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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형 주택 하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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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고북면 가구리 김재호 씨 고택]
6대째 내려온 삶터에서 당당한 슬로우 라이프

인생을 길게 보면 지금 당장 드러나는 승자나 패자는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젊은 날 귀향해 6대째 내려온 터전에서 살고 있는 김재호 씨의 인생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먼 훗날 그가 떠나도 이 집과 함께 자취는 남겨질 것이기에,

노후의 인생에도 남다른 활기가 깃드는 것이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 김재호 씨의 고택은 가장 깊숙한 안쪽에 긴 안채가 ㅡ자로 늘어섰고, 바깥채와 창고 건물이 ㄷ자로 자리하며 마당을 둘러싼 형상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ㅁ자 주택의 아늑함을 금세 체감할 수 있는 구조다.

 

충남 서산시 고북면 가구(加口)리. 황금 들녘을 마주하고 있는 김재호(63) 씨의 고택은 마을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1969년 지은 ㅁ자집으로 그 풍채부터가 남달라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안채는 지붕만 슬레이트를 덮었을 뿐 소나무로 기둥과 보를 세우고 황토로 벽체를 채운 한옥이다. 대청마루를 가르는 굵은 대들보에 먹으로 새겨 놓은 ‘서기 1969년 6월13일’이라는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김 씨의 아버지가 안면도 소나무로 집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오랜 기간 안면도를 잇는 연육교 공사를 기다렸다가 공수해온 나무라니 이 집에 들인 아버지의 정성이 짐작된다.

 

▲ 수령 300년의 소나무와 동거동락 해온 김재호 씨. 태풍의 영향으로 기울어진 소나무를 지지해 놓은 것이 보인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 나이에 자유를 찾아 고향집으로 되돌아왔다.

 

▲ 뒷동산에 올라서 내려다 본 주택. ㅁ자로 둘러싸인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69년 집을 지을 당시 올렸다는 슬레이트 지붕의 상태가 양호하고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보기 드문 경관이 펼쳐진다.

 

 

1969년 지어진 ㅁ자 주택, 안채는 한옥 구조 따라

69년 이전에도 이 터에 집이 있었다. 김 씨의 6대조 할아버지가 지은 한옥이었다. 6대조 할아버지가 집 뒤편 동산에 심었다는 수령 300년 된 소나무가 이 터의 오랜 역사를 증명해주듯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다.

 

 

김 씨는 이 터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소재 대학의 사진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 무렵에는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직장에 얽매여 살기 싫었던 젊은이의 치기도 이유였지만, 아버지가 집을 짓는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했던 막내아들은 형과 누나들이 도시로 떠나고 부모만이 남겨진 이 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대학시절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원 없이 사진을 찍었어요. 그런데, 졸업한 선배들이 직장이라고 들어가서 얽매여 사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니다 싶더군요. 고향 가서 농사짓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게 직장생활 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죠. 세월이 흐르면서 잘난 형제들은 다 나가고 결국 막내인 제가 이 터를 지키고 있는데, 젊은 날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때의 선택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죠.”

 

▲ 추위 때문에 긴 처마 아래로 창을 덧댔다.

그렇지만 여전히 마당의 햇살이 깊숙이 스며드는 기분 좋은 회랑이다.

 

 ▲ 69년 지었을 때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대청마루. 안면도에서 공수해온 소나무로 지은 집이다. 지붕에 두툼한 황토를 덮어 단열성이 좋다.  

 

 ▲ 세월이 흐르면서 부엌도 입식으로 개선했다. 마당에 있던 화장실 역시 부엌 옆 실내로 끌어들였다.

 

 ▲ ‘ㅡ’자로 길게 자리한 안채가 보이는 마당. 남향으로 자리해 따뜻하고 뒤편에 낮은 동산이 북풍을 막아주어 또 따뜻하다.

 


아버지의 정성이 깃든 고택 지키고자 젊은 날 귀향

김 씨가 각별하게 여기는 안채는 1969년 아버지가 손수 구해 온 목재로 지어졌다. 아버지는 직접 목수를 부렸다. 마지막 남은 지붕을 덮을 무렵 금전적인 여유가 따르지 않아 결국엔 슬레이트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69년에 처음으로 금강슬레이트라는 회사가 생겼어요. 거기서 슬레이트 지붕재를 사오면서 아버지가 말하길, 언젠가는 걷어내고 기와를 꼭 올리자고 했죠. 그런데 40년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내 남은 인생의 숙제가 저 슬레이트를 멋스러운 기와로 교체하는 겁니다.”

 

환경적인 문제로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슬레이트이지만, 그 시대의 새 집들은 유행처럼 슬레이트를 지붕에 얹었다. 전형적인 한옥 위에 슬레이트를 덮는 것이 못내 거슬렸던 아버지는 훗날을 기약했던 것이다.

 

▲ 지붕 너머로 집터와 300년을 함께한 장송이 보인다.

김 씨는 하루가 멀다하고 소나무 그늘 아래서 머물렀다 내려온다.

 

그러나, 기와로 꼭 교체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슬레이트 지붕의 상태는 양호하다. 오히려 70년대 유행한 슬레이트집의 정취가 잘 간직되어 있다. 대다수 농촌에서는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그 위에 당시로서는 신소재인 슬레이트를 결합했다. 해방 후 거들떠보지 않던 적산가옥이나 근대건축물이 오늘에 와서 문화유산으로 대접받듯이, 슬레이트집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택 양식인 만큼 걷어 내는 게 못내 아쉽다.

 

“끊임없이 관리를 한 거죠. 슬레이트 지붕의 가장자리에 빙 둘러놓은 물받이 보이죠? 거기를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요. 낙엽이나 흙 때문에 한번 막히기 시작하면 누수가 생기니까 가을이 오면 낙엽과의 전쟁을 벌이는 거죠. 지금껏 살면서 벽이 새거나 지붕이 새서 문제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 집주인은 분재에도 각별한 취미가 있다. 마당 한가득 탐나는 분재 화분들이 빼곡하다.

 

마당 한켠에 유독 크고 튼튼해 보이는 사다리가 있는 게 그 이유인가. 사실 집안 어디를 보아도 깨끗하고 정갈한 게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만큼 집 관리에 철저하다는 얘기다.

“봄이면 풀과의 전쟁이죠. 집터와 주변 동산까지 3000평 정도 되거든요. 1주일에 한번은 풀을 깎아주어야 하니까 농사하랴, 집관리 하랴, 또 종갓집 노릇하랴 쉽지만은 않았죠. 9남매 형제의 자식과 손주들까지 모두 모이면 100여명 되거든요. 이 넓은 집이 꽉 차고 넘쳤어요.”

 

3년 전 김 씨의 노모가 101살의 나이로 영면한 이후, 친척들의 방문이 뜸해졌다. 모처럼 김씨 부부에게도 휴식 같은 조용한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집 바깥으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근사한 정자를 지어놓고 대부분의 낮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다.

 

젊어서 농사짓고 늙어서 농지연금 받으며 전원생활 즐겨

사진기 둘러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예술가를 꿈꾸던 총각이 농촌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지난 40년, 만족스러울까.

“나 지금 행복해요. 자식 둘 장가보내고 내 할 일도 끝났고요. 물론 살면서 후회는 잠깐 있었어요. 쉰살 즈음이었을까. 한창 최고로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니까 순간 부럽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퇴직하고 나니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적적해해요. 고향에 터전 잡고 한량처럼 소일거리 하며 노년을 보내는 저를 더 부러워하는 입장이 됐죠.”

 

▲ 조카들과 손주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흔들 그네의자

 

몇 년 전 김 씨는 스스로에게 은퇴를 선언했다. 20마지기(약 4000평)에 달하는 논농사에서 손을 떼고 농지연금을 받아가며 생활 중이다. 농사를 그만둔 뒤로는 바깥마당에서 노니는 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다. 집 앞으로 난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는 넓은 잔디밭이 그곳이다. 지난해엔 마을 사람들 몇몇과 손수 정자를 지었다. 주민들이 오가며 앉아서 막걸리 한잔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된 것은 물론이다.

 

김 씨가 모은 수석들도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인다. 취미 삼아 토종벌꿀 농사도 짓는다. 바깥마당에 풀어놓은 닭은 화초처럼 딱 한 마리만 키운다고 했다. 다시 대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근사한 소나무 분재들은 그의 고상한 취미를 엿보게 한다. 그는 돌, 나무, 자연을 좋아하는 품성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온 게 분명하다.

막내아들에게 시집 와 종갓집 맏며느리처럼 살아온 아내 김윤화(59) 씨도 요즘은 지역문화회관과 복지회관을 오가며 취미 생활 삼매경에 빠져있다. 오전엔 요리를, 오후엔 스포츠 댄스를 배운다.

 

▲ 바깥마당에서 만난 거대하고 우람한 수석들은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그의 애마인 스쿠터도 마당을 지키고 있다.

 

“나이 들수록 시골살이가 괜찮아요. 갑자기 살러 들어오면 힘들지만, 조금 일찍 시작하면 연습해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준비 없이 덥석 시작할 일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교사인데 전출이 가능한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대를 이어 이 집에 살면서 관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았다. 바깥마당에 놓인 스쿠터를 애용하는 정도다. 그 흔한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기 명의의 은행통장도 없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탐욕을 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게 그의 깨달음이다.

 

단 하나 바람이 있다면, 자신을 평생 품어준 이 집이, 두 아들의 긴 인생도, 또 그 아들이 낳은 아이들의 긴 인생까지도, 대대손손 따스하게 보듬어주며 인연을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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