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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미경의 펜화]
응답하라, 추억의 장소 ‘구멍가게’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구멍가게만 600여 점을 그린 작가가 있다.

아날로그 시대를 대표하는 구멍가게의 정서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남기고 싶다는 이미경 작가가 바로 그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작품제공 이미경의 그림이야기(www.leemk.com)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봄날가게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구멍가게는 사람 사이의 흥정과 소통이 있던 공간

구,멍,가,게. 네 글자를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포근한 미소가 번지는 그런 단어지만 어느새 잊혀져가는 추억의 명사기도 하다. 작가 이미경(47)이 판화지 위에 섬세한 펜촉으로 되살려 놓은 ‘구멍가게’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장소와 소품을 둘러싼 옛 기억들이 엿가락처럼 뽑아져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작업실을 두고 활동 중인 이미경 작가. 대량생산과 소비의 물결에 휩싸인 오늘날, 구멍가게는 우리가 반드시 돌아봐야 할 장소라고 말한다.

 

구멍가게는 70~80년대를 살아온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해도 무방하다.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어른들의 사랑방이었고, 주민들의 소식통이 되어주는 소통의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마을의 구멍가게 앞에는 이정표 같은 나무 한그루가 심겨졌고 너른 평상이 놓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집주인과 안면을 트면 ‘외상’ 거래도 할 수 있던 인정머리가 통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문화마트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이렇게 구멍가게는 동네 혹은 골목길의 터주 대감으로 자리하며, 작가의 표현대로 ‘철저한 소비자 중심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구멍가게는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서 과거로 들어가는 문, 코드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그림을 통해서 단순히 ‘엄마는 이랬어’가 아니라, ‘엄마시절엔 이런 흥정과 소통이 있는 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무엇을 했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싶었어요.”

 

 

행복슈퍼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작가는 점차 사라져가는 구멍가게의 기억을 되살려 남기고 회자시키고 싶은 열망으로 펜촉을 들었다며, “넘쳐나는 물량과 덤핑 공세가 수많은 부자병을 양산하는 디지털시대에서 조금씩 팔고 조금의 행복을 얻는 구멍가게를 찾아 숨 고를 여유를 찾아보자”고 말한다.

 

 

석치상회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구멍가게 600여 점 그려, 기록 멈추지 않을 것

이미경 작가가 구멍가게를 처음 그린 것은 1998년이다. “IMF로 사정이 어려워져 경기도 퇴촌의 시골마을에 들어가 살게 됐어요. 거기서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가 전부였죠. 마실 나가듯이 하루도 빠짐없이 들랑거렸는데, 어느 날 이곳을 그려야겠다, 남겨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더군요.”

 

 

만추상회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그렇게 시작한 ‘구멍가게’ 그림 작업이 줄곧 이어져 어느덧 19년 차를 맞았다. 그간 그린 구멍가게 작품만 헤아려도 600여 점. 첫 전시는 2007년, 열다섯 점의 구멍가게 작품이 완성된 시점에 열었다. 당시 전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펜촉 하나만으로 화폭을 풍성하게 채운 그녀의 작품들은 구멍가게의 오래된 느낌과 친근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시만 해도 펜화는 선을 표현하는 드로잉의 영역에 머물러있던 터라, 작가가 선보인 회화풍 펜화는 새로움을 선사하고도 남았다. 이후 줄곧 그녀에겐 ‘구멍가게 작가’라는 타이틀이 따라 붙었다.

 

 

엄마의 보물상자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누구는 그러죠. 왜 그렇게 힘들게 그림을 그리고 있냐고요. 가느다란 펜촉에 일일이 물감을 찍어서 선을 긋고, 그 선으로 면을 채우는 작업은 엄청난 시간을 요구하니까요. 하지만 펜촉으로 날카로운 선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빛바랜 구멍가게의 색감을 기품있게 표현할 수 있었기에 작업량과 작업속도는 무의미했어요.”

 

작업실에서 목격한 촉이 닳은 수많은 펜들은 그녀가 쌓아온 시간의 켜를 증명하고 있다. 중노동에 가까운 작업이지만 그림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작가에겐 힐링의 시간으로 보상되기에, 앞으로도 그녀는 펜을 고수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사랑 with a pen, use the acrylic ink on paper 2015

 

“2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숱한 구멍가게들이 폐허가 되거나 사라졌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찾아다니고 기록하고 있어요. 지난 6개월간 꼬박 작업실에 갇혀 있느라 몸이 근질근질하네요. 3월에는 통영에 머물며 구멍가게를 찾아 나설 계획이에요.”

 

작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통인옥션갤러리(서울 인사동 소재)에서 그간의 작업을 한 자리에 모으고 앞으로의 작업을 귀띔하는 개인전을 열었다. 구멍가게와 함께 유년 시절 기억들을 그린 소꿉장난 작품 몇 점과 더불어, 이불 속에 묻어둔 공기밥, 헤진 옷가지를 곱게 기워줄 엄마의 반짇고리, 사랑으로 덮어둔 밥상보를 그렸다. 모두가 유년시절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

 

 

1 펜촉에 아크릴물감을 찍어서 일일이 선을 긋는다. 두툼하게 제작한 판화지 위에 쌓인 선들은 오래되어 풍성해진 시간의 켜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2 작가는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멍가게를 찾고 기록한다. 사진 기록물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3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까지 무수히 많은 펜질이 필요하다.

 

“제천 시골마을에서 자라고 도시에서 유학을 하면서 잠시 잊었던 뿌리 깊은 정서를 다시 찾은 기분이에요. 앞으로도 다방이나 미용실처럼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아날로그적인 소통의 장소들을 찾아서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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