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에 자리잡은 이웅재 고택은 조선 왕실가문의 종가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나 구성형태가 일반 사대부가보다 더욱 독특한 형식을 띄고 있다.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린 집의 배치구조나 안채에서 행랑채로 이어지는 형태는 여느 집에서 보기 어렵다. 또한 안채에 만들어놓은 공루도 인상적인 공간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 고택의 안채. 본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날개채를 달았다. 안채 날개채 뒤로 방앗간 등 행랑채가 보인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는 마을 뒤로 낮은 산이 길게 뻗어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 상류가 흘러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마을 앞으로 너른 들판이 있어 사람이 살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백제시대때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또 임실과 장수, 남원, 순창의 한가운데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역참을 두기도 했던 곳이다.

▲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담너머로 보이는 고택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나라에 큰일 있을때마다 앞장서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이처럼 길지이다보니 대대로 권문세가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고려시대때는 진주 하씨, 남원 양씨, 홍성 장씨, 순천 김씨, 삭령 최씨 등이 입향했고, 조선시대 들어 왕족인 전주 이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곳에 입향한 이는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 춘성정(春城正) 이담손(李聃孫)이다. 이 집은 춘성정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인물사전에 따르면, 이담손은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손자인 고림군(高林君) 이훈(李薰)의 아들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담손이 이 마을에 입향하게 된 것은 연산군때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때문이었다. 당시 사화가 일어나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등 왕실종친들이 처형당하자 화를 피해 이곳 둔덕리에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1 대문채. 왕족의 집답게 높은 솟을대문이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문앞으로 하마석이 놓여있다. 2 대문옆에 난 작은 문이 인상적이다. 이 문은 일반인들이 출입하던 문이라고 한다.

이후 임금에 오른 중종이 전국에 방을 붙여 지방으로 몸을 피한 왕실종친의 소재를 찾았고, 그때 춘성정이 이곳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알게 돼 관찰사가 직접 그를 모시고 임금에게 올라갔다고 한다. 임금이 한양에 올라와 살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지방에서 후학을 가르치겠다며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자 그곳에 집을 지어주도록 어명을 내렸다.

춘성정이 이곳에 내려온 이후 왕족의 일원으로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몸을 아끼지 않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의 주인이자 이담손의 17대 종손인 이정평(李廷坪)씨에 따르면, 임진왜란때 춘성정의 손자인 이대윤(李大胤) 부자가 함께 의병활동을 한 것은 물론 고경명(高敬命) 장군에게도 의병장으로 활동하도록 독려하고 지원했다고 한다.

또 병자호란때는 독전관으로 참전했고, 3·1운동에도 참여해 33인 못지않은 활동을 했다. 이정평씨의 아버지인 고 이웅재(李雄宰) 어르신도 학생시절 항일활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또 삼계강사(三溪講舍)를 설립하는 등 마을의 자치활동과 주민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힘썼다.

▲ 사랑채 전경. 대청과 방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구조이다. 방앞으로는 작은 퇴를 두고 난간을 둘러 멋을 냈다.

어명에 의해 건축, 안채 및 사랑채 등 건축양식 독특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집은 왕족이 살 수 있도록 어명에 의해 특별하게 건축된 집이다. 그런 만큼 공간구성 등에서 일반 사대부가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때가 1500년대이니 집을 지은지 500년이 넘은 집이다. 다만 그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들어서면 웅장한 솟을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보아도 여느 사대부가의 솟을대문과는 달리 높이 솟아 있다. 솟을대문에는 임금이 내린 효자정려와 현판이 걸려 있었지만, 최근 현판이 떨어져 정려만 남아 있다.

▲ 사랑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솟을대문 너머로 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1870년 고종임금이 내려준 현판에는 ‘유명조선효자증통정대부이조참의이문주지려(有明朝鮮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文○之閭)’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대문채도 아마 그때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떨어진 현판은 보수때 다시 걸기 위해 집안에 보관해두고 있다.

이 집의 솟을대문에는 여느 집과 다른 작은 문이 별도로 나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작은 문은 일반인들이 출입하도록 만든 문이라고 한다. 즉 높은 솟을대문은 임금이나 왕족 등 귀한 손님이 행차할 때 이용했다는 것이다. 대문채 앞에는 말을 타고 내릴 수 있는 하마석이 양쪽에 놓여 있고 대문채 안쪽으로는 마굿간이 있다.

 ▲ 사랑채에 있는 굴뚝. 이 집에는 높은 굴뚝도 있지만,

이처럼 낮은 굴뚝도 몇 개 있다. 낮은 굴뚝은 겸손의 의미와 함께 연기가

낮게 깔리도록 해 해충을 잡기 위한 쓰임새도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행랑채와 함께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랑채는 크지는 않지만 높은 기단위에 앉아 있다. 사랑채를 오르는 계단도 높은 디딤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따르면 사랑채 상량문에는 1864년에 건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랑채는 방과 널찍한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앞으로는 작은 퇴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 안채 날개채 끝에 있는 공루. 아궁이 위쪽이 공루로, 이곳에 시신을 보관해 두었다고 한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가 역시 높은 석축기단위에 서 있다. 정면 5칸 규모인 안채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채를 달아내 전체적으로 ‘ㅠ’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형이 경사진 지형이어서 높은 기단위에 앉은 본채와 달리 양쪽 날개채의 기단은 이보다 낮다. 이에따라 날개채의 지붕도 본채의 지붕아래 단차를 두고 낮게 이어진다.

▲ 안채와 사랑채, 안행랑채가 겹치는 부분의 지붕. 복잡한 공간구조를 보여주듯 지붕이 서로 겹치며 만들어 내는 건축미학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커다란 막새기와는 왕족에게만 허용된 것이라고 한다.

본채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안방과 도장방 및 마루방이 마주하고 있다. 도장방 아래로 마루방이 있고, 건넌방은 그 아래에 위치한다. 안방옆 날개채 쪽으로는 부엌과 방이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방의 상부에 만든 공루이다.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두었다.

이집에서 또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은 안채와 사랑채의 중문이 약간 꺾여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인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대개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은 사랑채 정면쪽으로 만드는데 반해 이 집에서는 사랑채 뒤쪽과 연결된다. 즉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나서면 사랑채 뒤쪽을 지나 사당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이는 이 집의 바깥 중문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바깥 중문은 사랑채쪽에 비교적 넓게 설치돼 있다.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올 경우에는 사랑채를 빙 돌아 안채로 들어가야 하지만, 바깥 중문을 이용하면 곧바로 사랑채 뒤쪽에서 안채로 연결된다. 즉 집을 자주 드나드는 이들이나 일반적인 출입은 중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 안행랑채의 높은 마루에서 바라본 모습

건물들이 엇각 이루며 높낮이도 달라

안채 앞과 옆으로는 안행랑채가 안채를 감싸는 형태로 서 있다. 부엌이 있는 뒤쪽으로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방앗간과 화장실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사이를 두고 광과 방, 그리고 사방이 터진 높은 마루가 설치돼 있다.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가 있다. 그리고 아궁이에서 안마당으로 드나들 수 있는 낮은 문이 있다.

▲ 안채 도장방 외벽 상부. 이 집에는 방의 상부에 다락공간을 만들어둔 곳이 많다.

방앗간이 있는 건물과 광이 있는 안행랑채의 사이를 띄어놓은 것은 아마도 이 집의 바람방향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즉 집의 안채가 남향을 하고 있어 바람길을 막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이 바람길은 안채 날개채 끝에 만들어놓은 공루와도 관련이 있다.

이정평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공루는 예전에 시신을 보관해두었던 장소라고 한다. 즉 시신이 쉬 부패하지 않도록 시원한 바람길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건물사이에 일각문 등 아무런 출입장치를 해놓지 않은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안행랑채에서 안채의 날개로 이어지는 공간은 다소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우선 사랑채와 안채사이의 중문옆 안채의 날개 아래로 이어지는 곳에 사랑방의 아궁이를 두었고, 사랑채와 안행랑채의 구분을 위해 낮은 사잇담을 설치했다. 사잇담 옆으로도 공간들이 나뉘어 있다. 이 역시 일반 사대부가에서는 찾기 어려운 구조이다.

▲ 안채 대청

안채와 사랑채, 안행랑채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공간구조가 복잡하게 얽힌데는 각 채의 건물배치가 일정하게 정돈돼 있지 않고 각 건물이 서로 조금씩 틀어 앉으면서 엇각으로 배치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는 이 집의 지형 및 지세에 따라 집을 앉히면서 생긴 문제가 아닌가 보인다.

집 뒤로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사당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 옆으로 돌아 오르게 돼 있는 사당채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집 역시 사당공간과 안채, 사랑채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계질서에 맞추어 지은 집이라 할 수 있다. 사당 정면에는 ‘춘성정사(春城正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가집임에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사대부가의 경우 팔작지붕이 일반적인데 비해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맞배지붕으로 돼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조선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시기의 건축양식이다. 즉 이 집을 처음 지을 당시인 1500년대의 건축양식을 보존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 울창한 나무사이에 자리잡은 사당

이정평씨에 따르면 이 집이 앉은 곳은 배산임수의 명당터라고 한다. 또한 왕실가문의 집답게 출입문도 남쪽의 솟을대문을 비롯해 각 방위별로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쪽의 문은 남아 있지 않다. 집의 전체적인 규모도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지붕에는 왕실 가문임을 뜻하는 황금 막새기와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이 집은 1977년 전라북도 지방민속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돼오고 있다. 그러나 창덕궁에 민간건축인 연경당이 있다면, 이 집은 민간에 나와 있는 조선 중기 왕실건축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그런 점에서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하고 당초의 원형을 복원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