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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석계고택과 가옥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산 영남의 명문가

영양군 두들마을은 석계 이시명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 마을이다. 특히 석계의 부인 장계향은 우리말로 된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인물로, 두들마을이 낳은 여중군자로 일컬어진다. 석계의 종손과 종부는 이 마을을 지키며 전통음식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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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고택의 측면 전경.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ㅡ’자로 배치돼 있다.

 

지난5월19일 경복궁 경내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관 3관 가족전시코너에서 ‘재령 이씨(載寧 李氏) 운악(雲嶽) 이함(李涵)의 가족이야기’란 전시회가 열렸다. 국립 민속박물관이 한국국학진흥원과 함께 개최한 이날 전시회에는 재령 이씨 영해파(寧海派)가 소장한 고문서들이 일반에 공개됐다. 

 

재령 이씨는 황해도 재령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기록에 따르면 본래는 경주 이씨였으나 고려때 소판공(蘇判公) 이거명(李居明)의 6대손인 이우칭(李禹稱)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후 재령군(載寧君)으로 봉해지면서 재령 이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후손이 명확하지 않았다.

 

 

1, 2 석계고택의 사랑채 정면과 측면. 측면 옆으로 작은 일각문이 나 있는데, 이는 안채 뒤뜰로 통하는 문이다. 석계고택의 구조는 일반 사대부가와는 다소 다른 독특한 공간구성이 보인다.

 

후손이 명확하게 기록된 것은 고려말 공민왕의 부마인 상장군 이소봉(李小鳳)부터로, 그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이중 영해파는 고려말 경남 함안(咸安) 고려동(高麗洞)에 자미화(배롱나무)가 활짝 핀 것을 보고 은둔한 이오(李午)의 후손인 이애(李曖)가 영해로 들어오면서 비롯됐다. 그가 영해 나라골(현재 영덕군 영해면 인량리)에 정착하면서 재령 이씨 영해파의 입향조가 된다.

 

 

▲석계고택의 대문채. 당초 이곳에는 석계와 부인 장계향이 함께 살았으나, 석계는 말년에 안동에서 지냈고, 부인 장계향이 넷째아들과 함께 이곳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돌아가셨다.

 

 

석계 이시명이 두들마을에 은둔해 정착

석계 종가의 종부 조귀분 여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애가 영해에 정착한 것은 영해에 살던 집안에 장가 든 때문이다. 집안 어른을 따라 영해로 들어왔다가 이 지방의 부잣집 무남독녀의 사위로 들어오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부의 규모가 매우 컸다.

 

국립 민속박물관 전시의 주인공인 이함은 이애의 손자이다. 이함은 퇴계학을 전승하면서 부자와 형제 등 가족간의 교육을 통해 재령 이씨 가문을 영남지역의 명문가로 키운 인물이다. 이 전시에는 그의 아버지와 아들, 손자, 며느리 등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들이 세거해온 집의 현판과 관직생활, 그의 유훈 등을 담은 내용이 들어있다.

‘나의 자손들은 선훈을 잊지 말고 학문에 힘쓰며 이욕의 길을 좇지 말라’. 이는 이함이 남긴 유언이다. 이함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는 생선과 고기, 소금 등의 공급을 담당하던 관청인 사재감 직장(司宰監 直長)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은 이같은 이함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겼다.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은 이함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당시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벼슬의 길을 뒤로 한 채 은둔의 길을 택한 인물이다. 그는 영양의 한 고을로 들어와 자녀들과 후학들을 위해 학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꼿꼿한 선비의 길을 걸었다.

 

 

▲석계고택의 안채. 높은 기단위에 집을 앉혔다.

 

그가 은거한 곳이 바로 ‘두들마을’이다. ‘두들’은 ‘둔덕’의 경상도 사투리다. 마을앞 내(川)에서 높이 솟은 둔덕위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듯하다. 한때는 원리리(院里里)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곳에 광제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새로 바뀐 지명에서는 다시 ‘두들마을길’이라는 옛 지명을 찾았다.

 

 

▲안채 대청에서 사랑채쪽을 본 모습. 사랑채보다 안채가 약간 높게 앉아 있다.

 

 

▲안방의 창호를 통해 장독대가 눈에 들어온다.

 

두들마을은 재령 이씨의 집성촌이다. 이웃 영해에서 터를 잡은 재령 이씨 영해파의 후손들로, 그중에서도 특히 영해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계의 후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이 마을에 있는 문화재 중 하나인 유우당(惟于堂)은 석계의 형님인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의 후손이 살고있다.

 

석계는 조선 인조와 현종 때의 학자로 당시 벼슬을 마다하고 은거한데서 알 수 있듯 지조를 지키고 살아가는 선비정신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석계는 이곳에서 집 근처에 석천서당(石川書堂)을 짓고 아들 형제와 함께 기거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석계의 부인 장계향의 초상. 유물전시관에 전시된 그림이다.

장계향은 시서화에 능한 여중군자로 일컬어지며,

옛부터 전승돼 오던 전통음식에 관한 조리법을 한글로 적은 ‘음식디미방’을 저술했다.

 

 

석계 부인,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 저술

두들마을이 세상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과 이 마을 출신인 작가 이문열(李文烈) 때문이다. 특히 음식디미방은 140가지가 넘는 종가음식의 조리법을 한글로 적어놓은 책으로, 이 책을 쓴 이가 바로 석계의 부인인 장계향(張桂香)이다. 장씨 부인은 ‘이함의 가족이야기’ 전시에도 등장한다. 

    

장계향은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능해 ‘여중군자(女中君子)’로 일컬어질 만큼 다방면에 뛰어난 인물로, 그림과 글로 된 작품이 남아 있다. 또 자녀들에 대한 교육도 소홀하지 않아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이나 갈암(渴巖) 이현일(李玄逸)과 같은 당대의 학자들을 배출했다. 장계향이 후에 정부인(貞夫人) 칭호를 받은 것도 바로 갈암이 이조판서를 지낸데서 비롯됐다.

 

 

▲두들마을에는 장계향 유물전시관을 비롯해 예절관, 음식디미방 전시관 등이 건립돼 일반인들도 참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장계향과 석계가문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음식디미방 전시관에는 음식 모형이 전시돼 있다.

 

특히 석계 집안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나눔에도 앞장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는 점이다. 워낙 부자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웃을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집안의 며느리였던 장계향의 마음 씀씀이도 이웃을 돌보는 일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석계의 부친인 이함은 전란 등으로 마을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들을 위해 쌀 6000석을 내어놓았다. 그럼에도 굶주린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장계향은 집안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변에 있는 도토리를 주워오게 한 후 이를 죽으로 쑤어서 하루 300여명씩에게 베풀었다. 그렇게 한 것이 두어달 남짓이다.

 

 

▲석천서당. 석계가 그의 네 아들과 함께 기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본래는 초당이었으나 후에 와가로 중수했다. 서당 대청에 서당에 관한 기록과 중수기 등이 걸려 있다.

 

석계집안은 분가한 후에도 상속재산을 받지 않은 채 주변에 도토리나무 숲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는 일을 계속했다. 구휼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장씨 부인이다.

 

장씨 부인은 석계의 두 번째 부인이다. 석계는 1남1녀를 둔 채 본 부인 광산 김씨와 일찍 사별했다. 그런데 석계의 스승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가 자신의 수제자였던 석계에게 넌지시 자신의 딸을 추천했고, 결국 석계는 그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경당 장흥효는 안동 장씨로, 퇴계학맥을 잇는 인물이다. 석계는 그의 제자로 역시 퇴계학맥을 잇고 있다. 후에 석계의 아들인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같은 인물이 배출된 것도 바로 이같은 학문적 배경이 있었던 덕분이다. 갈암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석천서당 대청의 창호. 들어열개로 문을 들어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석계고택 비롯한 문화재 등 많이 남아

두들마을에는 석계고택을 비롯해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집이 여러 채 남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석계 후손들의 집이며, 마을 높은 곳에 이 마을 출신인 작가 이문열의 문학관도 자리잡고 있다. 이와함께 석계의 부인인 장계향 선생을 기리는 유적과 그의 자취를 알 수 있는 공간도 다수 마련돼 있다.

 

석계고택은 마을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집 자체의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에 ‘고택체험을 하는 곳’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는 집들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석계고택으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음식디미방 체험관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데, 영양군에서 장계향의 음식조리서를 홍보하기 위해 건립해 운영하고 있다.

 

석계고택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의 단출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만 집의 구성에서는 특이한 점들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먼저 대문을 들어서면 곳간과 함께 중문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서 있고 그뒤에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방과 퇴로 이루어진 사랑채나, 대청과 안방, 건넌방 등으로 이루어진 안채의 구성은 평범하다. 다만,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ㅡ’자로 배치된 점이 특이한 구조다. 

 

또하나 안채 대청의 한쪽편에 판자로 된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있는 점도 특이하다. 안채 대청에 이같은 공간이 마련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랑채 오른쪽으로도 작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하는 통로가 안채와 분리된 점 또한 특이한 구조다. 이는 안채 뒤뜰로 통하는 문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안채 뒤뜰에 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두들마을에 있는 석간고택과 석간정사. 석계의 후손이 지은 살림집이다.

 

석계고택의 주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채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고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석천서당이 있다. 이곳은 석계가 자신의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던 곳이다. 당초에는 초당이 있었던 자리였지만, 후에 후손들이 지금의 서당으로 고쳐 지었고, 고종때에 중수했다고 한다. 서당 대청에는 서당기와 중수기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석천서당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에는 석간고택(石澗古宅)이 있다. 이곳에는 석간정사라는 현판을 걸어놓은 별채가 자리잡고 있다. 작가 이문열이 어릴 때 이곳에서 잠시 생활한 적이 있다고 알려진 집이다. 석간고택 옆으로는 유우당이 있는데, 석계의 형님인 우계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석계고택 옆에 자리잡은 석계종가. 종손이 고택옆에 집을 마련해 고택과 유물을 관리하며 살고 있다. 한때 기울었던 종가를 종손이 다시 일으켜세우고 있다.

 

 

한류 전통음식의 세계화에 앞장서는 전진기지

영양 두들마을로 들어온 재령 이씨 영해파의 후손들은 대부분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의 후손들이다. 석계 자신은 안동에서 말년을 보냈고, 두들마을에는 부인 장계향과 넷째 아들인 항재가 함께 살았다.

 

석계의 종손인 이돈씨는 석계고택의 바로 옆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원래 종가가 안동에 있었으나 현 종손의 조부때 두들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조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종택이 넘어가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10여명이 넘는 식솔들을 데리고 이 마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종가의 주된 일은 봉제사 접빈객이라고 한다.

종부가 손님을 위해 차려내놓은 오첩다과가 정갈하다.

 

그렇게 어려웠던 종가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가 바로 현 종손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종손은 가난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힘으로 학비를 마련하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교편을 잡았지만,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해 어느 정도나마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석계가문의 유물도 일부나마 되찾고, 종택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요즘에는 음식디미방을 통한 전통한식을 알리는데 많은 힘을 쏟으면서 고택과 유물 등을 관리하고 있다.

석계와 정부인 장계향은 당시로서는 장수연령인 83세와 85세에 돌아가셨다. 이는 이웃을 구휼하는 봉사의 삶때문이었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라고 한다. 영양 두들마을의 석계종가는 꼿꼿한 선비정신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문으로 기억될 만하다.

 

 

▲두들마을에 건립한 음식디미방 체험관. 영양군에서 전통음식의 전파를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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