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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시 고북면 ‘김동진 가옥’]
특이한 건축적 요소 지닌 부농의 살림집

서산시 고북면에 있는 김동진 가옥은 충청지방 부농의 살림집이다. 집뒤의 낮은 야산아래 넓은 터에 자리잡은 고택은 웅장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 중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부엌을 경계로 따로 구성한 점이나 광채에 지하 수장고를 만든 점 등 특이한 건축요소도 눈에 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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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뜰에서 내려다본 가옥 전경. 집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內浦)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포’란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고을을 말하는 것으로, 임진년과 병자년에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고,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며 생선과 소금이 흔해 부자가 많고 대를 이어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산과 해미는 바로 그 내포 열고을에 속한다.

 

 

▲ 김동진 가옥의 문앞. 집의 규모에 비해서는 다소 작은 대문이 위치하고 있다.

 

서산시 고북면(高北面)은 당초 홍주목(洪州牧, 오늘의 홍성)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조선 말기인 1895년의 행정구역 개편때 해미군에 편입됐다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산군 고북면이 됐다. 그후에도 면내 일부 지역이 다른 군에 편입되는 등 여러차례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 사랑채와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서 있다.

 


고을에 도움을 주어 송덕비 건립

김동진 가옥은 고북면의 면소재지인 ‘가구리(加口里)’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가구리’라는 이름이 재미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인구가 늘어나는 지역’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산시 홈페이지에 나온 지명유래에도 ‘고북면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점점 늘어날 것을 예상해서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가구리에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나지막한 구릉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넓은 논이 펼쳐진 곳에 김동진 가옥이 들어서 있다. 집앞에서부터 구릉위 숲 있는 곳까지 흙으로 만든 토담이 집을 둘러싸고 있다. 겉에서 보면 문간채 뒤로 큰 가옥 두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옆으로 작은 부속채들이 붙어 있는 모습이다.

 

 

▲ 김동진 가옥의 사랑채. 일반 가옥과는 다른 특이한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서산시청 자료에 따르면, 이 집을 지은 것은 사랑채 상량문에 ‘소화칠년임신팔월십사일상량(昭和七年壬申八月十四日上樑)’이라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193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이집으로 시집을 와서 지금까지 집을 지키고 있는 안주인 조계연(趙季硏) 할머니에 따르면 집을 지은지가 족히 150년은 넘었다고 한다.

 

 

▲ 사랑채 중간 사랑방 앞으로 난간을 두른 점도 눈에 띈다.

 

다만 집을 지은 이후 중수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이로 인해 집의 규모가 당초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실제 이 집 안채의 경우만 하더라도 할머니가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당초의 규모보다 크게 줄여 고쳤다. 사랑채 앞이나 안채 옆 부분 등에도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게 할머니의 설명이다.

 

이 집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김동진 가옥’은 할머니의 시조부이자 이 집의 소유주로 돼 있는 할머니의 큰 아들 김종호(金宗鎬)씨의 증조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마을 한쪽에는 ‘가구리 비석군’이라 이름붙여진 비석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여기에는 ‘독지가김동진기공송덕비(篤志家金東璡紀功頌德碑)’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1931년에 건립된 것으로 새겨진 내용은 흥학(興學)과 진휼(賑恤)에 관련된 내용이라고 한다. 김종호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마을 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했다고 한다. 또 가난한 이를 돕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 사랑채의 사랑방과 건넌방 사이에 이중창호를 설치했다. 2 사랑채에 설치된 들어열개. 사랑채 공간들사이의 높낮이를 감안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가구리는 서산내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자리잡은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집성촌 가운데 하나다. 특히 조선 영조대왕비인 정순왕후 생가가 있는, 일명 ‘한다리마을’로 불리는 음암면 유계리를 비롯, 곳곳에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 산재해 있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배출된 경주 김씨 가문의 인물도 적지 않다.

 

서산향토문화대전(이하 향토대전)에 따르면 경주 김씨가 서산에 정착한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였다고 한다. 조선 명종때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이 이곳을 만년의 은거지로 이곳을 택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서산에 이거해 정착하게 된 것은 그의 큰아들인 김호윤(金好尹)에 의해서라고 기록돼 있다. 조계연 할머니나 이 집 바로 옆에 사는 일가인 김재호씨의 설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사랑채 사랑방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고북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성씨들은 대략 7개 정도 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중 경주 김씨들은 먼저 지금의 정요리인 산밑에 정착했다. 향토대전에는 이들을 ‘산밑 김씨’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산밑 김씨가 다시 가구리로 옮겨 정착하면서 ‘가구 김씨’로 불리게 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산밑 김씨나 가구 김씨는 모두 경주김씨인 셈이다.

 

산밑 김씨는 상촌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으로, 그의 10세손인 김서(金瑞)가 입향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가구 김씨는 김서의 장증손인 김한상(金漢尙)이 가구리로 옮긴 후 후손들이 늘어나면서 집성촌이 됐다. 특히 가구 김씨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 한때 고북면에서 가장 번성한 집성촌이었다.

 

 

▲ 안채 전경. 옆으로 보이는 집이 행랑채이다. 당초 안채와 행랑채는 지붕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안채 등 중수 때 당초의 규모보다 크게 줄어

이 집은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서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ㅡ’자 형태를 이루며 나란히 서 있고, 옆으로 헛간채와 화장실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규모는 현재로도 큰 편이지만, 안채는 당초 이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할머니가 이 집으로 이사온 후 집을 고치면서 안채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집은 수천석을 하는 큰 부농이었다. 안채의 규모도 지금의 거의 두배에 이를 만큼 컸다. 그러나 할머니가 시집을 왔을 때는 살림살이의 규모가 줄어들면서 집을 살림규모에 맞추어 실용적으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작은 문간채가 달린 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정면 11칸의 큰 규모이다. 가운데 사랑방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작은 방이 있고, 오른쪽으로 사랑대청이 있다. 사랑채 앞으로는 널찍한 퇴를 두었는데, 특히 사랑대청의 앞부분은 퇴를 높이고 난간을 둘러 누마루처럼 꾸몄다. 그리고 사랑대청 측면으로도 퇴를 둔 점이 눈에 띈다.

 

사랑채에서는 특이한 공간구성이 몇군데 있다. 먼저 부엌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와 이어져 있는 공간이 있는데, 사랑채 부분이 안채를 완전히 등지고 있는 데 반해 이 공간은 안채를 향하고 있다. 사랑채에 부속돼 있으면서도 안채에서 이용하는 공간이다. 사랑채 부엌의 정면에 문을 만든 점도 일반 민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 사랑채에 붙어 있으면서 안마당을 향하고 있는 공간. 이 공간은 사랑채에 연결돼 있지만, 안채의 부속공간이다.

 

그 옆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고, 헛간채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중문 가운데에도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이유인즉 당초 안채로 향하는 공간의 중문간쪽 측면에 창호가 나 있었지만, 집을 고칠 때 이를 막아 벽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호는 없어진 채 들어열개만 남게 된 것이다.

중문에서 이어지는 헛간채에는 지하 수장고가 마련돼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일반 민가에서 건물밑에 지하 공간을 만들어 수장고로 활용한 예는 거의 드물다. 대개는 땅을 파고 그 밑에 묻어두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집의 경우 헛간채의 문을 열면 넓은 지상 창고와 함께 지하 수장고가 함께 눈에 들어온다.

 

헛간채 옆으로는 다시 담장이 있고, 그 사이에 밖으로 나가는 작은 일각문이 있다. 이 일각문을 나서면 화장실로 통한다. 일각문 옆으로 다시 작은 행랑채가 이어진다. 행랑채와 헛간채 사이에 난 작은 일각문 윗부분은 정려 형태로 꾸며져 있다.

 

 

▲ ‘풍구’라 불리는 농기구. 쌀과 겨를 걸러내는 기구다.

 


제사공간 위해 안채 대청을 2단으로 구성

사랑채 뒤쪽, 행랑채 옆쪽으로 안채가 역시 ‘ㅡ’자형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당초보다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느 집의 안채 못지않은 규모를 갖고 있다. 규모를 줄이는 바람에 공간구성이 다소 이상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안방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이 놓이고 오른쪽에 대청이 있다. 안방 뒤로는 뒤뜰을 향해 작은 퇴가 있다.

 

이 집 안채에는 건넌방이 없는데, 이는 곧 집의 규모를 줄이면서 건넌방을 없애고 벽으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집의 가운데에 위치해야 할 대청이 오른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청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마루가 2단으로 놓인 점이다. 대청 높은 곳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다.

 

 

1 헛간채의 문과 지하공간. 헛간채의 문을 열면 지상의 수납공간과 함께 지하에도 넓은 공간이 나온다. 2 뒤뜰에서 내려다본 마을 정경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조계연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사랑채를 나누는 담과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었고, 사랑채 앞과 옆에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대문앞에도 외양간과 축사, 행랑채가 있었다. 또 고기같은 것을 걸어놓기 위한 찬광도 있었다. 그러니까 비단 안채의 규모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집의 규모가 당초보다 줄어든 셈이다.

 

집 뒤뜰 높은 곳에서 집을 내려다보면 집 앞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아직은 추수를 다 끝내지 못해 누런 벼이삭들이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집 뒤의 구릉에는 푸른 숲이 펼쳐지고, 집앞으로는 황금빛 들판이 펼쳐지는 풍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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