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주거공간을 선택할 때는 그 공간에서 벌어지게 될 노동의 형태를 생각해야 한다.
농촌에는 농부가, 어촌에는 어부가 필요한 법이다. 막연한 자연에 대한 동경 보다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가 주거지 선택의 첫 번째 요인이 되어야 한다.
서울 종로구 교남동에서 30년간 인쇄소를 경영하던 김대위 씨는 61세가 되던 해, 파주로 이사를 갔다. 지금이야 길도 뻥뻥 뚫리고 온갖 건물들이 들어선 신도시이지만, 당시는 겨우 자유로만 개통된 벌판이었다. 벌써 16, 7년 전의 이야기이다.
전라도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짓다 혈혈단신 올라와서 스무 살 언저리부터 인쇄 일을 배운 김 씨는 30살 무렵 결혼을 했다. 그리고 독립을 한 뒤 앞만 보고 인쇄기만 돌렸다. 그렇게 30년을 살면서 아들과 딸을 대학도 보내고 장가와 시집도 보냈고, 어느덧 환갑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김 씨는 가족들이 마련해준 환갑 식사자리에서, 느닷없이 낙향을 선언했다. 출가한 가족들은 물론, 함께 사는 김 씨 부인까지 금시초문 돌발 선언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정머리 없는 서울에서 하릴없이 죽치고 사느니, 죽기 전까지 개나 기르고 살겠다고 낙향 포부를 재차 밝힌 것이다.
부인 반대에도, ‘개 사랑’에서 시작된 시골생활
김 씨가 개를 좋아하는 것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개를 기르려고 아파트로 이사가지 않은 것에서부터 서너 마리 되는 개가 밤마다 울부짖어 민원이 경찰서에 무수하게 접수된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개 사랑은 과장을 좀 보태면 동네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 씨의 낙향 선언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개 사랑에서 시작된 시골생활이었다.
물론 부인은 반대였다. 아마 그 나이 또래의 다른 부인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겨우 십 수 년 전이었지만, 그때는 은퇴를 하더라도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는 일이 낯설게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끝까지 낙향을 거부했지만, 결국 무소심줄 같은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개가 좋으면 개랑 살지, 왜 나와 살 생각을 했느냐며 생떼를 부리던 부인도 결국 1주일에 한 번 구청 뜨개질 교실에 자동차로 모셔준다는 선에서 타협을 맺고 파주살이에 동참했다.
당시 파주에는 아파트는 고사하고 집다운 집조차 제대로 없던 터라, 농가 하나를 구해서 일삼아 수리를 시작했다. 김 씨는 본인이 직접 자재를 구해서 톱질에, 망치질을 했다. 딱히 할 일도 없는 부인도 집고치는 일에 동참을 했고, 그해 여름 서너 달 만에 대충 집다운 집을 꾸며놓고 그야말로 낙향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김 씨는 농사용 반, 개 농장용 반으로 쓸 토지도 구입했다. 당시 파주 땅값이 평당 몇 만 원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집을 팔아 내려간 돈으로 비교적 넉넉하게 토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김 씨의 낙향은 그렇게 연고 없는 파주에서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우선 유기견 15마리를 모아 꿈에 그리던 개 농장을 만들었다.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일산의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 사료로 썼다. 개가 짓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밭 한 가운데에다 온갖 종류의 개들을 모아놓고, 개 훈련도 시키고 우물물을 길어서 개 목욕도 시키면서 소일하기 시작했다.
밭은 워낙 넓어서 일부만 개간해서, 고구마와 배추, 상추, 고추 등을 심었다. 처음에는 욕심껏 농사를 짓겠다고 농기계도 빌리고 구입한 땅 전부에 씨도 뿌리고 농약도 쳤지만, 농사는 의욕만 가지고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개 사육 하는 일에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부부가 먹을 채소 몇 가지와 내다팔 수 있는 정도의 고구마 재배 정도로 농사일의 범위를 줄여나갔다.
그러는 사이, 부인도 차츰 농촌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자식들도 찾아오고, 주중에는 한, 두번씩 서울 근처로 나가서 외식도 하면서 점점 농촌 생활의 여유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부담도 없는 터라, 정말로 농사일이나 개 사육은 소일거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파주에 정착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았을 무렵, 대기업 중의 하나가 파주에 생산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부부의 농장도 흡수되었다. 인쇄일 30년 하면서도 못 만져본 거금을 오히려 돈을 생각하지 않고 찾아간 농촌에서 만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뒤로 지난 십 여 년 간, 부부에게는 많은 일이 생겨났다. 우선, 토지 보상금 일부로 파주 다른 지역에 더 넓은 면적의 농장을 마련했다. 개도 50여 마리로 늘었고, 종자 좋은 강아지들을 수십 만 원씩 받고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개 농장 옆으로 매년 몇백만원 수입을 올리는 고구마 밭도 일궜다.
김대위 씨는 개를 팔아서 개 사료를 사고 예방주사 맞히는데 돈이 전부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손해를 봤다면, 진작 접었을 일이다. 고구마 농사도 마찬가지이다. 절반은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선물로 보내고 남는 것을 농협을 통해 판매하지만, 그렇게라도 고구마를 팔아서 돈을 만들기는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주거지 옮길 때 ‘할 일’이 뭔지 따져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60대 중반부터 김 씨가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청경으로 근무하면서, 매달 180만원씩 수익을 올리고 있다.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일이라서 벅차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써주기만 하면 80세 까지라도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저렇게 김 씨는 한 달에 300만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개 사육 문제가 해결된 김 씨는 이제 파주에서 아파트 생활을 한다.
100세 시대를 맞아 주거지를 옮길 때에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주거환경의 위치나, 주거공간의 종류가 아니다. 주거지를 옮겨야만 하는 이유이다. 젊어서 못 살아본 환경에서 살아보겠다는 낭만적인 이유라면 한, 두번 민박을 통해서 아쉬움을 해소하면 된다. 일거리도 없는 낯선 지역에서 사는 것은 여생을 고행으로 만들 수도 있다.
농촌에는 농부가, 어촌에는 어부가 필요하다. 농사를 짓지 않고 물일도 하지 않으면서 농촌이나 어촌에 살 필요는 없다. 지역 주민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주거지를 옮길 때에는 반드시 앞으로 주로 할 일이 뭔지 따져야 한다.
이성민 KBS 아나운서. 사랑의 가족(KBS 1TV), 생방송 토요일, 일요일 아침입니다(KBS 1라디오), 경제를 배웁시다(KBS 한민족)를 진행 중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일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백석예술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특히 노인문제를 포함해서, 미래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펼치고 있다. 100세 시대 다시 청춘, 대통령의 설득법,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가지 설득력, 반기문 대망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매일 2시간씩 걸어서 출근할 정도로 걷기를 좋아하고, 책읽기, 영화보기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