졌다. 나머지 외손녀 2명도 모두 현종비가 됐다. 이허겸의 손자인 이자연(李子淵)은 재상이 되고 세딸을 문종에게 시집보냈다. 첫째딸은 순종과 선종, 숙종의 세 임금과 대각국사 의천을 낳았다.

 

 

▲ 돈인재 현판. ‘어진 일에 힘쓰는 집’이라는 뜻이다. 강당으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자연의 손녀들은 순종과 선종의 비가 됐고, 이자겸의 딸인 증손녀는 예종과 인종의 비가 됐다. 이처럼 인천 이씨 가문은 왕의 외척이 되면서 고려 최고의 문벌가로 발돋움해 전성기를 누렸다. 고려조에서 130여년간 10명의 왕비와 8명의 왕을 배출하며 정사를 주도했다.

인천이라는 지명도 인천 이씨의 유래와 무관하지 않다. 백제와 고구려때는 각각 ‘미추홀’과 ‘매소홀현’으로 불렸으나 신라 경덕왕때 앞서 언급한대로 소성현이 됐다. 고려조에 들어 숙종의 어머니 인예태후의 고향으로 ‘경사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경원(慶源)’으로 바뀌면서 군(郡)으로 승격됐고, 인종때에는 ‘어머니 문경태후의 친정’이라는 의미로 ‘인주(仁州)’로 불렀다.

 

 

▲ 정문에서 바라본 모습. 가운데 돈인재와 양옆으로 동재와 서재가 배치돼 서원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길 건너편쪽은 택지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원인재와 묘역 주변은 공원화돼 있다.

 

고려말인 공양왕때는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왕의 어향(御鄕)이라 하여 7대어향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 태종때인 1413년 전국의 지명을 ‘산(山)’이나 ‘천(川)’으로 하는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인천시에서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10월15일을 ‘인천시민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인천 이씨의 본관도 지명 변천에 따라 소성, 경원, 인주, 인천 등으로 바뀌어 왔다.

 

 

▲ 돈인재에는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는데, 인천 이씨의 역사를 담은 내용이다.

 

 

강학공간을 함께 갖추고 있는 재실

원인재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길 건너편에는 아파트와 솔밭공원 등이 자리잡고 있고, 반대편 쪽으로는 승기천이 흐른다. 문은 동서쪽 양쪽으로 나 있는데, 승기천쪽에서 진입하는 동쪽문인 경선문(景先門)이 정문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도로쪽에서 들어오는 서쪽문인 첨소문(瞻掃門)이 이용하기에 편리하다. 

 

원인재는 재실인 원인재를 비롯한 건물과 한쪽 옆으로 시조 이허겸의 묘역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재실이라고는 해도 일반적인 재실과는 다소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주거를 위한 공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원인재는 서원과 같은 강학공간의 형태를 띄고 있다.

 

정문인 경선문을 들어서면 먼저 원인재가 가장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인 승휴당(承休堂)과 율수실(律脩室)이 있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갈고 닦는다’는 의미가 담긴 공간이다. 그리고 경선문과 정면으로 마주한 곳에 돈인재(敦仁齋)가 있다. 돈인재는 강당으로 이용되는 공간으로, ‘어진 일에 힘쓰는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 동재인 승휴당(12)과 서재인 율수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원인재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이 배치돼 있다. 이들 방은 오래 살라는 의미의 연수당(延壽堂)과 조상의 향기를 느낀다는 훈호실(焄蒿室)이다. 원인재가 건립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32세손이 쓴 원인재기(原仁齋記)와 33세손이 쓴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순조7년(1807년)이거나 고종4년(1835)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 지어진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돈인재는 정면 6칸, 측면3칸의 건물로 3면에 마루를 냈다. 북쪽 마루끝에는 난간을 둘렀다. 4면을 빙 둘러 26개의 주련이 걸려 있다. 이들 주련의 내용은 인천 이씨의 유래와 살아온 이야기, 후손들의 바람 등이 담겨 있다. 돈인재 옆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뒤로 도로 쪽으로 나가는 후문이 있다. 그리고 원인재 앞으로 이곳을 관리하는 건물이 있는데 명인사(明?舍)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돈인재 현판 옆 주련에 ‘일세허겸상주개국(一世許謙上柱開國’이라고 쓰여 있다.

 

 

‘연화부수형’의 명당 길지에 자리잡은 묘터

원인재 오른쪽으로는 이허겸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 묘소를 출입하기 위한 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는데 ‘산앙문(山仰門)’이라고 한다. 이허겸의 묘는 원래 문학산 아래 ‘간치도(看雉島)’라는 곳에 있었다. ‘작은 섬’ 또는 ‘가짜 섬’의 뜻을 가진 이 섬은 연수구가 개발되기 전만 해도 물이 들어오던 곳이라 섬으로 불렸던 곳이다. 

 

그런데 인천 이씨가 고려조에 전성기를 보냈던 것과 관련해 이 묘터가 명당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이곳은 마치 연꽃이 물위에 살포시 떠 있는 ‘연화부수지(蓮花浮水地)’라고 불렸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연화부수형은 명당의 길지로 꼽히는 터다. 또 이 터는 바다 가운데 거북이가 엎드린 해중복구형이기도 하다고 한다.

묘의 형태도 고려시대의 담장묘 형태로, 1000년을 넘게 보존돼온 무덤이다. 이곳은 일제때 간척사업으로 농토가 됐고 1990년대 택지개발사업 등으로 보존에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이었던 인천 이씨 대종회장 등의 노력으로 자연녹지가 조성되고 공원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 이허겸의 묘. 연화부수형의 길지에 자리잡은 묘터로 1000년을 넘게 보존돼오고 있다.

 

원인재의 후문은 첨소문인데 이는 ‘부모님이나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곳에 세운 문’이라는 뜻이다. 이 후문 앞에는 이허겸의 신도비가 있고, 한쪽에는 인천 이씨의 후손으로 고려시대의 뛰어난 문학자로 꼽히는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이 문학비에는 ‘산거(山居)’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현재 원인재는 시조 이허겸에 대한 시제 등 일년에 한두번의 가문행사를 제외하고는 인천시민을 비롯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특히 인천시와 연수구청, 연수문화원에서 진행하는 전시회나 전통혼례, 전통성년식, 전통예절, 동양꽃꽂이 등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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