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피플&컬처 > 컬처
[장소의 재탄생전]
시간과 사건으로 본 한국근대건축

한국근대건축의 ‘지금’을 ‘시간’과 ‘사건’을 얼개로 정리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8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장소의 재탄생’전이 그것. 전시는 오는 12월14일까지 계속된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자료협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우리에게 근대 건축이란 흔적 없이 사라진 잊힌 대상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지금 우리와 호흡하며 새롭게 탄생한 근대 건축물은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건축 안에서 살아남은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가치는 어떤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고 있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소의 재탄생’전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사)도코모모코리아(한국근대건축보존회)가 공동주최하는 이번 전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2014 서울 도코모모 세계대회’의 주제인 ‘충돌과 확장(Expansion & Conflict)’에서 시작됐다.

 

전시 관람의 포인트는 서울이라는 대표성을 띤 장소에서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오늘을 잇는 건축은 무엇인지 살펴보는데 있다.

또한, 그 안에서 가장 존중받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음으로써 근대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함께 한국근대건축의 동시대 현 주소를 새롭게 해석해 보기로 한다. 

 

#1 사라진 기억

사라진 근대건축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다

한국의 근대사는 개항, 일제 강점기, 분단과 전쟁, 군사 독재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근대건축물은 순간의 요구에 부합하며 태어났고 사라지기도 했다.

 

격동의 현실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를 기억하는 풍경으로, 개인의 사건을 담아낸 공간으로, 새로운 건축 형식을 보여주는 진보의 상징으로 우리 곁을 지킨 건축들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소멸이 개연성을 갖는 것, 의아함을 지니는 것, 때로는 아쉬운 뒤안길에 놓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사라진 건축은 우리에게 근대 건축의 보전과 소멸의 경계와 그것을 결정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2 풍경의 재현

근대건축의 얼굴을 지키다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서양의 양식주의 건축물들은 우리의 전통 건축과 충돌하면서 당대 시민들의 인식에 천천히 자리잡아갔다. 근대 도시 풍경은 그 자체로 신세계였으며, 유람의 대상이었고,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세대를 뛰어넘어 존재했던 풍경은 도시 확장에 따른 개발과 상업화로 인해 재편됐다. 개발의 소용돌이에 놓인 도심 속 많은 건축이 사라졌지만, 숱한 어려움 끝에 과거의 풍경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이 있다.

 

1925년 경성역으로 출발해 2011년 문화역서울이라는 복합공간으로 태어난 구 서울역과, 지금은 일민미술관으로 활용중인 동아일보 사옥이 그것이다. 그밖에 2002년부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여 온 건물은 본래 1928년 지은 대법원이다.

 

물리적으로 재현된 풍경은 시민들에게 집단 기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근대건축의 ‘얼굴’을 지키려는 행위에는 과거의 사건과 시간을 회복하고 이어가려는 지금 세대의 의지가 담겨 있다.

 

[ 1926 동아일보 사옥 → 2001 일민미술관·안병모 설계 ]

▲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_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926년 준공 당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로 그 시대의 고층 업무시설 모습을 잘 보여준다.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이 혼합된 구조에 건물 외부는 타일로 마감했다. 1950년대부터 여러 차례 증축됐고 1994년 동아일보 사옥이 충정로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일민미술관으로 개관됐다. 미술관은 신축 당시의 본래 특성을 가능한 보존했고, 부분적 개축만 진행했다. 구 동아일보 사옥은 도시가 계속 변하면서 생기는 세종대로의 새로운 풍경과 함께 과거와 현재, 도시와 건축을 매개하는 기억의 장치다.  


[ 1934 명치좌·타마타 지즈지 설계   1962 국립극장   2009 명동예술극장 ]

 

▲ 명동예술극장 _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934년 일본 건축가 타마타 지즈지가 설계한 명동예술극장은 과거 명치좌, 시공관, 국립극장 등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면서 사용됐다.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하고 이 건물이 금융회사에 매각된 후 사무실로 개조되어 사실상 공연장으로서 생명력을 잃었다. 더불어 당대 문화인들의 무대였던 명동은 점차 상업화되면서 예전 명성을 잃었다. 문화의 중심역할을 했던 극장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각계 각층에서 이뤄지고 10년간의 길고 힘든 역경을 견디고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부활하게 된다.

 

 [ 1926 경성부청·사사 게이이치 설계 → 1946 서울시청 → 2012 서울도서관]

▲ 1997년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_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서울시청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 청사로 지어졌다.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지상4층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이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하는 동안 수차례 증·개축하면서 건물 외관에 다소 변형이 생겼지만 건물의 주요 부분은 원형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신청사를 지으면서 원형보존과 복원공사를 병행하여 현재는 신청사와 함께 정보문화공간(서울도서관)으로 사용 중이다.

 

 

#3 주체의 귀환

근대건축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다

근대는 새로움을 갈구하는 시기이고,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주체는 바로 각 분야의 개인들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이는 건축도 예외가 아니었다.

 

침략과 전쟁으로 척박했던 한국의 건축 토양 위에서 꽃을 피우려는 건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구자적인 태도로 우리 건축의 미래를 고민하고 일제의 것이 아닌,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만의 진보적인 건축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노력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

고, 현 시대의 우리들은 그들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대가로 각인된, 몇 되지 않는 건축가의 흔적들도 사라질 위기에 있다.

 

[ 1977 공간사옥·김수근 설계 → 2014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

▲ 1977년 공간사옥 개축공사

공간사옥은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자유센터, 경동교회 등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탄생시킨 건축의 산실이다. 그는 공간사옥이라는 작은 건축물 안에서 휴먼스케일, 공간의 연속성, 방과 방, 내부와 마당의 유기적인 겹침 등을 선보였다. 공간사옥의 검정색 벽돌은 단순한 재료지만, 이웃한 한옥의 기와지붕 등 주변 풍경과 매우 잘 어울렸음을 옛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간건축의 부침으로 인해 2013년 민간에게 사옥이 매각되어 미술관으로 바뀌었고, 2014년 2월 등록문화재 제586호로 지정됐다. 공간사옥의 새 주인인 아라리오는 공간의 옛 이름을 새로운 미술관에 삽입해 김수근의 건축을 기념하고 있다.

 

[ 1968 서울 컨트리 클럽하우스·나상진 설계

    2009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조성룡+최춘웅 설계 ]

 

▲ 현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옛 서울컨트리클럽하우스)_윤준환 사진

현재 어린이대공원 자리는 1927년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이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골프장은 어린이대공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 변화의 중심에서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이 설계한 서울 컨트리 클럽하우스가 살아남았다. 클럽하우스는 교양관이라는 이름으로 식당, 전시공간, 관리사무소로 활용되다가, 2010년 ‘꿈마루’라는 공간으로 리뉴얼하게 된다.

조성룡 최춘웅 두 건축가는 기존의 건축 틀을 손상하지 않고 달아내는 작업으로 당시 건축물의 모습과 건축가의 흔적을 드러냈다. 우리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건축가 김중업과 김수근 외에 나상진이라는 건축가의 초기 설계의도와 조형 언어를 되짚어봄으로써 한국의 모더니즘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 1959 유유산업·김중업 설계   2014 김중업박물관·박제유 설계 ]

▲ 김중업 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중업박물관은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한 (주)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건물로, 우리나라 근대건축계의 거장인 고 김중업 선생이 설계했다. 김중업은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로서 프랑스대사관, 삼일로빌딩, 평화의 문 등 굵직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유유산업은 그의 초기 설계작으로 공장건물에 조각작품을 접목시키는 등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현재 유유공장 건물 중 5개 동이 현존하고 있으며 이를 리모델링해 전시관 및 사무동으로 사용 중이다. 

 

[ 1978 선유정수장 2002 선유도공원·조성룡 + 정영선 설계 ]

 

 

 

▲ 선유도 조경 계획_서안조경 제공

선유도는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한강 진경’에 묘사된 선유봉의 모습으로 유명하다. 일제 시대의 제방 축조와 1970년대 산업화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정수장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다양한 기능과 형태를 강요받았다. 그 결과 이곳은 잊힌 땅이 되었다.

2000년 12월 선유정수장 폐쇄를 기점으로 조경가 정영선과 건축가 조성룡은 버려진 사업시설물에 공원이라는 새로운 기능 이상의 기온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단편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의 선유도를 단순히 외형을 바꾸는 것이 아닌, 옛 흔적을 남기고 이를 이용할 미래의 시민들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고민했다.

서울과 한강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버려진 장소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공공프로젝트로 도시 안에 또 다른 자연으로 재탄생된 것이다.

 


#4 연결될 미래

근대건축의 얼굴을 지키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전통 도시 조직을 허무는 메가스트럭처 건축이 서울 중심에 등장했다. 철을 이용한 검은색 고층빌딩이 세워지고, 생전 보지 못했던 은색 알루미늄커튼월의 낯선 건물이 들어섰다. 4개의 회색 콘트리트 덩어리로 이뤄진 세운상가는 도시정비를 위해 도입된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이다.

 

한편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을 연상케 하는 당대 최고층 건물이었던 삼일빌딩과 알루미늄커튼월로 외부를 마감한 명동 성모병원은 근대 건축물의 미려함과 기술의 혁신을 보여준다. 

 

이 세 건축물들은 모두가 오랜 세월 도시의 랜드마크로서 우리 기억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이들 건축물의 출현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인 김수근, 김중업, 김정수가 수면 위로 등장했다. 시대정신이 반영된 건축의 미학적 추구, 기술의 혁신 그리고 대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1967 세운상가·김수근 설계 ]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950년대 청계천 주변은 2000여가구의 판잣집이 밀집된 슬럼지대였다. 1966년 서울시 불량지구 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종묘~대한극장 간 1km에 이르는 세운상가 아파트를 착공했다. 세운상가는 국내 주상복합건물의 효시로 김수근이 설계했다. 80년대 국내 유일의 대형전자상가가 입점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1990년대 들어 점차 쇠락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08년 12월부터 단계적으로 상가를 철거하고 대규모 녹지축을 조성하는 사업에 착수했으나, 전 현대상가 자리만 철거하여 초록띠공원을 만들었다. 2013년 박원순 서울시장은 재정비 촉진계획 변경안을 통해 철거에서 리모델링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 1960 명동 성모병원·김정수 설계    1986 가톨릭 회관 ]

▲가톨릭회관. 윤준환 사진.

1958년 명동2가 1번지에 의학부 성신대학 제1부속 성모병원 신축기공식이 치러졌다. 지하 2층, 지상 7층, 병상 300개 규모의 대형병원이었다. 1970년 분신한 전태일이 후송되었으나 사망, 시장대표들이 병원에 모여 근로조건 개선각서에 서명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6년 성모병원이 여의도로 이전하면서, 구 건물을 가톨릭회관으로 개관했다. 2011년 명동성당 일대 관광특구 계획이 발표되면서, 리모델링 계획을 수립했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