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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100세 주택 ⑪]
함께 사는 사람들도 만족하는 집이어야 한다

남편의 퇴직 즈음, 온 가족이 공황 상태에 빠진 가족이 있다. 남은 것은 아파트 한 채와 연금 100여 만원 뿐. 두 자녀도 아직 함께 살고 있으니 노후가 막막했던 부부는 결국 방배동 아파트를 처분하고 그 돈으로 작은 상가를 짓고 전셋집에 살며 노후의 삶을 희망으로 뒤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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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없다니까, 있다면 오로지 우리 마누라 남편만 있는 거야.”

정년퇴직과 함께, 김준호 씨는 결정권을 아내에게 넘겼다. 32년 은행원 생활 내내 아내가 김준호 씨를 위해 헌신 봉사해줬으니, 이제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살겠다는 그런 결단이 아니었다. 융통성 없는 자신의 경제관념을 자인한 결과였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30년 은행원 생활을 하고도 강남에 아파트 한 채도 마련하지 못했을 터였다.

 

김준호 씨는 전형적인 은행원이었다. 아침 7시에 출근, 저녁 8시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계 같은 인생이었다. 그런 성격은 일선 지점장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술을 마시거나, 사람을 만나면서 영업활동을 하지 않았다. 근무시간에 주변 시장을 돌아다니거나, 동창이나, 주변 인맥을 통해서 영업활동을 했으면 했지, 절대 밤늦게 쏘다니면서 행원 생활을 하질 않았다. 그래서 지점장 생활도 딱 한 군데 2년 반뿐이었다.

 

김준호 씨 부인 윤영민 씨의 불만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융통성이 있었으면, 더 잘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못내 아쉽다. 명절이면 상사들에게 사과 상자라도 보낼 줄 알았으면, 지점장이 아니라 은행장도 됐을 것 같았다. 동기들은 전부 지역 본부장까지 한 번씩 하고 물러났는데도, 김준호 씨만 달랑 지점장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직장 생활 내내, 아내는 그런 남편에 감사하고 살았다. 남편이 따로 속을 안 썩이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아내 입장에서는 퇴근과 함께 집에 들어와 앉아, 가장답게 집을 지키고 있는 편이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것보다는 100번, 1000번 나았다. 그 덕에 두 아이가 모두 큰 무리 없이 사춘기를 넘겼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까지 했으니 말이다.

 

순리 쫓던 남편의 정년 이후 닥친 공황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아내는 좋은 면만 보였던 남편의 성격에서 문제점이 부각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금리 주택 구입자금 조차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남편이 뒤늦게 답답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 도움으로 남보다 일찍 주택을 마련한 터라, 사실 딱히 주택 구입자금을 빌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남들 다 쓰는 저금리 주택자금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가계에 여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돈 빌려서 전세 끼고 집 한 채라도 더 마련하자고 아내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건만, 남편은 두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직장생활에 발목 잡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아내는 소심한 남편이 혹시라도 돈 떼일까봐 마음 졸이기 싫어서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답답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방배동에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가 우겨서 가능했던 일이다. IMF 시절, 방배동에 급매물 아파트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 강남에서 학교를 보내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빚을 안고 이사를 왔다. 그렇게 해서 20년 가까이 한 집에 살면서 한 일이 월급 받아 아파트 빚 갚은 일이었다.

 

남편 고집대로 우이동에서 계속 살았다면, 아파트 시세는 방배동 아파트와 비교해서 3분의 1쯤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아내 주장을 따라 강남으로 이사를 온 것은 잘한 결정이라고 남편 김준호도 확실히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막상 정년을 하고 보니, 김준호 씨도 앞날이 막막하게만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따로 연금을 들어놓은 것도 아니고, 외벌이라서 특별하게 저축을 해놓은 것도 없었다. 대기업 임원 비서였던 아내가 임신을 하자 집에 눌러앉게 만든 이후부터 외벌이로 살면서, 여유자금은 아파트 빚 갚는데 쓰느라 딱히 목돈을 마련하지 못했다. 출가도 못한 두 아이의 결혼자금도 그렇고, 부부의 노후 자금도 하나도 없었다.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부부가 손에 쥔 것은 퇴직금 몇 억이 전부였다. 국민연금 100여 만원도 받게 되겠지만, 그것도 65세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방배동의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제외하고 나면, 부부에게는 정말로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내는 가사결정권을 갖겠다고 했고, 남편은 동의했다.

 

아파트 팔고 부동산 재설계해 노후 대비

고지식하고, 소심한 남편 덕에 지난 30년간 아무 재주 없는 가정주부가 되어버린 윤영민 씨였지만, 위기감에 몰리자 사람이 달라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주워듣다가, 아내 윤 씨는 원룸 사업을 하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재주 없는 사람이 살 길은 결국 마지막 자산 집 하나로 임대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윤 씨는 방배동의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고개 넘어 상도동으로 건너갔다. 상도동은 방배동 땅값에 절반이었다. 숭실대학교 근처의 50평짜리 단독주택을 구해서, 방 10개짜리 원룸을 지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냉장고와 1인용 침대를 비치하고, 입주 학생들에게 월 50만원씩 받았다.

 

4층에는 방 두 칸짜리 생활공간도 마련했지만, 1억5000만원에 전세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 돈에 집짓고 남은 퇴직금을 합쳐서, 4식구는 근처 아파트의 전세로 입주했다. 두 자녀가 출가를 하지 않은 터라, 그래도 번듯한 집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양가 부모 상견례를 하게 되거나, 결혼을 앞두고 함도 받고 손님도 받을 것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대학 근처인데다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 근처라서, 입주희망자는 끊이지 않았다. 임대사업자로 등록을 하고, 매달 1000만원씩을 쥐게 된 윤영민 씨를 보고, 남편 김준호 씨는 직장 다닐 때부터 자기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뒤늦게 후회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다 알면 인(人)생이 아니라 신(神)생일 것이었다. 

 

매달 1000만원을 받아 쥐어도 전부 수입이 아니라는 사실을 윤영민 씨는 잘 알고 있다. 세금도 내야하고, 비품관리도 해야 하고, 감가상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영민 씨는 지출은 최대한 줄이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액수를 저축하려고 노력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곧이곧대로 사는 남편이 은행에 다닐 때처럼, 틈 날 때마다 원룸 건물을 찾아서 닦고, 쓸고, 치우는 일을 하고 있는 점이다. 

 

방배동 아파트를 팔고 상도동으로 건너온 뒤로, 네 식구는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남편 퇴직 즈음, 온 식구가 완전 공항상태였다. 당장 수입원이 없어지는 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달라졌다. 여전히 아파트에 살고 있고 남편이 직장 다닐 때만큼 받던 월수입까지 있다.

 

게다가 원룸 건물은 고정 수입 외에도 1, 2억 가격 상승까지 이어져 여간 대견한 것이 아니다. 요즘 윤영민 씨는 원룸 건물 옆의 상가를 임대해서, 주변 원룸 입주자들을 상대로 반찬가게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성민

KBS 아나운서. 사랑의 가족(KBS 1TV), 생방송 토요일, 일요일 아침입니다(KBS 1라디오), 경제를 배웁시다(KBS 한민족)를 진행 중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일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백석예술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특히 노인문제를 포함해서, 미래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펼치고 있다. 이재용의 넥스트 삼성, 100세 시대 다시 청춘, 대통령의 설득법, 반기문 대망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매일 2시간씩 걸어서 출근할 정도로 걷기를 좋아하고, 책읽기, 영화보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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