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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남파고택]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에 앞장선 호남의 명문종가

남파고택은 호남지방 명문가중의 하나다. 집의 규모도 그러하려니와 이웃의 구휼과 독립운동에 힘쓴 일 등 집안의 내력 또한 그러하다. 특히 1884년부터 있었던 초당을 비롯해 안채와 사랑채 등이 일제 강점기에 순차적으로 개축돼 전통가옥의 변천과정도 알 수 있으며, 공간구성이나 건축기법도 뛰어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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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고택이 있는 나주 남내동은 남문안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남파고택은 나주의 성문안에 있던 몇 안되는 기와집중의 하나로, 이는 곧 집안의 위상과 부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작용한다. 또한 당시 궁중의 건축을 맡았던 대목수가 지은 집이어서 건축수법이 뛰어나고 집의 전체적인 구성도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앞에 조성된 정원. 당초 이 정원이 있던 자리에 안사랑채가 있었지만 옆으로 옮기고 정원을 조성했다.

 

 

남파때 7000석 규모의 부와 가문의 위상 갖춰

남파고택은 밀양 박씨 가문 청재공(淸齋公)파로, 나주의 종가로 내려오고 있다. 처음 나주에 입향한 이는 현 종손인 박경중(朴炅重)씨의 17대조인 박세부(朴世浮)이지만, 현재의 집터에 자리를 잡은 이는 6대조인 박승희(朴承禧)때부터라고 한다. 그가 현재 이 집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인 초당을 짓고 살았다.

 

남파(南坡)는 현 소유주의 4대조인 박재규(朴在珪)의 호이다. 이 집이 남파고택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집안의 위상이나 부를 축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실제로 박경중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집의 재산은 1860년대에는 400석 정도 하던 것이 6대조와 5대조를 거치면서 재산을 불렸고, 남파 또한 재산을 더욱 늘려 기록상으로만 4400석에 이르고, 소도 180두 정도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는 7000석 정도 되리라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남파 박재규는 1897년부터 궁내부(宮內府) 중목과(種牧課)의 주사(主事)를 지냈다. 궁내부는 왕실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이것이 인연이 돼 후일 집을 건축할 때에도 궁궐 건축을 담당했던 대목수에게 맡길 수 있었다. 궁내부 주사 이후에는 장흥군수와 곡성군수 등을 지냈다. 이때부터 이 집의 택호를 ‘박장흥댁’으로 불렀다고 한다.

 

 

▲안채 대청.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규모도 넓으려니와 창호에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대청을 통해 바라보는 정원의 풍치가 일품이다.

 

김광언 교수가 쓴 ‘박장흥댁’(2009년 간)이란 책에는 1903년 당시 나주군 서리가 관찰사에게 남파의 행적을 보고한 내용이 나와있다. 이에 따르면 가뭄때 이웃을 위해 250석의 쌀을 내놓은 것외에도 100여섬을 시가보다 싸게 시장에 풀어서 곡물유통에 도움을 주었다. 이같은 선행으로 인해 당시 금마면(지금의 영암군 금정면) 사람들이 이듬해 휼민비(恤民碑)를 세웠다.

 

 

▲안채 한쪽에 있는 양철집. 창고로 사용하는 이곳은 양철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 지붕과 벽을 양철로 만들었다.

 

남파의 아들인 박정업(朴正業)과 손자인 박준삼(朴準三)은 교육기관 설립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였다. ‘박장흥댁’의 기록에 따르면 박정업은 1922년 5월에 금명학원(錦明學院) 설립을 위해 나주 유지가운데 가장 많은 300원을 출연한 것으로 돼 있다.

 

박준삼은 1923년 당시 예수재림교에서 세운 야학원을 인수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과 노동자 및 농민들을 가르쳤다. 그는 또 해방이 되던 해 지역 유지와 함께 현재의 나주중학교의 전신인 민립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다시 야간학교를 세웠는데, 1963년 고등공민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아 20여년간 운영했다.

 

 

▲안채 작은 방쪽의 작은 누마루와 누마루를 오르는 작은 계단참. 이 집 안채는 부엌을 제외한 3면이 넓은 퇴로 이어진다. 작은 방의 함실을 이용한 누마루와 계단참은 실용성뿐 아니라 미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는 고급 건축수법을 보여준다.

 

이 집의 종손인 박경중씨와 종부인 강정숙(姜定淑) 여사와의 인연도 이때 만들어졌다. 조선대 식품영양학과를 나온 강정숙 여사는 어려운 학생들을 돕겠다는 뜻으로 일반교사보다 적은 봉급임에도 불구하고 이 학교를 택해서 왔고, 박경중씨는 당시 교장이던 할아버지 밑에서 교감을 맡고 있었다.

 

박정업은 꼼꼼했던 남파와 달리 너그럽고 동정심도 많았다. 또 성품이 섬세해 죽은 아내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자녀 여섯을 남긴 아내가 일찍 죽은데 대한 슬픔을 그렇게 달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 사업가에게 보증을 섰다가 상당부분의 재산을 날리고 중소지주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그 자신도 화병을 얻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바깥사랑채. 종손의 증조부가 거처했던 곳으로 각종 사진 등을 보관해두고 있다. 필요에 따라 판소리공연 등을 하기도 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독립운동도 활발

박경중씨의 조부인 박준삼은 청년운동과 독립운동 등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한 인물이다. 어릴 때에는 사숙(私塾)을 통해 한문공부를 했으며, 이후 서울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졸업후 영국 유학도 준비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집에 머물렀다.

 

그가 중앙학교 4학년때 3·1운동이 일어났다. 나이 22살이던 그 역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그 또래의 연배들이 유인물 등사도 하고 전단지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박준삼은 서울 종로서에서 50일 남짓 있었다고 한다. 자칫 옥고를 치를 뻔했으나 조부인 남파가 백방으로 손을 써 종로서에서 꺼내주었다.

 

 

▲바깥사랑채 뒤편의 아궁이 모습과 굴뚝

 

11월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계기가 된 광주학생독립운동도 남파집안에서 촉발됐다. 이 사건의 핵심인물들이 바로 남파집안 사람들이다. 주도자인 박준채(朴準埰)는 박준삼의 동생이고, 충돌의 발단이 된 여학생 박기옥(朴己玉)은 박준삼의 사촌누이이다.

 

박준채는 그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법정대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8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 집안은 구한말에도 의병활동을 했는데, 나주 의병에서 최고 대장으로 꼽혔던 박민수(朴敏洙)는 큰 집의 어른이다.

 

 

▲바깥사랑채 내부. 다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박준삼은 이외에도 반일단체인 신간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나주청년회와 유림사이에 일어난 충돌인 ‘유림각’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사지낼 때 축문을 한글로 짓기도 하는 등 한글을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가하면 6·25전쟁때는 인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인민위원장 이력 때문에 그는 해방후 요시찰 대상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반공 국시로 서슬퍼렇던 3공화국 시절 그를 요시찰 대상인물에서 완전삭제하겠다는 통보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만큼 집안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해온 점이나 이웃을 돌보고 교육에 열정을 보여준 점 등이 참작된 것일 터다.

 

 

▲남파고택의 전경. 나주시 남문 도심안에 자리잡고 있다.

 

 

호남지역에서는 가장 큰 안채 규모

남파고택은 모두 일곱채로 구성돼 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종손의 6대조가 건립한 초당을 비롯해 안채와 사랑채, 바깥사랑채, 아래채, 곳간, 문간채 등이다. 이중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초당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1884년에 건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후 1910년대에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1930년대에 바깥사랑채를 건립했다.

 

특히 이집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매우 큰 규모를 보여준다. 아마도 호남에 있는 전통한옥의 안채중에서는 가장 크지 않나싶다. 안채에서는 부엌쪽을 제외하고 3면을 넓은 퇴로 두르고 있으며, 창호에도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이런 형태는 웬만한 사대부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안채 대청도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매우 넓은 규모이다.

 

 

▲안채 부엌쪽에서 바라본 초당. 이 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 안채의 건넌방격에 해당하는 방은 자녀들이 결혼하면 신혼살림을 차려준 방이다. 동향을 하고 있어서 며느리들이 아침에 가장 먼저 눈을 뜰 수 있도록 배려한 배치이기도 하다. 이곳에도 넓은 퇴를 두고 뒤쪽으로는 작은 누마루를 만들었는데, 미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다. 안채 부엌도 매우 넓다. 부엌의 규모는 종가의 살림살이의 규모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안채 뒤쪽으로는 초당과 장독대가 자리잡고 있다. 초가로 지붕을 인 초당을 헐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마 집안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당옆에 있는 장독대도 옛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안채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있는데, 박경중씨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이곳이 사랑채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안채 앞의 경관이 가린다고 해서 이 건물을 옆으로 옮기고 그곳에 정원을 조성했다. 실제로 안채 뒤에서 창호를 통해 앞쪽의 정원을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다. 안채 옆으로 사랑채와 아래채가 나란히 서 있다.

 

 

▲안채 뒤편에 있는 돌확과 장독대. 이 돌확에는 금성산의 화기를 제압하려는 의도와 함께 실용적인 측면이 담겨 있다. 장독대는 처음 조성할 때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생활민구와 유물 등 잘 보존돼

안채 앞쪽으로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바깥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ㄱ’자 형태의 바깥사랑채는 현 종손의 증조부가 거처했던 곳으로, 지금은 각종 사진 등을 전시해두고 있다. 특히 이곳은 필요시에는 모든 공간을 틀 수 있도록 돼 있어 판소리 등의 국악공연을 열기도 한다는 게 박경중씨의 설명이다.

 

 

▲아래채 뒤쪽에서 외부로 통하는 일각문의 기둥장식도 격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이 바깥사랑채 앞부분은 넓은 정원이 조성돼 있었다고 한다. 현재 집앞에 종부가 운영하는 유치원이 있는데, 이 유치원이 정원이 있던 자리이다. 사랑채 정원은 고등공민학교를 지으면서 학교건물과 운동장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없어졌다. 물론 교육사업에 사용된 것이어서 어찌보면 더 훌륭한 일에 사용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장독대 옆에 김치 등을 저장해두기 위한 저장고를 따로 만들어두었다.

 

이집 안채의 뒤쪽 툇마루 앞에는 아주 큰 돌확이 있다. 이 돌확을 만든데는 사연이 있다. 이 집을 지은 후 남파의 손자들이 일찍 세상을 뜨는 변고가 발생했고, 이는 금성산의 화기 때문이라 생각한 남파가 큰 돌확으로 이를 제압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적인 측면도 있다. 이 돌확에 담기는 물을 보고 강수량을 가늠했고, 농사에 필요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 측우기 역할도 했다.

 

이 집에는 조상때부터 사용해오던 각종 생활민구나 유물이 고스란히 보존돼오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줄자에서부터 당시 공방을 만들어 사용했던 기구들도 그대로다. 심지어 처음 전기가 들어올 때 설치했던 전선도 그대로 남아 있다. 박경중씨는 이들 유물을 모아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을 건립할 생각을 갖고 있다.

 

 

▲넓은 규모의 안채 부엌. 종가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해준다.

 

남파집안이 명문가로 인정받는 것은 나라사랑과 이웃사랑 등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했기 때문이다. 안채나 사랑채 등의 상량에 ‘조선개국’으로 연도를 표기했는데, 이는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생각때문이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애환을 간직한 남파고택은 비단 외형뿐 아니라 그 정신에서도 우리네 선비의 기개를 품은 종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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