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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수곡고택]
학문에 정진하며 검소하게 살다간 선비의 정신을 담은 집

아침해가 솟는 풍광이 아름다워 이름붙여진 가일마을의 나지막한 구릉을 배경으로 앉은 수곡고택은 소박하고 담백한 멋을 지니고 있다. 일생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던 선비의 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가 지은 집으로, 소박하지만 사대부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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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사랑채 대청. 3면이 개방돼 있다.

 

10월 중순의 높은 하늘은 가을을 흠뻑 느끼게 한다. 울긋불긋 채색으로 물든 산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은 참 예쁘다’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서울에서 안동을 오고가며 길에서 느끼는 우리네 산과 들의 가을풍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대문.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나온다.

 

 

마을이 아름다운 안동 권씨들의 집성촌

안동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온 곳이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팔도총론 경상도편에는 “예안·안동·순흥·영천·예천 등의 고을은 이백의 남쪽에 위치했는데, 여기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禮安安東順興榮川醴川等邑在二白之南玆爲神皐福地而太白之下)”라고 기록돼 있다. 또 복거총론 산수편에도 예안과 안동을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꼽고 있다.

 

 

▲수곡고택 전경.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안온하게 앉아 있다.

 

“우리나라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으며 강은 산골에서 나와서 유유한 모양이 없고 항상 거꾸로 말려들고 급하게 쏟아지는 형세이다. …(중략) 오직 시냇가에 사는 것이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한 운치가 있고 또 관개와 농사짓는 이점이 있다. …(중략) 시냇가에 살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다.

(我國地勢東高西低江自峽出少悠遠平穩之意恒有倒捲急瀉之勢…常惟溪居有平穩之美蕭서之致又有灌漑耕耘之利…溪居當以嶺南禮安陶山安東河爲第一)

 

 

▲‘ㄷ’자형으로 앉은 안채. 정침은 높은 기단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하회의 위와 아래에는 삼귀정(三龜亭), 수동(繡洞), 가일(佳逸)등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강을 임하여 이름난 마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일’이란 마을은 안동에서도 이름난 마을로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고을인 셈이다.

 

 

▲안채 대청과 건넌방 및 고방. 건넌방은 이 집에서 주로 새댁이 거처하던 곳으로 ‘새댁방’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마을은 안동(安東) 권씨(權氏)들의 집성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조선초기 정랑을 지낸 권항(權恒)이라고 한다. 그는 풍산 류씨(柳氏)인 류서(柳壻)의 사위로 장인의 집을 물려받아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됐다. 경주 양동마을 등 조선시대에는 사위가 처가의 살림을 이어받아 정착하는 예가 드물지 않았다. 이 마을이 하회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안채 대청. 시렁이 걸려 있다.

 

 

정쟁으로 화를 입은 후 학문과 후학양성에 전념

가일이란 마을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권항의 손자인 화산(花山) 권주(權柱)때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4세에 문과급제를 하는 등 가일마을의 안동 권씨 문호를 연 인물로 꼽힌다. 도승지를 거쳐 충청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갑자사화에 연루돼 귀양을 갔다가 결국 사사되고 말았다.

 

 

▲사랑채 기단을 이중으로 설치한 후 그위에 집을 앉혔다.

 

 

권주의 큰 아들 권질 또한 귀양을 갔으며, 둘째아들인 권진(權嗔)은 기묘사화때 화를 입었다. 화산의 가계는 넷째아들인 권굉 이었다. 이후 권의남(權義男), 권호연(權浩然), 권경행(權景行) 등으로 이어져오다가 권경행대에 외가인 예천 용궁면으로 이주해 살기도 했다. 그리고 권경행의 손자인 권징(權징)때 다시 가일로 돌아왔다.

 

현재 이 마을의 종택은 권징의 아들인 병곡(屛谷) 권구의 집이다. 병곡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에게 수학한 인물로,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1728년 무신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남지역에 파견된 안무사 박사수(朴師洙)가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면서 그를 서울로 압송해갔지만,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임금이 그를 석방해 다시 향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채 안방. 윗부분에 넓은 다락이 있고 이곳에 널문을 만들어두었다.

안방 위쪽의 다락공간은 수납공간이자 일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이후 병곡은 벼슬에 나가기를 포기하고 오직 후학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는 다양한 학문을 섭렵해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으며, 흉년에 빈민들을 구제하고, 향약을 실시해 고을에 미풍양속을 일으켰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특히 높은 학문으로 불천위로 추대됐다.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지역의 남인이 대개 그러했듯 벼슬보다는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했던 선비들이 많았다. 당시 남인이 노론이나 소론에 밀린 점도 있거니와 자칫 정쟁에 휘말리다보면 언제 화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일마을의 권씨들 또한 몇 번의 정쟁에 휘말린 후 아예 초야에 묻히는 쪽을 택한 셈이다.

 

 

▲안채의 건넌방 아래 간이부엌 위쪽에도 수납공간이 있다.

이곳에 밖에서 수납공간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높은 디딤돌을 놓아두었다.

 

 

‘뱁새가 둥지를 트는데는 가지 하나면 충분하다’

수곡(樹谷) 권보는 병곡의 셋째아들이다. 가일마을 권씨 문중에서 펴낸 유문집에 따르면, 수곡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형들과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하지(下枝) 이상진(李象辰), 외재(畏齋) 류종춘(柳宗春) 등과 교유했다.

 

수곡은 특히 검소한 것으로 정평이 났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거처하는 곳이 몹시 좁았는데, 사람들이 이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뱁새가 둥지를 트는데는 가지 하나면 충분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김필형(金弼衡)이 이를 두고 ‘일지암(一枝庵)’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조카들중에 어려운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먼저 구제했다.

 

 

▲안채 뒤쪽에 위치한 사당

 

수곡에게는 조우(祖佑)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고, 조우에게는 조(眺)와 환(晥)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지금의 수곡고택은 바로 수곡의 손자인 권조가 할아버지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집이다. 수곡고택의 한쪽에 있는 별당채의 당호가 ‘일지재(一枝齋)’인데, 바로 ‘가지 하나’를 뜻하는 이름이다. 수곡의 청빈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랑채 대청. 이 집의 사랑채는 여느 사대부가와 달리 맞배지붕 형태로 처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수곡의 검소함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일마을의 권씨들은 벼슬에 나가기보다 학문을 연마하는데 더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그러면서도 지방의 사대부가로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데에도 앞장섰다. 어려운 이웃을 구휼하는 것은 물론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들도 절대 소홀히 대접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에도 몸을 바친 이들이 많다.

 

마을앞에 있는 풍산들은 대부분 가일마을 집안의 소유다. 이들중 소작을 준 농지가 많았는데, 추수때 소작물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거나 아예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이를 따지거나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 또한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늘 따뜻하게 대접해주었다.

 

 

▲사랑대청. 이곳에 앉으면 마을 앞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곡고택의 소유주인 권대송(權大宋)씨의 기억에 따르면 “어머니 손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수곡고택이 마을에서도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이어서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모두 대접하려다보니 어머니께서 늘 부엌일을 하느라 젖은 손을 말릴 틈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집의 인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일화다.

 

이 마을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도 많았다. 마을 입구에는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권오설(權五卨)의 기념비가 서 있다. 그는 광주 3·1만세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고, 이후에도 노동 및 농민운동을 펼쳤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사전에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가일마을의 독립운동가들은 집을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댄 집안도 적지 않다. 이 마을 출신인 권준희씨는 광복회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인해 사회주의 계열에 몸담은 이들이 많다보니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부분도 적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이들의 활동상이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사랑채. 대청위에 ‘수곡고려’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부의 검소함 받든 사랑채의 맞배지붕

수곡고택은 가일마을의 뒤쪽에 낮은 구릉을 배경으로 사랑채와 안채, 별당, 사당 등이 앉아 있다. 집에 대한 첫 느낌은 담백하면서도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대문채에서 사랑채, 안채 순으로 서 있는 집의 위계도 그렇거니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격식을 갖춘 모습이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을 사이에 두고 먼저 ‘ㅡ’자형의 커다란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중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큰 사랑이고 왼쪽에 두칸 규모의 작은 사랑이 있다. 큰 사랑은 3면이 트인 2칸 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사랑은 1칸 방옆에 1칸의 마루방이 붙어있다. 사랑으로서의 형식은 갖춘 셈이다. 작은 사랑옆으로는 광이 이어진다.

 

 

▲사랑채 전경. 가운데 중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큰 사랑이고 왼쪽이 작은 사랑이다. 작은 사랑 옆으로는 광이 이어진다.

 

이집 사랑채에서 특이한 점은 지붕을 사대부가의 일반적 형태인 팔작지붕으로 하지 않고,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손자인 권조가 조부 권보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집으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던 선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함이다. 또한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의 지붕높이에도 차이를 두어 위계를 나타낸 점도 눈길을 끈다.

 

사랑채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과 함께 ‘ㄷ’자형의 안채가 사랑채와 이어져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높은 기단위에 세워져 사랑채보다 지붕이 훨씬 높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안방옆으로 부엌에 이어 1칸의 고방이 딸려 있다.

 

 

▲별당채인 일지재의 마루. 마루 앞으로 난간을 둘렀다.

 

대청 오른쪽으로는 건넌방과 고방, 부엌과 아랫방이 이어진다. 특히 이 집에서는 안채의 건넌방을 주로 처음 시집온 새댁들이 이용했다고 해서 ‘새댁방’이라고 부른다. 안채 대청에는 뒤뜰쪽으로 판장문을 달았다. 사랑대청과 함께 안채 대청에도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시렁이 걸려 있다. 당초 안채 뒤쪽으로 장독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일지재 전경. 집안 어른들이 기거도 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던 강학공간이다.

 

안채에서 특이한 점은 안방위에 높은 다락을 두고 있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안방에서 부엌쪽으로 다락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수곡고택에서는 부엌다락외에 안방위에도 안방크기만한 상부공간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은 물건을 넣어두는 수납공간이 되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부녀자들이 일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안방위의 상부공간에는 널문이 설치돼 있다.

 

 

▲일지재의 창호에는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이 공간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채의 천장높이가 높아졌다. 비단 안방뿐 아니라 이 집에는 왼쪽 부엌에서 이어지는 광이나 오른쪽 간이부엌위에도 별도의 수납공간을 마련해두고 있다. 권대송씨의 설명에 따르면 용도에 따른 여러 물품들을 수납할 공간이 필요했던 때문이라고 한다.

 

 

물품 저장위한 수납공간 많아 눈길

안채의 뒤쪽에는 경사진 구릉의 뒤뜰이 있다. 이 뒤뜰은 중간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부분과 경사진 부분을 구분해 놓았다. 그러나 당초에는 축대가 없었다고 한다. 즉 자연스럽게 평평한 부분에서 경사지형으로 이어지게 돼 있던 것을 복원과정에서 축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축대를 만들어놓은 후에는 안채 대청에 앉아 있어도 시원함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는 게 이 집을 관리하는 배용직씨의 얘기다. 오히려 안채보다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사랑채 대청에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초의 지형을 변형시킨 것이 자연현상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는 게 배씨의 설명이다.

 

 

▲수곡고택에서는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해 그랭이질로 기둥

 

 

사랑채 옆으로는 작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별당채가 서 있다. 이 별당채가 바로 일지재다. 이곳은 집안 어른들이 기거도 하면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강학공간이다. 마루에는 난간을 둘렀고, 창호들은 대부분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언제든 공간을 터서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터다.

 

일지재의 가운데 공간은 마루방으로 돼 있다. 양쪽에 문을 만들어 필요할 때는 양쪽을 터서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된 구조다. 마루방 양쪽으로는 모두 방이다. 큰 방옆으로는 벽장이 있고, 벽장쪽으로 광창을 내 환기가 되도록 했다. 안채의 오른쪽 사랑채 뒤편으로 1칸 규모의 사당이 있다.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수곡고택은 1792년(정조 16년) 건립됐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사대부가가 대부분 19세기에 건립된 것임을 감안하면 이집은 이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건립된 셈이다. 그래서인지 건축수법이 대부분 고식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주춧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 그랭이질로 기둥을 세웠다.

 

 

▲일지재 전경

 

가일마을은 영남 8대 명소중의 한곳으로 꼽힌다고 한다. 마을의 모습이 그만큼 아름답다는 얘기다. 안동 권씨외에 순흥(順興) 안씨(安氏)도 더러 살고 있다고 한다. 수곡고택의 아래쪽으로는 수곡의 부친이자 마을의 종택인 병곡고택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 가일마을의 고택들은 경북미래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면서 체험고택으로 활용하기도 하는 등 우리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수곡고택도 체험고택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네 선조들이 어떤 정신으로 시대를 살아왔는지 이런 집에 한번쯤 묵으면서 그 정신을 새겨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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