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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세도시에 대하여]
인간과 신이 함께 이룬 문명의 공동체

천년에 걸쳐 만든 유럽의 중세도시들은 인류문명의 꽃이다. 유럽의 중세에는 대학과 학문 등 르네상스의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다. 100년 전쟁 이후 국가가 나타나면서 중세도시가 막을 내렸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이 세계 문명의 표준이 된 것은 중세도시가 그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글·사진 김석철(국가건축정책위원장·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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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도시인 스페인의 톨레도. 비교적 잘 보존된 모습이다.

 

고대에는 문명의 발상지였던 동양과 서양과 중동이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중세로 오면서 저마다 특별한 종교의 세계를 갖기 때문에 다른 색을 띠게 되었다. 인류의 중세 문명은 결국 종교 문명의 세계이다. 서양은 기독교 문명의 세계이고, 중동은 이슬람 문명의 세계이다. 동양은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유학이 섞여 동양의 중세 문명을 이루었다.

 

1500년 전에 시작되어 500년 전에 소멸된 유럽의 중세도시는 인간이 지상에 만든 영원의 도시이다. 유럽인들은 천 년에 걸쳐 도시를 만들었다. 5세기경 고대 문명사회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유럽의 중세 문명은 천 년 동안 융성하다가 15세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가 꽃피면서 막을 내리기 시작했고,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15세기 중엽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16세기 중반 추정 중세 영국 런던의 모습

 

그러나 유럽 중세 문명의 공간과 그 흔적들은 유럽 곳곳에 아직 남아 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이 세계 문명의 표준이 된 것은 중세 문명 최고의 상형문자인 중세도시가 그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의 중세 문명은 무함마드 이후 아랍 전역과 아프리카, 인도와 인도네시아로 확대되었으나 무함마드 당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이어 오지는 못하고 있다. 중세 이후 현대까지 이슬람 문명이 중동의 일상 세계를 이끌어 가지만, 제대로 남은 중세도시는 모로코의 페스 등 북아프리카 일부이다. 동양에는 고대 문명과 중세 문명 사이의 가름이 없다. 르네상스도 산업혁명도 없었던 까닭이다. 동양의 중세도시 중 여태까지 원래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도시는 드물다.

 


기독교가 남긴 중세도시

유럽의 중세 문명은 인간과 신이 함께 이룬 문명이다. 중세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중세 가톨릭 종교 공동체를 이끌어 온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양식은 신의 위대함을 증명한 예술 형식이자 유럽 중세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 공간이었다. 불교, 유교, 이슬람은 그들 문명의 상형문자인 중세도시를 남기지 못했으나 기독교는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세도시를 남겼다.

 

 

교황청이 위치하였던 도시인 프랑스 아비뇽의 현재 모습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이고, 교황의 시대가 아니라 시민의 시대이다. 유럽 중세도시는 인류 문명의 꽃이다. 유럽 중세도시는 최고 에너지 소비로 최고의 삶의 경제적 경쟁력을 갖춘 도시이다. 중세도시의 그린 코트는 오늘의 인류가 추구해야 할 신도시이다.

 

유럽의 중세도시들은 농업혁명으로 이루어졌다. 고대에는 인력과 간단한 쟁기 정도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와 혁신적인 농업기계가 등장하였다. 유럽의 농업혁명으로 인해 부가 쌓이고 상업이 발달하였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던 유럽의 고대와 달리, 유럽의 중세 때는 혁신화된 농업기술을 바탕으로 특정 작물을 생산해 그것을 다른 도시, 다른 나라와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유럽의 중세도시가 생겨난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원조라고 말하는 도시건설 조직이 유럽 전 지역의 도시를 건설하였다. 유럽 중세도시는 동시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30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서양의 중세 도시들의 형상은 거의 다 비슷하다. 이러한 농업혁명과 도시건설이 일어나면서 중세 문명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 중세시대 볼로냐 대학의 강의모습

 


중세를 상징하는 사건 ‘카노사의 굴욕’

학창시절,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이고 르네상스가 그 암흑기를 끝냈다고 배웠다. 그러나 중세에 이미 르네상스의 그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대학이다. 유럽의 중세 때 현대문명을 이끌었던 대학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세워진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을 만들어 교수들을 고용하였다.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도 학생들이 만들었다. 그러다가 종교 집단이나 특정 단체가 대학을 만들고 학생들을 뽑았다. 이 두 형태가 유럽에서 교차해 나타나는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그 중 대표적인 예이다.

 

 

▲ 카노사의 굴욕. 하인리히 4세의 모습

 

대학이 생겨 지성인들이 집단화되면서 그 안에서 학문이 탄생하고, 특유의 대학 공동체와 예술과 철학이 생겼다. 물론 교회를 중심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세를 상징하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무릎을 꿇은 ‘카노사의 굴욕’이다.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는 왕권과 신권의 대립과 긴장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 중세유럽의 대표적인 대학도시인 영국의 케임브리지

 

그러나 이러한 유럽의 중세도시가 막을 내린 것은 국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유럽의 중세는 국가라는 느슨한 울타리 안에 거의 자치 정부인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독일의 경우 하인리히 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하나, 실은 각각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공국들의 집합이었다. 지금과 같은 국가가 나타난 것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 동안 계속된 백년전쟁 이후이다. 그래서 백년전쟁을 중세의 한 단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 중세유럽의 법원 모습

 


인간이 만든 기적의 공간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천 년을 이어 오던 유럽의 중세 문명은 르네상스 문명에 의해 소멸한다. 르네상스는 천 년 동안 잊고 있던 고대 문명의 위대함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로마 문명이 많이 남아 있는 지중해 남측 해안의 아프리카를 점령한 이슬람에 의해 보존, 기록되었던 고대 문명을 서유럽이 받아들여 그리스·로마를 다시 알게 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이다.

 

 

▲ 1855년 스페인 세고비아의 모습. 현대화 되기 이전의 모습

 

서양 고대 문명이 위대하다고 여겨지고 르네상스 문명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모두가 더 나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제대로 살게 한 것은 유럽 중세문명의 도시들이었다. 유럽의 중세도시들은 인간이 만든 기적의 공간이다. 기독교 문명은 중세도시로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중세도시에 직접 가서 서 있으면 인류역사의 큰 획을 그은 유럽 중세 문명의 스케일과 콘텐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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