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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시 ‘해미읍성’]
행정 및 군사적 기능 갖춘 해안지방의 대표적 읍성

해미읍성은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평지에 건설된 몇 안되는 읍성중의 하나다. 당초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병마절도사영으로 축성됐다가 다른 곳으로 이설되면서 관아가 옮겨왔다. 특히 병인양요 이후 천주교도 박해때 천주교도들이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한 천주교 성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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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의 전경. 아치모양의 홍예를 틀고 2층으로 올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는 읍성(邑城)을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서 쌓은 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지방의 행정 및 군사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읍성은 여러 형태로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도시에 읍성이 축조됐고,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 성에 만든 치성. 성벽에 다가선 적을 비스듬하게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세종때부터 경상 및 전라, 충청 등의 해안지방에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됐다. 이는 주로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을 높이는 것은 물론, 옹성(甕城)과 치성(雉城), 해자(垓字) 등의 시설을 만들었다.

‘옹성’이란 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기 위한 시설을 말한다. ‘치성’이란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짝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이다. ‘해자’는 적이 성으로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벽 주위에 길게 도랑을 판 것을 일컫는다.

 

▲ 읍성안의 모습. 관아건물과 민가 등이 복원돼 있다.

 

▲ 해미읍성의 객사. 지방을 다니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으나, 해안지방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있었다. 성의 크기는 고을의 등급이나 규모 등에 따라 달랐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최소 70개소에서 100여개소에 이르는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들 읍성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철거령이 내려지면서 대부분 헐렸다.

 

해미읍성은 현존하는 읍성중 가장 잘 남아 있는 읍성으로, 사적 116호로 지정돼 있다. 특히 현재 남아 있는 성들이 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산성들이 많은데 비해 이곳은 평지에 건설된 몇 안되는 읍성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당초 성안에 민가와 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를 철거하고 복원해 오늘에 이르렀다.

 

▲ 동헌과 내아건물 전경. 뒤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충청지역 군사권 관할한 병마절도사영으로 축조
해미는 지금은 서산시에 포함돼 있지만, 당초에는 서산과는 별도의 지역으로 존재했던 곳이다. 조선 태종7년(1407년) 당초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의 속현이었다가 분리된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치고 각각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 해미현(海美縣)으로 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서산군에 병합돼 해미면이 됐다.  

 


▲ 동헌. 동헌은 정무를 보던 공간이다. 옆으로 내아 건물들이 보인다.

 

바다와 가까이 위치한 해미읍성은 앞서 언급했듯 왜구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만든 성이다. ‘서산군지’와 ‘해미읍성 건물지 발굴보고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태종17년(1417년)부터 세종3년(1421년)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고자 축성한 것이다.

 

이 읍성은 효종3년(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갈 때까지 충청지역의 군사권을 행사했다. 이후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와 행정의 기능도 갖췄으며, 1914년까지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서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돼 내포 일대의 군사권을 함께 행사했다. 행정과 군사기능을 모두 갖춘 읍성이 된 것이다.

 

▲ 동헌의 내부. 정무를 보던 옛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겸영장이란 현감이 병영장을 겸임하는 체제를 일컫는 것이다. 당시의 호서지역 군사방어체계를 보면 병마절도사영을 청주로 옮긴 후에 전영(前營)을 홍주에 두고, 우영(右營)을 공주(公州)에, 중영(中營)을 청주(淸州)에, 후영(後營)을 충주(忠州)에 두었다. 숙종19년(1693년) 한때 호서좌영이 온양으로 옮기면서 해미에는 현감만 있었으나, 숙종38년(1712년) 다시 겸영장을 해미로 환원시켰다.

 

▲ 옥사. 천주교인들이 갇혀 있던 곳으로 마당에 형틀 등이 놓여 있다.

 

해미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것은 당시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에 출몰하던 토적때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효종2년(1651년) 11월13일 김육(金堉)이 토적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도절제사영을 청주로 옮겨야 한다는 건의를 했고, 며칠뒤인 11월19일 홍전을 홍청병사(洪淸兵使)로 삼아 청주목사를 겸임케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성곽을 쌓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지만, 대체로 병마절도사영이 주둔한 이후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완공된 것은 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 안쪽 상단 장대석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이라고 명문이 음각된 것으로 보아 성종22년(1491년)임을 알 수 있다.

 

▲ 동헌의 부속건물들. 동헌 뒤에 있는 건물이 책사이고, 옆의 일각문을 통해 내아로 들어갈 수 있다.

 


일제때 관아건물들 대부분 매각되거나 훼손

성의 규모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성곽 축조 당시의 기록인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성 둘레가 3352척이고 높이 12척, 여장의 높이 3척에, 적대(敵臺) 18개를 계획해 2개를 완성했고 성문도 4개소에 설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옹성은 없고, 성벽 둘레에 3626척의 해자를 팠으며, 성안에 3개의 샘이 있다’고 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3곳, 군창이 설비돼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읍성의 둘레 6630척, 높이 13척, 치성 380척, 옹성 2곳, 남문이 3칸이며 홍예를 틀고 2층의 다락을 지었고, 동문?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다’고 하고 있다. ‘탱자나무로 성을 둘렀고, 샘과 우물이 6개’라는 기록도 있다.

 

문헌에 따라 성의 둘레가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용척(用尺)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문종실록의 기록은 포백척을 적용한 것이고, 여지도서의 기록은 주척을 사용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실록에서 ‘적대’라고 기록된 것이 여지도서에는 옹성으로 표기됐다고 한다. 1926년 발간된 서산군지는 여지도서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진남문 우측에는 ‘해미 좌영루첩중수비’가 있다. 여기에는 헌종14년(1849년)에 해미 겸영장으로 부임한 박민환이 헌종17년(1850년)까지 폐허가 된 읍성을 크게 중수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로 미루어 한동안 읍성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것을 조선 후기에 다시 수축했음을 알 수 있다.

 

▲ 내아건물의 전경과 측면 모습. 내아는 동헌에 딸린 살림집이다.

 

성의 축조는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해서 쌓아올렸다. 성벽의 상부 폭은 2m가 조금 넘는다. 성곽의 돌에 공주, 청주 등의 지명이 공사구간별로 음각으로 표시된 것으로 보아 여러 지역의 장정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에 탱자나무가 둘러쳐져 ‘탱자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탱자나무가 없다.

 

한편 읍성에 들어선 관아건물로는 동헌과 객사, 아관청, 작창, 장군창, 현사청, 내아, 옥사, 책실, 사령청, 교련창, 관노방, 고자실, 외삼문, 내삼문, 동서남문루가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서산군지에는 그 규모와 면적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선조12년(1579년) 이순신(李舜臣)이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근무했던 기록도 남아 있다. 

 

동헌(東軒)은 현의 정무(政務)를 보던 곳이고, 내아(內衙)는 지방관리와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생활공간이다. 객사(客舍)는 지방을 다니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으로,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관리들이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이들 읍성내의 관아건물들은 대체로 일제 초기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성내에 학교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 현대건물들을 건축하면서 관아건물들은 대부분 매각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져 훼손됐다. 지금은 동헌과 내아, 객사, 옥사 등 일부와 민가 등을 복원해 놓은 상태다.

 

읍성내에 있는 망루(望樓)인 청허정(淸虛亭)은 읍성이 완공되던 1491년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가 건립한 것이다.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겠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병사들이 쉬거나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이 시를 짓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읍성내의 민가들은 대체로 초가형태로 복원돼 있다.

 

▲ 읍성내의 망루인 청허정.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병인양요 후 천주교 박해당한 순교성지로도 유명

한편 해미는 천주교의 성지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곳은 1866년 일어났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시작된 천주교도들의 박해때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시 충청지방 일대에서 잡혀온 10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읍성 안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172호로 지정된 커다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호야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가 바로 천주교 박해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수령이 300년쯤 된 것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나뭇가지에는 지금도 당시 고문에 사용됐던 철사줄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갇혀 있던 옥사(獄舍)도 복원돼 있다.

 

 ▲ 읍성 주민들에게 ‘호야나무’로 불리던 회화나무.

천주교 박해의 산증인이다.

 

또 읍성 인근 해미천 주변에는 천주교에서 순교성지로 성역화해놓은 곳이 있다. 이곳은 박해 당시 해미천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늪과 숲이 있어 많은 인원의 신자들을 처형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기념관을 비롯한 건축물과 유적 등이 분포해 있다. 올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곳을 방문했다.

 

서산시는 교황의 방문 등을 계기로 해미읍성 일원에 대해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관광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관광상품을 개발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은 교황 방문 이후 순례길 탐방에 나서는 국내 천주교인 등 관광객들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 읍성내에 복원해놓은 민가들. 대부분 초가로 복원돼 있다.

 

해미읍성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훼손을 입었다. 순천의 낙안읍성이 민가들이 잘 보존돼 있음에 비해 이곳은 성곽을 제외하고 관아나 민가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발굴을 통해 건물터가 확인되면서 그나마 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조선시대의 민속과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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