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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조길방 가옥]
세상을 피해 은거한 사대부의 격식갖춘 초가

 

조길방 가옥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500m의 산간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초가다. 마을에서도 가장 오래된 집으로, 집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히 안채 안방에 나 있는 작은 창은 일반 민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초가의 전형적인 형태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 산간마을에 들어선 조길방 가옥의 안채 전경. 산을 등지고 선 전형적인 초가의 모습이다. 아래쪽에 사랑채와 아래채가 마주보고 서 있다.

 

 

1700년대 산간마을에 터 잡고 입향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일원은 청정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창댐이 건설되면서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오염을 일으킬 수 있는 축산물이나 작물재배가 금지돼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청정미나리’가 유명하다. 정대리에서 헐티재로 넘어가는 도로는 자연정취가 살아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곧잘 추천된다.

 

 

이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조길방 가옥’이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차 한 대가 지나다닐만한 작은 산길을 따라 굽이돌아가면 산속 깊은 곳에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싶을 만큼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다. ‘정대리(鼎垈里)’라는 마을이름도 세 개의 산봉우리가 솥발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본 가옥의 전경. 이렇게 높은 산간에 어떻게 마을을 만들었을까 싶을 만큼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처음에는 이 마을에 15호 정도의 집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여섯호 정도만 남아 있다. 조길방(趙吉芳) 가옥은 이들 집중에 가장 오래된 집이다.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조현기씨에 따르면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는 조씨의 10대조인 조광국(趙光國)이다.

 

문화재청의 자료에는 당초 대구 동촌비행장 인근에 살았으나, 집안에 가화(家禍)를 당해 총각의 몸으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현기씨의 설명은 이와 다소 다르다. 청송 안덕에 살다가 이리로 이사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현기씨도 입향조인 조광국의 고조부되는 동계공의 묘소가 대구 동화사 근처에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대구에 살았다는 것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그 옛날 자신이 정착해 은거할 이런 산골마을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들였을 공이 짐작된다. 마을에 서면 멀리 비슬산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터를 잡을 당시 풍수적인 측면도 고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마을 터를 두고 풍수를 잘 아는 스님들이 길지라고 평한다고 한다.

 

 

안채는 높은 축대위에 지었다. 안채 안방앞으로 작은 창호가 설치돼 있다. 이 창호는 채광과 함께 바깥 동정을 살피는데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안채 지붕도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고 하는데 한옥의 그윽한 맛이 없어진 듯해 아쉽다.

 

 

“싸리기둥에 칠기봇장으로 지은 집” 자랑

이 집은 산기슭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산 전체가 서향을 하고 있어서 집의 향이 자연스럽게 서향을 하게 된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안채가 서 있고, 아래쪽으로 사랑채와 아래채가 마주보고 서 있다. 사랑채 뒤로 건물이 또하나 있는데, 이는 헛간채다. 산속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초가로,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을 지은 연대와 관련해 문화재청의 기록에는 ‘조광국의 정착 당시인 1784년에 안채를 건립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안채 상량문에는 ‘성상재위9년갑신2월19일묘시견주미시상량(聖上在位九年甲辰二월十九日卯時堅柱未時上梁’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때의 성상재위는 정종때로 9년이면 바로 1784년이 된다.

 

 

안채 옆으로도 축대가 이어져 있고, 그 아래쪽에 아래채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상량의 날짜는 조광국의 생몰연대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역대인물표에 따르면 조광국은 1708년에 태어나 1776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이 집의 안채를 건립할 시기에는 이미 사후인 셈이다. 이같은 점을 감안하면 이 집의 안채는 조광국이 이곳에 정착한 후 그의 후손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 이 집에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은 채 조현기씨가 관리만 하고 있는데, 안채에는 안방에서 대청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받은 교지를 전시해 놓았다. 이 마을의 입향조인 조광국의 선대에서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벼슬을 지낸 이들의 교지가 나열돼 있는 것이다.

 

 

1 안채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 높이가 낮아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다. ‘백세청풍’이라고 쓴 가훈이 문옆에 붙어 있다. 2 사람이 살지 않아 안채 안방에 교지와 함께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

 

이 교지에 나타난 벼슬을 보면 조광국의 아들은 한성부 좌윤을 제수받는 등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내세울만한 벼슬을 한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그 부인들에게 내린 교지도 함께 걸어놓았다. 예전에는 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에 대해서는 부인에 대해서도 교지를 내렸다. 이는 아마도 이 집안이 이처럼 산골에 살고 있어도 양반가문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일 터다.

 

집의 전체적인 형태 양반가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높은 축대를 쌓고 안채를 앉힌 것이나, 일반 초가와는 다르게 안채에 넓은 대청을 둔 점, 두리기둥을 쓴 점 등이 그러하다. 또한 건축적으로도 조선후기 전통가옥에서도 찾기 어려운 오래된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등 특이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

조현기씨의 조부는 이 집의 안채를 두고 ‘싸리기둥에 칠기봇장 집’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즉 싸리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우고 칠기나무로 된 보를 얹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실제 싸리나무는 굵기가 가늘어서 기둥으로 쓰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불교의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는 ‘사리나무’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1 아래채는 방과 곳간, 방앗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곳간은 중간높이까지 칸막이를 쳐 두었다. 방앗간에는 초가에 이을 짚이 쌓여 있다. 2 아래채 뒤쪽에 붙어 있는 작은 공간이 화장실이다. 그야말로 ‘뒷간’인 셈이다. 3 초가의 지붕은 당초 억새로 이었지만, 억새를 구하기 어려워 지금은 짚으로 잇는다.

 

 

안채 안방 앞에 설치한 작은 창호

이 집의 안채는 이 집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규모도 가장 크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과 안방이 위치하고 오른쪽으로 건넌방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청의 가운데에 세운 기둥이 바로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두리기둥이다. 당시 두리기둥(圓柱)은 일반민가에서 쓰기 어려운 형태다. 기둥의 밑부분은 부식해 지금은 다른 나무로 이어서 받쳐놓았다.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으로 통하는 문들은 사람이 똑바로 서서 드나들기 어려울 정도로 낮아 고개를 숙여야 드나들 수 있다. 특히 안방 앞에는 작은 살창이 설치돼 있는데, 이 창호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아니다. 출입보다는 채광이나 통풍, 그리고 안방에서 집안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용도를 쓰인 듯하다.

 

건넌방에도 당초에는 안방과 같은 용도의 작은 창호가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바뀌었다. 조현기씨의 조부께서 벽의 일부가 내려앉아 이를 고칠 때 아예 창호의 크기를 늘렸다고 한다. 안채의 지붕도 예전에는 억새로 이었는데, 지금은 억새를 구하기 어려워 짚으로 잇는다.

 

조현기씨에 따르면 안채 지붕 처마의 길이도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고 한다. 비가 올 때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안채 기단밖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눈으로 어림잡아 보아도 기단보다 한참 안쪽에 떨어질 성싶다. 처마의 길이가 예전보다 훨씬 짧아진 것이다. 한옥의 그윽한 맛이 없어진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집 옆으로 배수로가 나 있다.

 

 

아래채 뒷부분에 둔 화장실도 특이한 구조

안채 아래에 자리잡은 사랑채는 2칸 방과 도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장이란 쌀이나 김치, 반찬 등을 저장해두는 장소를 말한다. 사랑채와 마주보고 서 있는 아래채는 가운데 방을 두고 곳간과 방앗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곳간은 중간쯤 높이까지 칸막이를 쳐 두었는데, 과거 뒤주로 쓰던 나무를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아래채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화장실이다. 대개의 경우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화장실을 별도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집에서는 아래채 뒷 부분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역시 일반가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이다.

 

 

사랑채의 뒷 부분. 사랑채는 방과 도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현기씨에 따르면 사랑채는 당초 대문채를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방 옆으로 대문채가 붙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기록에는 1925년경 사랑채를 확장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때 사랑채쪽에 대문채를 덧댄 것인지도 모른다. 아래채는 무너진 것을 1955년경에 다시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남부지방의 평면구성을 띄고 있다. 대체로 산간마을에 집을 지을 경우 추위를 막기 위해 겹집형식으로 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는 아마도 자신들이 원래 살던 집의 형태를 그대로 따랐던 때문이 아닌가싶다. 어쨌든 이 집은 산간마을에서 찾기 힘든, 격식을 갖춘 초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사랑채 뒤에는 헛간채가 있는데, 이는 지은지 오래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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