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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이씨고택]
실학을 바탕으로 구국에 애쓴 실천적 선비가문

밀양 퇴로리 이씨 고택은 여주 이씨 자유헌(自濡軒) 이만백(李萬白)의 종가집으로, 그의 7대손인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가 퇴로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건립한 집이다. 주변에 정자와 별서 등을 비롯해 여주 이씨 일가의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이 집의 후손들은 실학을 비롯해 여러 저술을 남기는 등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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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로리 이씨고가의 별채인 쌍매당 전경. 앞쪽에 사랑채인 쌍매당이 자리하고 뒤쪽으로 안채가 있다.

 

밀양시부북면(府北面) 퇴로리(退老里)는 원래 우리말로 ‘무리체’ 또는 ‘물리치’라고 한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퇴로’가 됐다.‘무리’라는 말은 ‘물리치다’ 의 의미이고, ‘체’ 또는 ‘치’는 몽골어의 ‘적(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는 존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함평 이씨 등이 살고 있었으며, 여주 이씨가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의 규모가 확립되고 집성촌이 됐다.

 

 

▲퇴로리 이씨고가의 전경. 마을 뒤의 화악산을 배경으로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여주 이씨 세고 등에 따르면, 조선초 왕실과의 혼인으로 명문세가로 자리잡은 여주 이씨가 밀양에 내려온 것은 대략 연산군때 쯤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정치의 어지러움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낙향한 남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여주 이씨 역시 벼슬에 나서기보다는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자유헌의 가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퇴로리로 들어온 항재를 비롯해 그의 아들과 손자 등 후손들이 모두 학문에 정진해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항재는 시문집과 함께 전국시대에서 당말 오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다룬 독사차기(讀史箚記)를 저술했다. 그는 경술국치를 당한 후 두문불출하고 저술로 망국의 한을 달랬다.

 

 

▲별채 전경. 앞에 보이는 것이 사랑채인 ‘쌍매당’이고, 뒤쪽으로 안채가 있다.

 

그의 아들인 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는 조선을 중심으로 세계의 역사를 기술한 조선사강목(朝鮮史綱目)을 집필했고,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翼)의 문집인 성호집(星湖集)을 국내 최초로 펴내기도 했다. 그는 ‘나라는 망할 수 있어도 겨레와 문물은 망할 수 없다’면서 옛 문헌의 정리와 후진양성을 사명으로 여겼던 인물이다.

 

 

▲청덕당 전경.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배치돼 있다. 안방위에 시렁이 걸려 있다.

 

특히 항재가 퇴로리에 들어온 시기가 구한말로, 항재집안은 화산의숙(華山義塾)과 정진학교(正進學校) 등 교육기관을 설립해 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화산의숙은 항재가 실학사상에 입각해 교육과 계몽을 목적으로 설립해 후진을 가르치다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면서 폐교당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아들인 성헌이 사재를 투입해 정진이라는 이름으로 의숙을 다시 설립해 화산의숙의 맥을 이었다. 정진의숙은 후에 정진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유서깊은 사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갖은 박해를 받았고, 그의 사후 학교를 맡았던 동생 퇴수재(退修齋) 이병곤(李炳鯤)이 구속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일제말 폐교당하기에 이르렀다.

 

 

▲본채의 대문. 안에 보이는 작은 문이 중사랑인 ‘성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안채 부엌의 장식문양이 아름답다.

 

 

밀양의 명당자리에 터를 잡다

항재의 증손자이자 성균관대 교수와 연세대 석좌교수를 지내고, 민족문화추진회 회장과 이사장 등을 지낸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은 퇴로리 여주 이씨들의 행적과 문집, 집과 유물 등의 내용을 모은 ‘퇴로리지(退老里誌)’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항재가 기록한 퇴로복거기(退老卜居記)가 있으며,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쪽으로 작은 수납함을 만들어두었다.

 

“내가 젊었을 때 퇴로마을을 둘러보았다. 밀양부의 치소 북쪽 20리쯤에 있는데 세상에서 일컫는 바 명기(名基)이다. …(중략)… 한번 이 마을을 지나본 뒤로 문들 복거해 일생을 마치려는 뜻을 가졌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략)… 무자년(1888년)에 비로소 집과 전장(田莊)을 마련해두고 2년뒤인 경인년(1890) 정월에 막내아우와 두 아이를 데리고 이사했다.”

 

 

▲본채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중사랑인 성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왼쪽으로 담장을 끼고 들어가면 안채인 청덕당이 있다.

 

부북면 퇴로리는 밀양에서도 좋은 땅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밀양시의 지명유래에서도 ‘교동, 다원 등과 함께 명기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항재의 퇴로복거기 말미에는 이곳이 영구복지(靈區福地)로서 인사와 지리가 꼭 들어맞아 조상들의 덕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항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성재(省齋) 허전(許傳)에게 수학하면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학문과 경륜을 체득했다. 그는 조선후기의 ‘경세치용(經世致用)’파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그가 퇴로리에 들어온 후 퇴로리의 실정에 맞게 향약을 만든 것이나 화산의숙을 설립한 것 등은 바로 그런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사랑인 ‘성헌’의 전경. 항재의 아들인 성헌 이병희가 기거했던 곳이다.

 

 

▲별채인 쌍매당으로 통하는 대문. 본채 대문과는 반대편에 위치한다.

 

성헌은 시문이 뛰어나고 학문도 깊었으나 몸이 허약했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은 그의 문장을 두고 ‘남향 수백리내에 비견할 이가 없다’고 평하기까지 했다.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지부를 만들고 취지문을 발송해 영남 일원에서 호응을 일으켰다.

 

그의 동생 도하(桃下) 이병규(李炳圭)는 한때 벼슬에 나서기도 했으나, 국운이 기울어지면서 벼슬의 뜻을 버렸다. 3·1운동후 형을 도와 독립운동과 민족정기의 진작을 위해 정진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인쇄문화와 수리사업, 측량기술, 직조, 축산장려 등 다방면의 산업기술 보급에도 힘을 쏟았다.

 

막내동생인 퇴수재 이병곤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과 국어국문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 널리 현대의 신지식을 흡수해 신구를 겸한 지식인이었다. 정진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해 후진을 양성했으며, 후에 반일인사로 지목,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때 건강이 나빠져서 결국 해방뒤 얼마 안가 별세했다.

 

 

▲별채의 사랑채인 쌍매당 전경. 별채는 항재의 손자인 후강 이재형이 지은 집이다.

 

 

안방 뒤 살창을 둔 고방 설치 등 특이

퇴로리 이씨 고택은 안채와 중사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와, 안채와 사랑채를 별도로 갖춘 별채로 구성돼 있다. 본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별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동서로 각각 따로 나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나뉘어진 안채는 ‘청덕당(淸德堂)’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정면 6칸 규모인 안채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 옆으로 부엌이 이어진다. 안방에서 특이한 점이 눈에 띄는데 방 뒤로 한쪽은 고방을, 한쪽은 마루방을 들인 점이다. 고방 뒤쪽으로 문을 설치하고, 특히 마루방쪽에는 광창을 두어 튼 공간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안방문을 열었을 때 양쪽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필요할 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인 쌍매당 뒤쪽 안마당에 난 문. 이 문을 통해 안채에서 사랑채를 통하지 않고 대문으로 출입할 수 있다.

 

건넌방에는 측면으로 작은 퇴를 만들고 문을 냈다. 건넌방의 경우 대개 신혼으로 들어온 며느리가 거처하는 공간임을 감안하면 측면쪽의 뜰과 연결시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바깥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건넌방쪽에서 이어지는 아래채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2칸짜리 방과 1칸짜리 방을 두었다. 안채의 왼쪽 담장 너머로 사당이 있다.

 

안채 앞으로는 중사랑이 있다. 중사랑은 항재의 아들인 성헌이 거처하던 곳이다. 대청 현판에도 ‘성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문에서 들어오자면 왼쪽으로 작은 담장을 두르고 안채가 자리잡고 있으며, 약간 오른쪽으로 비껴서 중사랑인 성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건물과 함께 넓은 사랑마당이 있다.

 

 

▲별채의 안채 전경

 

중사랑은 왼쪽으로 마루를 두고 오른쪽으로 방을 들였다. 대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을 배치하는 사랑채 구조와는 다소 다른 셈이다. 방의 오른쪽 공간은 사랑채에서는 출입이 되지 않는다. 사랑방의 구들을 덥히기 위해서는 방 뒤쪽으로 별도의 아궁이를 만들어 두었다.

 

별채로 지은 집 ‘쌍매당’

안채의 아래채 옆쪽으로 별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별채는 항재의 손자인 후강(厚岡) 이재형(李載衡)이 지은 집으로, 역시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행랑채와 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으로 이루어진 안채는 정면 7칸 규모로 ‘사현합(思賢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청덕당과 마찬가지로 건넌방 퇴를 높이고 밑으로 아궁이를 들였다.

 

사랑채는 정면 5칸 규모로 ‘쌍매당(雙梅堂)’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다. 쌍매당은 건물앞에 매화 두그루를 심은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사랑채의 사랑방위에는 ‘담재(覃齋)’, ‘후강유서(厚岡幽棲)’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쌍매당 출입문의 빗장과 고리. 고리를 걸어놓으면 문이 쉬 열리지 않는다. 안에서 문을 열 때도 고리를 들어올려야 빗장이 빠지게 돼 있다.

 

쌍매당의 사랑채 문을 열고 나가면 바깥 담장과 사랑채 담장사이를 나누는 작은 공간이 있다. 여느 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이다. 안채에서도 바로 대문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구조로, 아마도 별채로 지으면서 사랑채와 안채의 통로를 구분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퇴로리 이씨 고택의 서쪽 집과 다소 떨어진 곳으로는 천연정(天淵亭)과 서고정사(西皐精舍)가 있다. 서고정사는 항재가 교육과 독서, 저술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별서(別墅)로, 정당인 서고정사와 별채인 한서암(寒棲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항재는 망국의 한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별채의 사랑채 대청. ‘쌍매당’이라는 당호와 ‘청덕고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의 사후에는 장남 성헌과 차남인 화하(華下) 이병수(李炳壽)가 돌보았다.

퇴로리 이씨 집안은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구한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지켜만 보지 않고 사재를 털어가며 교육과 학문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민을 계몽하는 등 지도층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려고 애쓴 실천적 선비가문이다. 집은 퇴락하고 있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집안 곳곳에 면면히 흐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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