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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군 백산면 ‘윤두서 고택’]
고고하게 살다 간 문인화가의 숨결을 담은 집

우리나라 가장 남단에 위치한 해남의 바닷가에 자리잡은 윤두서 고택은 전체적으로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춘 주택이면서도 몇몇 부분의 특이한 공간구성이 눈길을 끈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기 위해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은 형태로 얹은 것이나 사랑 부엌위로 누다락을 만든 점, 안방 앞에 찬마루를 조성한 점 등이 그러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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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두서 고택 전경. 뒷산을 배경으로 앉은 고즈넉한 집의 모습이 우리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끼게 한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는 선비이자 화가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조선 후기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3재(三齋)’로 일컬어진다.

 

고산 가문의 종손이기도 한 공재는 젊은 시절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해 숙종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쟁이 심하던 당시 해남 윤씨 계열이 속했던 남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벼슬에 대한 뜻을 접고 학문과 시서화에 몰두했다. 말년에는 고향인 해남 연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안채대청과 안마당. 그리고 안채의 모습.

 

 

다재다능하고 인간적인 문인화가

공재는 방대한 중국 서적의 독서경험을 토대로 조선 중기 새로운 회화경향을 개척한 인물로 꼽힌다. 특히 말과 인물화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공재는 예리한 관찰력과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통해 사실성을 나타내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自畵像)’과 ‘백마도(白馬圖)’에 이같은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자화상은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물화나 동물화외에 산수화나 화조화, 풍속화 등도 그렸다.

 

 

▲안채 대청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모습. 안마당 앞쪽이 트여 있지만, 당초에는 앞쪽에도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낮게 덮었다.

 

공재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 윤용(尹熔)에게 계승됐으며, 호남 화풍의 큰 줄기인 남종화의 선구자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강세황(姜世晃), 유경종(柳慶種) 등 남인 서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조선 말기의 화가 허련(許鍊)도 녹우당에 와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丁若鏞)의 회화론 형성에도 바탕이 된다.

 

 

▲안채 대청. 안채쪽으로 막혀 있다. 이는 안사랑과의 기능분할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에서 본 뒤뜰. 대청 뒤쪽 가운데와 양쪽의 창호 크기가 다르다.

 

그는 비단 그림뿐 아니라 시(詩)와 서(書)에도 능했는데, 그는 자신의 시대가 서도(書道)가 무너진 시대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서체를 창안해 후대의 서예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외에도 경제, 병법, 천문, 지리, 의학, 음악 등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악기를 손수 만드는가 하면 천연두 예방법도 찾아냈다. 그의 아들 윤덕희가 쓴 행장에 따르면, 그는 다양한 학문에 심취해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인물됨 또한 애민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굳이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한가지 재능이 있어 취할 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다정하게 대했다고 한다. 아랫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부르는 일이 없고 반드시 이름을 불렀다. 혹 노비들이 잘못 하는 경우가 있어도 함부로 꾸짖지 않았다.

 

 

▲안사랑 옆 안마당으로 통하는 공간. 통로만 있고 문이 없는 특이한 형태다. 아마도 이 집의 원형 훼손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집안에 혼사가 있을 때도 빈부나 집안의 권세 등은 따지지 않고, 오직 가법(家法)이나 성품, 행실 등만을 보고 선택했다. 이는 당쟁으로 명문가라도 언제 화를 당할지 모르는 당시의 정세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이런 선택 덕택에 실제로 공재 집안에서는 당시의 변고에 휘말린 집안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몇가지 일화가 있다. 그 하나는 말에 관한 것이다. 그는 말을 좋아해서 항상 준마를 길렀는데, 한번은 멀리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겼지만 마침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타고 가다가 도중에 타던 말이 역마인줄 알게 됐다. 그는 즉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나라의 공물을 사사로이 이용하지 않으려한 때문이다.

 

 

▲‘ㄷ’자형의 안채 전경. 전체적으로 낮게 숙인 모습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해에 해일이 일어 곡식이 떠내려가고 들판은 황톳물로 벌겋게 물들었다. 공재의 집이 있던 백포리는 바다와 맞닿아 있어 그 피해가 더욱 심했다. 공재는 이때 마을 사람들에게 종가 소유의 산에 있는 나무를 벌채하고 소금을 굽도록 배려해 주었다. 수백호의 마을주민들이 그 덕분에 굶어죽거나 떠돌아다니지 않게 됐다.

 

 

▲안채 부엌. 아궁이 오른쪽 위의 문은 찬마루와 연결되고, 왼쪽 계단으로 통하는 문은 안방 뒤쪽 수납공간과 연결된다.

 

 

사대부 격식속에서도 실용성도 가미

윤두서 고택은 전남 해남의 바닷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를 향해 서 있다. 당초 고산이 풍수지리상 명당터에 이 집을 지었으나 바닷바람이 심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증손인 공재가 살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재 또한 주로 서울에 살았고 말년에 해남으로 내려왔으나 종가가 있는 백련동에 주로 머물면서 이곳을 오갔다고 한다.

 

 

▲안방 부엌 앞 찬마루 공간. 앞에도 문을 설치해 놓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고택의 안채 상량도리 및 장여에는 중수 상량문이 있는데, ‘경술후백사십이년신미팔월십일중수좌묘향유(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八月十日重修坐卯向酉)’라고 기록돼 있다. 즉 경술년인 1670년에 처음 지었고, 142년후인 1811년(辛味年)에 중수한 기록이다. 안채 기와에는 ‘동치십년신미구월중수(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라는 명문이 있어 중수한지 60년후에 지붕을 다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1670년은 고산과 공재가 모두 살아 있던 시기이다.

 

 

▲사랑방.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곳은 종가와 이곳을 오가던 고고한 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 집의 건립 당시 규모는 48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가 없어지고 안채와 곳간채, 헛간, 사당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관리인 윤원현씨에 따르면 바닷쪽을 향해 문간채가 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무렵 화재로 인해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 

 

이 집은 바다와 마주 보고 서 있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건축수법이 곳곳에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바닷바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했다. 집앞에 서서 보면 들판을 넘어 앞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방 부엌위에 설치된 누다락의 앞(15)과 뒷 모습. 부엌위로 마루를 내밀었다. 뒤쪽은 퇴에서 계단을 통해 누다락으로 오를 수 있다.

 

 

▲누다락의 내부. 마루를 깔아 낮은 누마루처럼 느껴진다.

 

집의 안채는 ‘ㄷ’자 모양을 띄고 있다. 처음에는 ‘ㅁ’자 구조였지만, 한쪽 편이 헐려 현재의 모양이 됐다고 한다. 안채의 앞에 있던 건물이 사랑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실 이 집에서는 당초의 사랑채가 없어진 대신 안채의 바깥마당으로 향한 부분이 사랑채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안채의 특이한 구조로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안채의 영역은 대청을 기준으로 안채 기능을 가진 부분과 사랑채 기능을 가진 부분으로 나뉜다. 안채 대청에서 보면 안채쪽으로 막혀 있는데, 이는 기능을 나눈 것이다. 사랑채가 없어진 후 이처럼 기능을 나눈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처음 집을 지을 때 안사랑의 기능을 부여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 오른쪽 뒤에 있는 사당. 부엌을 만든 점 등 사당의 건축수법도 특이하다.

 

 

사랑채 누다락과 안채 찬마루 등 특이

사랑은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으로 구성돼 있다. 사랑방에는 벽함을 만들어 두었다. 특히 사랑채에는 부엌을 만들고 그 위에 누다락을 얹은 점이 매우 특이한 구성이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사랑채에 이같은 형태의 다락을 둔 예를 찾기 힘들다. 이 다락은 마루로 꾸며져 있어 시원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돼 있다.

 

사랑채 부엌 옆으로 문도 설치돼 있지 않은 작은 통로가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을 비롯해 안방과 부엌으로 이어진다. 이곳 안채에서도 특이한 공간이 있는데, 바로 안방 앞 부엌과 통하는 곳에 마련한 찬마루이다. 부엌에서 마루쪽으로 작은 문을 만들고, 음식을 이곳을 통해 나를 수 있도록 설치한 곳이다. 안방 부엌에는 이외에도 작은 쪽문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이중으로 만든 문고리. 창호 하나 만드는데에도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안방 앞으로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안채에 들어열개를 설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안방 옆에는 작은 방이 있으며, 이곳은 그릇 등 안방살림의 수납고로 활용한 공간이다. 이곳에 쪽문을 만들어 안방 부엌에서 이곳으로 통할 수 있도록 했다. 부엌 뒤로는 작은 담장을 두르고 장독대를 조성했다.

 

사당은 본채의 오른쪽 윗편에 자리잡고 있다. 당초 사당 옆에 별묘사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사당옆에 부엌을 만든 점이나 들어열개를 설치한 점도 다른 집에서는 보기 힘든 예이다. 이곳 사당의 벽면에 민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진 점도 특이하다. 사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편에는 소철과 담쟁이 덩굴이 덮였다.

 

 

▲집 뒤편으로 공재의 묘소가 있다.

 

고택의 사랑방에 앉으면 더운 여름에도 바닷바람이 불어와 시원하다. 건축수법이나 공간구성의 특이함도 그러려니와 집 주인이 우리나라 문인화와 실학의 선구적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재 고택은 더욱 남다르게 다가온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알아보는 이 있을 것이니/흙인 듯이 있거라

 

공재가 남긴 시구절이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랑방에 앉아 있노라니 벼슬을 마다하고 고고하게 살다간 선비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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