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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수내동가옥’]
조선시대 경기도 농촌 살림집의 일상 보여주는 초가

분당 수내동 가옥은 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한산 이씨가 살던 집이다. 당초 마을을 이룬 70여호중 한산 이씨가 30여호에 이르렀으며, 6.25때 대부분의 집이 파괴되거나 불탔으나 이 집은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해 왔다. 안채와 행랑채, 광채로 이루어진 그리 크지 않은 초가이지만 두루 격식을 갖추고 있는 집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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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내동가옥 전경. 당초 한산 이씨 집성촌이었다가 분당신도시 개발로 다른 집들은 모두 철거되고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집이다. 경사진 안채의 뒤뜰에 흙담을 둘러쳤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藪內洞)은 향토지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당초 ‘숲안’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때는 낙계(落溪)라 불리던 곳으로, 조선 경종때 청백리를 지낸 이병태(李秉泰)가 이곳에 숲을 가꾸어 숲안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내’는 ‘숲안’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집의 측면 위쪽에서 바라본 집의 모습. 멀리 보이는 고층아파트의 모습이 초가와 대조를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에 속한 지역으로 ‘수내촌(藪內村)’으로 불리다가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수내리’로 바뀌었다. 1971년에는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속했고, 1973년에는 ‘수내동’으로 바뀌는 것과 함께 성남시 돌마출장소에 속했다. 그후 현재의 성남시 분당구에 속한 지역이 됐다.

수내동에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 집성촌이 있었다. 전체 마을을 이루는 70여호중 절반가량인 30여호가 고려말 충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인 한산 이씨 문중이었다. 이 마을에 숲을 가꾸어 마을이름을 바꾼 이병태도 한산 이씨의 일족이다. 그는 조선시대 청백리로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된 인물이다.

 

 

▲ 안채. 4칸의 넓은 대청과 오른쪽 건넌방 앞에 약간 높은 마루가 눈에 띈다. 오른쪽에 있는 장독대의 모습이 정겹다.

 


한산 이씨가 살던 집성촌에 남은 문화재

분당신도시 건설과 함께 이 지역이 신도시 지역으로 수용되면서 마을 집들은 모두 철거됐다. 다만 신도시 건설과 함께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곳은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키로 하고 이 일대에 중앙공원을 조성했다. 현재 공원 안에 한산 이씨의 묘역과 함께 수내동 가옥이 가옥중에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묘역은 마을의 뒷산인 나지막한 영장산(靈長山)에 조성돼 있는데 한산 이씨의 종산이다. 나라에서 공신들에게 내린 사패지(賜牌地)로서 조선후기인 16세기초부터 한산 이씨의 묘역으로 조성된 것이다. 분당지구의 가장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묘제 및 석물양식의 변화 등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녀 시도기념물로 지정했다.

 

 

▲건넌방에도 사람의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방앞에 높고 널찍한 마루를 만들어 마치 사랑같은 느낌을 준다.

 

이 산은 마을 뒷산이라 해서 ‘뒷뫼’라 불리기도 했고, 임진왜란때 군인들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해서 ‘임진봉(壬辰峯)’으로 불리기도 하던 곳이다. 이 묘역에는 이 마을에 들어온 입향조인 이장윤(李長潤)을 비롯해 이증(李增), 이지함, 이경류(李慶流) 등의 묘가 있다. 이장윤은 봉화현감을 지낸 인물이다.

 

이 마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은 조선시대 문신인 이증과 이지함, 앞서 말한 이병태 등이다. 이증은 호가 북애(北崖)로,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됐다. ‘북애시고’(규장각소장)의 저서가 있다. 이지함은 잘 알려진대로 토정비결을 쓴 인물이다.

 

 

 안채 뒷면. 초가지붕의 둥근 곡선이 고즈넉하고 옛스런 정취를 자아낸다

 

마을 옆으로는 내가 흘렀는데 지금의 분당천이다. 분당구 율동 큰매지봉에서 발원해 탄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이다. 숲안마을에서는 앞개울, 또는 벌치개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숲안마을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도 주변의 커다란 느티나무와 함께 중앙공원 호수옆에 남아 있다.

 

숲안 마을 한산 이씨와 관련해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하나는 연못의 북쪽 언덕에 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정자터에 얽힌 이야기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아서 거북의 머리되는 곳에 현재의 연못을 파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물을 취한 거북의 형세가 너무 좋아 날아갈 듯해 거북의 네 발되는 위치에 비석을 세워 거북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마을의 수호를 기원했다고 한다.

 

또하나는 ‘말무덤’이다. 조선시대때 병조좌랑을 지낸 이경류가 경북 상주에서 왜병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숲안 마을 윗산에 묻었다. 그후 상주에서 주인의 피묻은 한삼과 유서를 물고 500리를 달려온 말이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퍼하다 죽었다. 그래서 그 말을 이경류의 묘앞에 묻어주었는데, 그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다.

 

 

▲ 수내동 가옥의 정면. 문간채가 길게 펼쳐지고 그 옆으로 흙담이 이어진다.

 


규모 적지만 나름의 격식 갖춘 집

수내동 가옥은 성남시 중앙공원 안, 묘역이 있는 산등성이 아래에 있다. 당초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한산 이씨의 집들은 6.25 동란때 대부분 파괴되거나 불탔다. 그후 복구했지만 대부분 원형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이 집은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해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지금까지 보존돼오고 있다.

 

분당구청 앞 사거리에 있는 공원의 입구에서 분당천이 흐르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수내동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수내동 가옥 못미쳐에는 ‘한산이씨삼세유수비’가 길옆에 서 있다. 이 유수비는 입향조인 이장윤과 그의 아들인 이질(李秩), 손자 이지숙(李之菽)의 유사(遺事)를 기록한 것이다.

 

이 집은 조선시대 말기 경기도지역의 전형적인 농촌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옥의 구성은 바깥마당에 면한 ‘ㅡ’자형의 문간채와 ‘ㄱ’자형의 안채가 전체적으로 ‘튼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의 뒤쪽에는 낮은 경사를 이룬 널찍한 후원이 있고 그 뒤로 흙담이 둘러쳐져 있다. 안채 옆으로는 헛간과 뒷간이 위치해 있다.

 

 

▲ 문간채에 있는 방. 이 집에서는 글공부를 하는 사랑방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문간채에 있는 방의 경우 대개 행랑머슴들의 방으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안채는 10칸 규모로 농가로서는 적지 않은 규모를 보여준다. 4칸 규모의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안방이 있고, 꺾인 곳에 부엌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으로 방이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건넌방으로 나와 있는데, 앞에 대청보다 약간 높고 널찍한 퇴를 두고 있는 것이 마치 누마루가 있는 사랑을 연상시킨다.

 

문간채는 모두 6칸 규모로, 가운데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방이 있는데, 문화재청 자료에는 온돌방으로 소개돼 있다. 이 집에서는 사랑채에서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모형을 전시해 사랑방처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문간채의 방들은 행랑머슴들이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문의 왼쪽으로는 외양간이 있고, 그 옆으로 농기구를 저장하고 보관해두는 헛간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헛간에는 실제 옛 사람들이 이용하던 쇠스랑이나 모줄, 호미, 가래, 쟁기, 거상, 등을 비롯한 각종 농기구를 전시해 놓아 옛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안채의 한쪽 옆 약간 높은 곳에는 장독대를 두었고 그 옆으로 김칫독 등을 묻어둘 수 있는 작은 초막을 만들어놓았다. 집의 뒤뜰 높은 곳에도 초가로 된 작은 움막을 만들었는데, 이런 공간들은 음식물 등을 저장해두기 위한 공간이다. 지금 이 집에서는 관리인이 잠시 쉴 때 이용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 안채 부엌쪽 후면. 소쿠리 등 옛 물건들이 걸려 있다.

 


건넌방 앞 마루와 부엌앞 수납공간 독특

이 집에서는 몇가지 눈에 띄는 공간들이 있다. 앞서 말한대로 안채 건넌방앞의 높고 널찍한 마루도 그렇거니와 부엌앞에 있는 작은 수납공간이 또한 그렇다. 이 공간은 부엌에서 음식을 대청이나 방으로 편리하게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밖으로 문을 만들어 평소에는 닫아둘 수 있다.

안채 대청에는 한쪽 벽뒤로 작은 공간을 두었다. 이 공간 또한 수납공간인데, 여기에는 주로 제사용기 등을 저장해두지 않았나 싶다. 일반적으로 제사를 위해 사당을 따로 두는 경우도 있지만, 이 집의 경우처럼 일반 민가에서는 대청에 제사용기 등을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를 지낼 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도 많았다.

 

 

▲ 안채 대청. 4칸의 널찍한 규모로 오른쪽으로 벽에 수장공간을 두었다. 천장에 드러난 가구미도 아름답다



 

안채 옆쪽 광에 붙어 있는 뒷간도 요즘은 볼 수 없는 재래식 공간이다. 주말이 되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성남문화원에 소속된 문화해설사들이 집에 관한 설명을 해주는데, 특히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뒷간의 설명을 재미있게 한다. 어린 학생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공간이기 때문이다.

 

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원래 이 집에 살았던 이택구씨의 증조부때부터 4대째 거주했다고 한다. 또 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네모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오량의 지붕가구를 짜올린 건축수법이 비교적 격식을 갖추고 있고, 부재도 견실하다. 이같은 점으로 미루어 대체로 19세기 초중반의 건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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