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한국의집 > 한국의 집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 김종직 종택]
위계와 격식 갖춘, 조선 사림파 태두의 종택

고령군 개실마을은 조선시대 사림파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점필재 종택은 거의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집은 화려하지 않지만, 학식이 높은 선비의 집답게 높은 기단위에 세운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와 중사랑채, 사당 등이 사대부가의 위계와 격식을 갖추고 서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사랑채 전경. 자연석 기단위에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점필재김종직(金宗直)의 종택이 있는 개실마을은 선산 김씨(善山 金氏, 옛 지명은 一善)의 집성촌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령군(高靈郡) 쌍림면(雙林面) 합가리(合伽里)에 속한다. 고령군은 옛 대가야국에 속한 지역으로, 지금도 당시의 역사유적이 많이 분포해 있는 곳이다. 고령읍에는 대가야역사박물관이 있고, 길 옆으로 커다란 왕릉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합가리는 당초 고령군 하동면에 속한 지역으로,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가동과 하가동을 합해 합가동으로 이름붙이고 쌍동면(雙洞面)에 편입했다. 이후 1930년에는 쌍동면과 임천면(林泉面)이 합쳐져 쌍림면이 됐다. 그리고 1988년 동이 리로 바뀌어 합가리로 불린다.

 


 2단계로 된 높은 기단위에 자리잡은 안채의 모습. 지금은 노 종부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중사랑이다.

 

개실이라는 마을이름에는 나름의 유래가 있다. 점필재의 5대 손인 남계(南溪) 김수휘(金受徽)가 1650년경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했는데,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으로 가곡(佳谷)이라 이름붙이고, 또 같은 뜻으로 ‘개화실(開花室)’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개화실이 음이 변해 개애실이 되고 이 마을이 아랫마을이라 해서 아릇개실, 하가(下伽), 또는 하가곡(下佳谷)으로 불렸다.

 

이 마을의 문화해설사인 이용호(李容鎬)씨의 설명에 따르면 실제 이 마을은 터가 좋고 아름답기로도 잘 알려진 마을이라고 한다. 마을의 앞산의 이름이 ‘화개산(花開山)’이고, 마을 뒤의 봉우리는 ‘접무봉(蝶舞峰)’이다. ‘나비가 춤춘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 들어온 남계는 국풍(國風)으로, 이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풍수가를 뜻한다.

 

또다른 일설에는 원래 옛 대가야국의 이름을 따서 가야곡(伽倻谷)이라고도 하는데, 그 음이 변해 가야실, 개애실로 되고, 다시 상가(上伽)와 하가를 합쳐 합가라는 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합가라는 이름에 붙은 ‘가(伽)’자가 가야라는 이름에 쓰는 한자임을 감안하면 가야라는 이름에서 따온 설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중사랑은 안마당을 등지고 서 있다. 아마도 내외의 구분을 두기 위함일 것이다.

 


 장서각인 서림각 쪽 일각문을 통해 안채와 안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성리학의 정통학맥 계승한 김종직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부친인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김숙자는 고려말의 충신이자 성리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부터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이어온 셈이다. 점필재가 사림파의 중심인물이 된 것도 이런 학통이 한몫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어릴 때부터 문필로 이름을 떨친 점필재는 성종(成宗)때 임금의 총애를 받아 예문관을 시작으로 외직인 군수와 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함양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는 목민관의 모습과 학행일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김굉필(金宏弼)이나 일두 정여창(鄭汝昌)같은 제자들도 이때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사후에는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숙종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다시 받았다.

 


 종택의 뒤쪽에서 바라본 개실마을의 모습. 점필재의 5대손이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했다.


그러나 점필재는 성종에 이어 임금에 오른 연산군때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까지 겪는 등 가문이 큰 어려움을 당했다. 무오사화의 빌미는 바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이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죽이고 왕이 된 일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난하는 것이라 하여 사화의 빌미가 된 것이다.

 


1 사랑채에 걸려 있는 ‘문충세가(文忠世家)’ 현판. 2 사랑채의 측면. 오른쪽으로 난 길은 사당으로 오르는 길이다.

 

사림파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이 일으킨 무오사화로 인해 신진사림파의 대부분은 죄인으로 몰려 참살되거나 유배형에 처해졌다. 점필재 일가가 당초 살고 있던 밀양을 떠난 것도 무오사화의 여파였다. 이후 합천, 야로 등을 옮겨다니다가 고령군 용담으로 이거했고, 후에 이곳으로 들어와 세거하게 된 것이다.

 

현재 개실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김병만(金炳滿)씨에 따르면, 이 마을에는 50여호에 80여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대부분 20촌 미만의 일가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라고 한다. 또한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사랑채 대청에서 본 모습. 솟을대문과 함께 앞산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종택의 위상

점필재 종택은 마을 전체의 한가운데쯤에 위치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ㅡ’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그 뒤쪽으로 높은 기단위에 안채가 자리잡았다. 안채 좌우로 중사랑과 고방채가 있다. 중사랑옆으로 오른쪽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이 배치돼 있다. 집의 공간이 위계에 의해 구성돼 있는 셈이다.

 

집을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랑채는 정면 5칸 규모로 높은 기단위에 집을 앉혀 사대부가로서의 품위를 나타내고자 했다. 안쪽에 툇마루를 둔 2칸 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전면이 개방된 2칸의 대청이 위치하고, 왼쪽으로는 1칸 방과 그뒤로 작은 부엌을 두었다. 기둥은 대청 가운데 기둥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기둥이다.

 


 도연재. 점필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의 유림들이 만든 강학공간 겸 재실이다.

 

안채는 2단계로 된 높은 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ㅡ’자형 정면 8칸의 큰 규모로 앉혔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쪽마루를 둔 큰 방과 부엌이 있고, 오른쪽에는 툇마루가 있는 작은 방과 골방을 들였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지붕형태다.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대개 팔작지붕인데 비해 이 집은 맞배지붕이라는 점이다. 

 

안채 앞으로는 중사랑이 안마당을 등지고 앉아 있다. 사랑채가 있는 왼쪽으로 마루를 두고, 오른쪽으로 툇마루가 있는 방이 연이어져 있다. 한쪽 방 뒤로는 광이 붙어 있다. 중사랑 건너편에 자리잡은 고방채는 2칸의 광을 중심으로 방앗간과 마굿간이 좌우에 있다. 오른쪽 산 기슭 가장 높은 곳에 점필재의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앞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집의 건축연대를 보면, 사랑채는 대청 상량문에 ‘숭정기원후사임신사월초(崇禎紀元後四壬申四月初)’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1812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문가들은 사랑채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점필재 종택과 100여m쯤 떨어진 마을 입구쪽에는 도연재(道淵齋)가 있다. 지방의 유림들이 점필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학공간 겸 제사를 모시던 재실공간이다. 고종 원년(1866년)에 건립했으며, 전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 집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우리나라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리학을 몸소 실천한 청백리로 꼽힌다. 특히 문재도 뛰어나 1200여수의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인간적으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후손들이 일군 개실마을을 통해 그의 학문과 선비정신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