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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수지면 ‘몽심재’]
부와 권세, 나눔과 배려를 담은 명문가의 집

‘몽심재’는 남원 5대명당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터에 자리잡은 호남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으로 2명의 재상과 50명이 넘는 대과급제자를 배출한 명문가이다. 또한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나눔의 정신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 살아온 집안이기도 하다. 집의 구조와 공간구성에서도 그러한 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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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의 연못과 사랑채. 경사진 지형을 따라 단차를 두고 각 채를 앉혔으며, 문간마당과 사랑마당에도 단차를 두었다. 마당 한켠에 조성한 연못이 집안의 운치를 살리고 있다.

 

조선시대의 명문가란 대체로 재상이나 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룬 학자를 배출했거나 부(富)를 일구어 이웃에게 덕을 베풀고 산 집안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이중 어느 하나만을 갖춘 집안이면 일단 명문가라는 칭호를 얻는다. ‘몽심재(夢心齋)’는 이중 둘 이상의 자격을 갖춘 ‘명문가중의 명문가’라 할 만하다.

 

 

▲사랑마당 앞에 자리잡은 바위. 바위위에 호랑이상을 얹어 놓았는데, 이는 풍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위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선비의 마음가짐과 기개 등을 표현하고 있다.

 

몽심재는 집안에서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박원형과 광해군때 좌의정을 지낸 박홍구 등 2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만 55명의 문과급제자가 나왔다. 이 정도로도 명문가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데, 몽심재는 여기에 더해 아랫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웃에 대한 베풂으로도 칭송을 받았다.

 

 

▲문간채에 마련된 누마루인 ‘요요정’. 하인들이 바깥 경치를 감상하며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고려말 충절 지킨 두문동 72현의 후손

몽심재는 고려말 충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의 후손이다. 송암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좌의정으로 내정하고 조정에 나와줄 것을 부탁했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태조에게 주나라때 충절을 지킨 백이와 숙제를 비유한 ‘치주가’ 한 수를 지어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1 사랑채 전경. 높은 기단위에 서 있는 집의 모습에 위엄이 서려 있다. 사랑채를 높게 지은 것은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오른쪽으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설치돼 있다. 2 의 당호인 ‘몽심재’ 현판. 사랑채에 걸린 것외에 원판은 따로 보관돼 있다.

 

이 집의 당호인 ‘몽심재’도 바로 송암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송암이 두문동에 있으면서 고사리를 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게 보내면서 ‘격동유면원량몽(隔洞柳眠元亮夢) 등산미토백이심(登山薇吐伯夷心)’이란 시구를 함께 지어 보냈는데, 바로 여기에서 한자씩 따서 집의 당호로 삼은 것이다.

 

몽심재는 죽산 박씨(竹山 朴氏)의 소종가중 하나이다. 죽산 박씨는 신라왕족 출신으로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 박언립(朴彦立)이 죽성대군(竹城大君)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기오(奇悟)가 고려초에 공을 세워 삼한 벽상공신이 되면서 죽산(지금의 경기도 안성과 용인 일부지역)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본관으로 삼았다.

 

 

▲문간채. 방옆으로 놓여 있는 마루가 요요정이다.

 

죽산 박씨가 남원에 정착한 것은 송암의 손자인 박자량(朴子良)때부터다. 박자량은 아버지인 박총(朴叢)이 이성계에게 협력해 공을 세운데 힘입어 한성판윤에 제수됐지만, 숙부인 박포(朴苞)가 제2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에 대항하다가 참수되면서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됐다. 박자량은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외가가 있던 남원 수지면 초리에 은둔했다. 몽심재가 있는 호매실 마을 입구에는 ‘정착조 박자량’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죽산 박씨가 초리에서 산 기간은 300년쯤이다. 이후 지금의 호곡리로 옮긴 것은 송암의 13세손인 박원유 때이다. 집안에 돌던 문질(門疾)을 피해 여기저기로 이주하다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이다. 박원유는 호곡리에 처음 들어온 박시채의 조카이자 집안의 종손으로, 그에게 얽힌 일화가 전해져온다.

 

 

▲연못에 새겨진 ‘천운담’과 ‘정축’, ‘임리’의 글자. 지금은 연꽃에 가려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이 사진은 몽심재 측으로부터 제공받은 것임).

 

가세는 비록 궁색했지만, 박원유는 찾아오는 탁발승을 빈 손으로 보내지 않고 냉수 한그릇이라도 정성껏 공양했다. 그가 열두살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스님이 찾아와 ‘건너편 산에 눈이 녹은 자리에 장사지내면 자손이 흥성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곳에 묘를 쓴 이후 벼슬을 한 이들이 많이 배출됐고 거부(巨富)도 나왔다.

 

몽심재를 지은 이는 송암의 14세손인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이다. 이때에 죽산 박씨 남원종가의 3형제가 다시 종파(宗派)와 중파(中波), 말파(末波)로 나뉘는데, 연당은 중파의 파조가 된다. 연당은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으며, 후손들이 대대로 관직에 오르면서 집터가 남원의 5대 명당터로 꼽혔다.

 

 

▲사랑채의 뒷공간. 앞으로 보이는 건물은 헛간채이다.

 

연당의 증손인 송곡(松谷) 박주현(朴周鉉)은 항일지사로 순국한 인물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 승정원 승지 등을 지냈으며, 러일전쟁후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후 일제 침탈에 항거했다. 그러던 중 상해 임정에 독립자금을 조달한 일이 발각돼 고문을 당한 후 끝내 숨지고 말았다.

 

그는 경술국치때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소송(小松) 정재건(鄭在健)과도 깊은 교분을 나눴다. 특히 사돈간이기도 한 소송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8세손으로, 사돈이 고문으로 죽임을 당하고 국권이 피탈당하자 선비로서 더 이상 산다는 것은 치욕이라며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택했다.

 


1 사랑채 뒷편의 아궁이 2 사랑방앞 누마루. 이어지는 툇마루에 쪽마루를 덧대 폭을 같게 했다.

3 사랑채의 팔각 기둥과 태극문양. 민가건축에서 팔각기둥을 쓴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태극과 팔괘를 상징하는 것이다.

 

 

2만석의 거부로 이웃에 베풀고 아랫사람도 배려

송곡의 장남인 정와(靖窩) 박해창(朴海昌)은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급제자이다. 홍문관 시강과 비서감랑 등을 역임했다. 그에게는 남다른 일화가 하나 있다. 홍문관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로 경남 진주 출신의 정홍석(鄭鴻錫)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박한림’, ‘정한림’으로 불렸다. 두사람은 지방색 차이로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고종 임금이 두 사람을 특별히 만찬에 초대했다. 만찬이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 두 한림에게 아들이나 딸이 있는지를 물었다. 마침 박 한림에게는 맏아들이 있었고, 정 한림에게는 적령기의 외동딸이 있었다. 고종은 이들 둘의 혼인을 제안해 혼사를 치루었고, 이후 두 집안이 가까워지게 됐다.

 

 

▲ㄷ자형으로 앉은 안채. 사랑채 뒷마당과 단차를 두어 안마당을 조성하고, 그위에 다시 기단을 만들고 안채를 앉혔다.

 

박 한림이 부친 송곡의 사후 계속되는 일제의 압박에 진주 사돈집안의 권유로 식솔을 거느리고 경남 사천군 삼천포읍으로 이사를 했다. 이후 사업에 능한 사돈댁 사람들의 도움으로 삼천포 항구의 선주들을 대상으로 금융업을 했고, 돈을 많이 벌었다. 삼천포 선주들사이에서는 만선을 하려면 박해창의 돈을 빌려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어쨌든 박해창은 큰 돈을 벌어 2만석의 갑부가 됐고, 남원으로 다시 귀향할 때는 남원의 3대 갑부로 꼽혔다. 당시 박해창의 땅은 남원은 물론 구례까지 뻗어 있어 박씨 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부를 쌓으면서 이웃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었다. 바로 그런 점이 이 집을 명문가로 만든 요인이 됐다.

 

 

▲안채 안방 부엌위에 다락에서 내민 공간이 있다.

안채의 지붕과 부엌쪽으로 난 눈썹지붕 사이에 공간이 조성돼 있다.

이 공간은 다용도로 활용하기 위한 공간이다.

 

박해창은 소작농들에게도 충분히 추수한 곡식을 배분하는 등 후한 인심을 베풀었고, 이들이 훗날 공덕을 기리는 비를 곳곳에 세웠다고 한다. 6.25전쟁때도 대부분의 지주 집안에서 피해를 입었지만, 이 집안에서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는데, 이는 그만큼 베풀고 살았던 덕분이다.

 

또 몽심재는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에게도 자주 들르는 중간거처이기도 했는데, 이 집을 지나는 과객들에게도 아낌없이 대접해 주었다. 이 때문에 이 집 사랑채는 과객들에게도 회자될 만큼 유명한 장소였다. 후일 박해창은 사재를 털어 몽심재의 안산인 청룡자락 뒤편에 초등학교를 건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투자했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의 뒷모습. 사랑채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시선이 차단된다.

 

몽심재 사람들은 박해창 이후 원불교에 귀의했다. 박해창의 장남인 박영식(朴榮植)은 일본에 유학해 인촌과 송진우, 백관수 등과 교류했으며, 말년에 원불교 성직자로 출가했다. 이어 그의 아들에 이어 손자도 원불교에 출가해 성직자로 봉직하고 있으며, 박해창의 증손자인 박인기는 그의 아들이 미국 정착을 결정하면서 몽심재를 원불교에 희사했다. 이에따라 지금은 이 집을 원불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안마당. 가운데 커다란 돌확의 모습이 이채롭다

 

 

‘풍족한 재물을 널리 베풀고 조심하면서 살라’

몽심재가 앉은 터는 남원에서 4대 양택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터다. 풍수지리상 옆으로 누워 있는 호랑이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호두혈(虎頭穴)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이 ‘호음실(虎音室)’이 된 것도 호랑이 울음이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마을과 관련된 얘기로는 두가지 일화가 전한다.

 

 

▲안방 뒤편쪽에 마련된 마루. 이곳 또한 아녀자들이 쉴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하나는 이곳에 호랑이가 많아 주민들이 피해를 입자 당시 전라감사인 이서구(李書九)가 이를 진압하는 처방을 내렸다. 곧 ‘호두산(虎頭山)’이라는 이름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고 호곡리(虎谷里)라는 마을이름도 호곡리(好谷里)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광한루 옆에 돌로 된 호랑이상을 세워 호두산을 바라보게 했다. 이후 신기하게도 호환이 사라졌다. 또하나의 일화는 호랑이가 아닌 들개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것으로 처방은 모두 같은 내용이다.

 

몽심재는 지리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작은 구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따라 건물도 높낮이를 달리 하며 앉아 있다.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사랑채의 터 돋움을 비롯해 공간의 다양한 활용을 위한 구성이 눈에 띈다. 또한 하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등 아랫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인다.

 

 

▲안채 측면의 굴뚝. 지붕보다 낮게 조성돼 있다.

 

먼저 문간채부터 이 집은 다른 집과 달리 독특하게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 양옆으로 헛간과 방을 만들었는데, 방 옆으로 작은 누마루를 만든 점이 눈에 띈다. 이 방들은 남녀 하인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여기에 마루를 만들어놓은 것은 하인들이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마루에 붙은 이름은 ‘즐겁게 쉬라’는 뜻의 ‘요요정(樂樂亭)’이다.

 

문간채 앞으로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있고, 마루 앞쪽으로 연못이 조성돼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린 바위가 바로 풍수상 호구혈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바위위에는 작은 동물의 형상이 놓여 있는데, 얼핏 보기에는 양같은 모양이나 실제로는 호랑이 상이라고 한다. 이는 광한루에 세운 호랑이상과 마찬가지로 호랑이나 들개의 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이다.

 

 

1 안채 건넌방쪽에도 다락앞으로 내민 작은 공간이 있다. 이역시 안방 부엌위 공간과 마찬가지로 다용도 공간이다.

2 안채 건넌방쪽 다락에 마루를 깔아놓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다락 앞쪽으로 내민 공간이 있다. 3 안채 건넌방

 

바위 오른쪽에 조성한 연못은 천운담(天雲潭)이라 이름붙여진 것으로, 이 집을 지은 박동식이 연꽃을 심고 즐겼다고 한다. 그의 호를 연당이라고 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 연유했다. 이 연못에는 디딤돌이 놓여 있고, ‘정축’ ‘임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풍족한 재물을 널리 베풀어 쓰면서 한발한발 인생을 조심스럽게 건너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다. 부를 쌓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방도를 새겨놓은 것이다.

 

배려와 실용성을 담은 내부공간

사랑채는 연못과 바위 뒤쪽에 높은 축대를 쌓고 앉혔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사랑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원불교 교무 류인태씨에 따르면,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사랑채가 낮으면 뒤쪽의 안채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너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높은 기단위에 선 사랑채는 구조가 다소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가운데 대청을 두는 것이 보통이나 이 집에서는 가장 오른쪽으로 한칸 대청을 두었다. 사랑방은 가장 왼쪽에 자리잡았고, 방 앞으로 작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방 앞으로 누마루의 폭에 맞추어 툇마루에 쪽마루를 덧대었는데, 이러한 구성양식도 매우 특이하다.

 

 

▲안채 부엌 밑으로 낮은 굴뚝이 있다. 낮은 굴뚝은 해충을 막기 위한 것이다.

 

사랑대청과 이어진 방의 창호에는 들어열개를 설치해 문을 들어 걸어놓을 수 있도록 했다. 사랑대청에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마당쪽으로 낸 창호외에 안마당쪽으로 창호를 하나 더 내어놓은 점이다. 아마도 이는 안채와의 소통을 위한 구조로 보인다. 가장 왼쪽의 큰 사랑방 옆으로는 안채 쪽으로 작은 부엌을 만들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했다.

 

사랑채에서 또하나 눈에 띄는 점은 양쪽 끝 기둥위의 태극문양과 팔각기둥이다. 민가건축에서는 사각기둥이 일반적이며, 드물게 원기둥을 쓰기도 하지만 팔각기둥은 민가건축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이는 태극과 팔괘의 풍수사상을 건축에 원용한 것이라는 게 류인태씨의 설명이다.

 

 

▲안채 대청에서 이어지는 건넌방 위쪽 공간은 수장고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더운 여름에도 음식을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다.

 

사랑채 뒤로는 ‘ㄷ’자 형의 안채가 놓여 있다. 사랑채 뒷마당과 단차를 두고 안마당을 조성, 높낮이를 통해 마당의 성격을 달리한 형태이다. 안마당 기단위에 앉은 안채는 고운 여인의 자태처럼 단아하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안방을 들이고 오른쪽에 건넌방을 배치했는데, 이곳 또한 전체적인 공간구성은 일반적인 민가의 안채와는 다르다.

 

우선 이집 안채에는 부엌이 세군데 있다. 일반적인 안채구조에서처럼 안방 아래쪽에 자리잡은 부엌이 있고, 건넌방 아래쪽에도 부엌이 있다. 그리고 안방 뒤쪽으로도 부엌이 있다. 아마도 이는 이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고 다양했던 탓에 그만큼 준비해야 할 음식의 종류가 많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안채 대청. 오른쪽으로 들어간 공간은 감실로 이용되는 곳이다.

 

특히 부엌에서도 특이한 공간이 눈에 띈다. 안방과 건넌방에서 이어지는 부엌의 경우 다락으로 이어지는 공간을 외부에 노출시켜 다용도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이 그 하나다. 안방 부엌의 경우 눈썹지붕을 내어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건넌방 부엌의 다락외부 공간은 그대로 노출돼 있다. 안방 뒤쪽의 부엌에는 넓은 마루를 만들었는데, 이는 아녀자들이 일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다. 여기에서도 하인들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안채 대청에서 이어지는 건넌방 위쪽의 공간은 수장고로 활용됐던 공간인데, 이곳은 한여름에도 낮은 기온을 유지해 냉장고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간 밑쪽도 비워두어 늘 시원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채의 안방 부엌 앞으로는 낮은 굴뚝이 있다. 이는 연기를 낮게 퍼뜨려 해충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몽심재는 건축적으로도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집을 지켜온 이들의 정신도 귀감으로 삼을 만한 집이다. 높은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한눈에 들어오는 대나무숲이 몽심재의 충절과 배려를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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