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한국의집 > 한국의 집
[전북 남원군 주천면 덕치리 초가]
산세와 조화이뤄 둥근 곡선의 아름다움 간직한 초가

덕치리 초가는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가장 아래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이 초가는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억새로 지붕을 올린 집이다. 둥근 초가의 곡선이 우리네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멀리 지리산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오는 경관도 일품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지리산 둘레길을 돌자면 그 첫 번째 구간이 남원시(南原市) 주천면(朱川面)~운봉읍(雲峰邑)에 이르는 구간이다. 첫 번째 구간에서도 주천면 소재지에서 구룡치와 솔정지를 잇는 회덕~내송마을까지의 옛길은 폭도 넓고 넉넉하다. 바로 이 회덕마을 한 귀퉁이 가장 낮은 곳에 억새로 지붕을 올린 초가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다.

 

덕치리(德峙里)는 본래 남원군 상원천면(上元川面)의 회덕리(會德里)와 노치리(蘆峙里) 일부를 병합한 지역이다. 그래서 덕치리는 회덕과 노치 등 두 개의 마을로 나뉜다. 회덕마을의 원래 이름은 ‘모데기’라 했는데, 이는 인근 덕산(德山), 덕음산(德陰山) 등의 ‘덕(德)’을 한데 모아 마을을 이루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회덕’이라는 이름도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때 밀양(密陽) 박씨(朴氏)가 난을 피해 마을을 이룬 것이 시초라고 한다. 평야가 적고 교통도 불편한 산악지대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평안하고 번창했다. 괴질이 유행할 때도 이 마을만은 안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통에 마을의 집들이 거의 불탔고, 전쟁후에 다시 마을이 형성됐다.

 

 

▲ 돌을 쌓아 만든 담장. 화단에 심은 꽃이 돌담을 넘어온 모습이 시골의 정취를 자아낸다.

 


지리산 연봉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 ‘일품’

덕치리 초가는 큰 길에서 집이 보이지만, 길과 집사이에 논이 가로막고 있어 집으로 들어가자면 마을길로 돌아서 가야 한다. 마을에 있는 경로당을 지나 아래쪽으로 돌면 초가가 눈에 들어온다. 대문은 따로 만들지 않아 길에서 바로 이어진다. 집이 마을의 한 구석에 있다고 해서 ‘구석집’이라고도 부른다. 

    

작은 언덕밑에 한눈에도 옛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4채의 초가가 서로 마주보며 안마당을 둘러싸고 앉아 있다. 집 뒤로는 자그마하나마 숲이 자리잡고 있고, 집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산과 물이 집을 둘러싸고 있는 셈이다. 작은 숲 한쪽에는 조그마한 텃밭도 있다. 집에서 바라보는 경관도 일품이다. 안채 툇마루에 나와 앉으면 멀리 지리산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주인 부부는 여름이면 이곳에 내려와 지낸다. 지리산 자락이라 여름에도 불을 때야 할 만큼 시원하다는게 집주인의 아내인 이수정(李守貞, 67세)씨의 얘기다. 집주인 박인규(朴仁圭, 69세)씨는 공직에 있다가 정년퇴직했다고 한다.

 


▲ 집뒤 작은 언덕에서 내려다본 모습. 집앞으로 논이 펼쳐져 있다.

 

남원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집은 구한말인 1895년에 현 집주인의 조부인 박창규(朴昌圭)라는 분이 건립한 것으로 돼 있다. 원래는 이 집터도 논이었으나, 터가 명당이라는 한 풍수가의 말을 듣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후 6.25 전쟁에 불에 타는 바람에 1951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수정씨에 따르면 이는 불확실한 얘기라고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원래 처음 집을 지었던 구한말 우리나라 서민들의 살림집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바로 그같은 문화재적 가치때문이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헛간채로 구성돼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사이를 두고 ‘ㄱ’자로 앉아 있고, 사랑채 앞에 화단을 사이에 두고 입구쪽으로 헛간채가 앉아 전체적으로는 ‘튼ㅁ’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안채 옆으로 헛간채와 마주보는 곳에는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초가 한 채가 있다. 이 집은 손자손녀들이 내려올 때 이용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둘레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위해 민박겸 체험공간으로도 제공하고 있다. 둘레길을 여행하는 사람들도 고택체험에 대한 반응이 좋다고 한다. 헛간채에는 잿간과 변소가 함께 있다.

 

 

▲ 화단앞에 평상이 놓여 있는 모습이 정겹다.

 


고색창연한 정취 풍기는 억새 지붕

안채는 전면 4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왼쪽에 부엌이 있고, 안방이 이어진다. 방옆으로 1칸의 마루가 있고, 그옆에 작은 방이 있으며, 그 뒤로 뒷방이 붙어 있다. 안방과 마루방앞으로는 퇴를 두고 있다. 집 뒤쪽으로는 높고 낮은 시렁이 걸려 있다. 안채 뒤뜰에는 작은 뒷마당과 함께 장독대가 있다. 전형적인 시골 안채의 모습이다.

 

사랑채는 사랑방이 있고, 헛간과 광으로 이어진다. 사랑방의 창호는 교살창으로 돼 있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광에는 숫자가 나열돼 있어 곡식을 저장해두었던 뒤주로 사용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방 앞으로도 너른 퇴를 만들었다. 안마당 화단앞에는 널찍한 평상도 놓여 있다. 가족들이 평상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정겹다. 

 

이 집은 특히 억새로 지붕을 이은 초가인 점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초가라 해도 지금은 볏짚으로 지붕을 잇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억새는 볏짚에 비해 한번 지붕을 이으면 오래 지속된다. 그간의 취재로는 경남 창녕의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초가가 지금도 억새로 지붕을 잇는 유일한 집이었다.

 

같은 전북의 부안군 줄포리에 있는 김상만 가옥도 본래 억새로 지붕을 이었지만, 지금은 억새를 구하기 어려워 볏짚으로 지붕을 잇는다. 그러다보니 매년 지붕을 이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수정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집의 억새는 지리산 고개 너머에 있는 달궁마을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 논쪽에서 바라본 덕치리 초가

 

덕치리 초가는 억새를 지붕에 그냥 올린 것이 아니라 단으로 묶어 올렸다. 그래서 지붕위에 군데군데 굵은 새끼로 묶은 것이 보인다. 특히 안채 지붕의 높이는 여느 초가에 비해서 매우 높아 초가이면서도 나름의 위엄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경사도 급하다. 경사가 급한 것은 빗물을 빨리 흘러내리게 하기 위한 의도다.

 

억새로 지붕을 올리면 예전에는 30년 정도 유지됐다고 하지만, 지금은 10년 정도에 한번씩은 갈아주어야 한다. 지금의 지붕도 오래 된 듯 안채 뒤쪽의 지붕에는 이끼가 끼어 있는 모습도 보인다. 억새지붕 처마 밑으로는 새집도 눈에 띈다. 오래된 억새와 이끼 낀 모습이 오히려 초가의 정취를 더한다.

 

사랑채 옆으로는 돌로 만든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 화단에 심어놓은 꽃들이 담을 타고 넘어가 마치 돌과 꽃으로 이루어진 담인 듯하다. 큰 길에서 보면 돌담 너머로 보이는 초가의 정경이 어릴 적 보던 시골집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집 옆 개울쪽으로도 낮은 돌담을 쌓아 경계를 둘렀다.

 

 

▲ 4채의 초가가 서로 마주보며 정겹게 앉아 있는 모습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한 집터’

이 집 안채의 부엌문에 쓰인 재미있는 문구들도 눈길을 끈다. 여기에는 ‘서기 1991년 1월달 영화촬영하고 정지문 선사’라는 글귀와 ‘1996년 음력 8월24일 선진영화 촬영하고 금 30만원 받음’이라는 글귀가 그것이다. 이는 할아버님께서 이곳에 촬영을 왔던 일시와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집과 관련된 일화도 하나 전한다. 집 뒤에 커다란 엄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몇 년전 태풍에 이 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가 쓰러진 방향이 다행히도 지붕과 지붕사이였다고 한다. 즉 집에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고 전기줄만 끊어놓았다. 피해상황을 살피러 나왔던 군청직원도 ‘신이 하신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 헛간채. 잿간과 변소가 함께 있다.

 

 

1 돌담 밑에 만들어놓은 배수구 2 집 옆으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낮은 돌담으로 경계를 만들었다.

 

집터와 관련해 이수정씨는 “집터가 좋다고 해서 집을 지은 것은 맞지만, 좋은 인물이 많이 날 터는 아닌 듯하고, 다만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한 터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얘기한다. 논이 많은 시골에서 좋은 집터란 당연히 농사를 일으켜 넉넉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집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박인규씨 부부가 이 집에 내려와 사는 기간은 봄이 시작되는 4월부터 가을이 저무는 10월까지 대략 7개월 가량 된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 초가에 머물면서 박인규씨는 직접 밭을 경작하며 농사일을 한다. 그리고 가을에는 그간 지은 농산물을 수확한다. 서울로 올라갈 때는 대개 김장까지 해서 간다는게 이수정씨의 설명이다.

 

 

▲ 새로 지은 초가. 둘레길 관광객들의 민박 겸 고택체험 공간으로 제공된다.

 

원래 이 마을은 전체가 억새로 지붕을 이은 샛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집은 2채뿐이다. 그나마 나머지 한 집은 뼈대만 남아 있으며 벽체와 창호 등을 모두 현대식으로 바꿨다. 지붕을 잇는 방식 등 전통적인 방식과 가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집은 덕치리 초가가 유일한 셈이다.

 

그러나 이 집도 현재 많이 퇴락한 상태다. 실제 집의 여기저기에서 퇴락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보수가 필요한 셈이다. 전통가옥, 그것도 특히 초가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재청이나 지방 문화재담당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