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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100세 주택 ③]
주거공간의 선택은 성격을 바꾼다

100세 시대를 맞아, 50세 이후에 거처를 선택하는 것은 생활의 편리 문제가 아니라,

나머지 인생의 생활 특성을 고르는 일이다. 따라서, 살기로 한 곳에 어울릴 성격을 가졌거나,

변할 뜻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20년 전, 원주 방송국에 근무할 때에 방송 출연자로 만난 김석문 씨가 가끔 생각이 난다. 김석문 씨는 의사의 오진 하나로, 직업은 물론 성격까지 바뀐 사람이었다. 솔직히 김석문이라는 이름도 정확히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만큼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이제는 어렴풋한 그 사람의 이야기만 기억에 남은 사람이다.

 

지역 농업 전문가로 방송에 출연했던 김석문 씨는 농업은 부업이고, 주업은 숙박업이라고 했다. 모텔을 열어놨는데 손님이 없어서, 특용작물 재배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재배작물은 산수유였는데, 소득은 당시 대기업 임원 수준이라고 했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김석문 씨와 차를 한잔 하게 되었다. “농업으로 성공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하시다”고 덕담을 건넸더니, “아내의 오진이 직업을 바꾸었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연고도 없는 원주에 정착한 전말기를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내의 ‘암 선고’에 사표 내고 원주로 낙향

김석문 씨는 중앙 일간지의 부장으로 지내던 중에, 갑자기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기 신체검사를 받다가 이상소견이 발생되어, 정밀 검사를 했더니 암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암의 진행 단계가 치료나 수술이 불가능한 말기 상태였다는 것이었다.

 

김석문 씨는 고심 끝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사랑하는 아내의 마지막 길에 동행했다. 아내와 헤어지는 것이 서러워서, 아내가 죽기 전까지 남은 시간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아내는 사직을 만류했지만, 김석문 씨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퇴직 이후, 김석문 씨는 아내와 함께 하기로 했던 계획들을 하나씩 실천했다. 아내와 해외여행도 다녀왔고, 친척과 지인들도 만나서 여한 없이 회포도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등산도 다니고 배드민턴도 치면서 하루하루 애틋한 시간을 보냈다. 자녀들은 이미 대학에 다 진학한 형편이었으니 달리 부담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외람된 표현이지만, 아내가 돌아가시지 않았다. 6개월이면 죽을 것이라던 아내가 1년이 지났는데도 건강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결국 김석문 씨는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연고도 없는 원주에 터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원주에 내려온 것도 우연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알고 지냈던 지방지 기자 후배 때문이었다.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후배에게, 김석문 씨는 지나가는 말로 아내의 발병과 낙향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며칠 뒤 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치악산 근처에 모텔 매물이 나왔는데 구매할 생각이 없느냐 것이었다.

 

일단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도 남을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게다가 전업으로 농사를 지어도 충분할 만큼 넓은 밭에 수십 그루 산수유까지 덤으로 딸려 있었다. 주말에만 겨우 손님을 받을 정도로 인적이 뜸한 곳이었지만, 지방에서 생활하면 생활비가 적게 들 것 같았다. 따로 벌이가 없던 김석문 씨는 낙향을 결정했다. 그래서 그 길로 휘뚜루마뚜루 계약을 하고, 아내와 함께 원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원주생활에 거처를 잡고 또다시 1년여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무렵, 아내의 건강 상태가 호전된 기분이 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망설이다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재검진을 했는데, 아내에게서 아예 암 진단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통해 완치가 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오진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여튼 아내의 몸에서는 암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감사해야 할 상황인데도,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의사가 오진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자꾸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다보니, 오히려 아내와 부부싸움도 잦아지고, 잘나가는 신문사 부장을 그만두고 모텔 주인을 하게 된 상황이 한없이 황당하게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거처 바꾸니 어느덧 농사꾼이 된 남편

그렇게 또다시 1년여를 허비하다가, 김석문 씨가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것이 산수유 농사였다.

낙향했을 때에는 꽃이 피든 말든 눈여겨보지 않았던 산수유였는데, 농사 지을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는 산수유가 돈벌이가 되는 것이 신기해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서너 해를 보냈더니 소득도 조금씩 오르고, 모텔에도 한두 명씩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석문 씨는 본격적으로 농부가 된 것이다.

 

원래 농사를 짓던 분인 줄 알았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것인지, 김석문 씨는 여러 차례 신문기자 시절 이야기를 들먹였다. 그렇지만 내 눈에 김석문 씨는 농사일이 익숙한 농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얼굴이 검게 그을릴 정도로 농사일에 익숙해진 데에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아 생계를 잇고 있는 까닭이었다.

 

김석문 씨 스스로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농촌에 살면서 농사를 짓다보니, 기자 시절의 성격 대신 점점 농사꾼 기질이 발전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창문을 열고 날씨를 확인하게 되고, 틈만 나면 밭에 나가 풀을 뽑고 물을 대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농사짓는 농부는 농부처럼 생활하고, 기삿거리 찾는 기자는 기자처럼 활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농사짓는 김석문 씨가 기자생활을 하던 때처럼 두 눈에 불을 켜고 이곳저곳을 쏘다닐 필요는 전혀 없었다.

 

가끔씩 김석문 씨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그는 이제 기자 생활보다 더 긴 농사 경력을 가진 진짜 농부가 되었을 것이다. 농부가 될 생각으로 농촌에 정착한 것은 아니지만, 농촌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농부가 된 것이었다.

거처를 옮기려는 사람들에게 김석문 씨의 사례가 참고가 될 것 같다. 거처를 바꾸면, 생활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생활 방식의 변화는 성격을 바꾼다. 농촌에 살면 농부, 어촌에 살면 어부, 도시에 살면 백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2000년 전 맹자 어머니가 터득한 ‘맹모삼천지교’라는 교육 원리이다. 100세 시대를 맞아, 50세 이후에 거처를 선택하는 것은 생활의 편리 문제가 아니라, 나머지 인생의 생활 특성을 고르는 일이다. 50년 여생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데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는 말처럼 주변 환경에 따라 당신도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편하고, 농어촌이 불편하다는 말이 아니다. 살기로 한 곳에 어울릴 성격을 가졌거나, 변할 뜻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성민

KBS 아나운서. 사랑의 가족(KBS 1TV), 생방송 토요일, 일요일 아침입니다(KBS 1라디오), 경제를 배웁시다(KBS 한민족)를 진행 중이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일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백석예술대학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특히 노인문제를 포함해서, 미래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저술과 강연을 펼치고 있다. 100세 시대 다시 청춘, 대통령의 설득법,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가지 설득력, 반기문 대망론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매일 2시간씩 걸어서 출근할 정도로 걷기를 좋아하고, 책읽기, 영화보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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