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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상주시 수암종택]
‘삼산이수’의 명당터에 자리잡은 청백리 가문의 종가

수암종택은 풍산 류씨 우천파의 종가다. 집의 구성은 정침과 녹사청, 사당으로 이루어져 단출하고 소박하지만, 사대부가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는 집이다. 삼산과 이수가 모이는 길지에 자리잡아 명현과 청백리를 배출한 집안으로서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검소한 선비가문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집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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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 밑에 있는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 충청도·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는 부유한 자가 많고 또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다.’

 

▲종택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표지석이 서 있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나온 상주(尙州) 관련 기록이다. 택리지에는 또 상주의 다른 이름이 ‘낙양(洛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남지역을 흐르는 낙동강(洛東江)도 ‘낙양의 동쪽’ 곧 ‘상주의 동쪽을 의미한다. 지금은 남북도로 나뉘어 있지만, 예전에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좌도와 우도로 나뉘었다.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도 경주(慶州)와 상주에서 따온 말이다.

 

종택의 건너편 한쪽 기슭에 집안의 묘소가 마련돼 있다.  

 

 

학자와 정승 배출한 수암종가의 집안 사람들

택리지에서는 상주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꼽고 있다. 우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 이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창석은 월간(月澗) 이전의 동생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수암종택(修巖宗宅)은 이들 집안에 결코 뒤지지 않은 가문으로 꼽힌다. 수암은 서애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류진(柳袗)의 호다. 그가 분가를 하면서 상주시로 이거해 풍산 류씨 우천파(愚川派)의 입향조가 됐다. 종택이 자리잡은 우물리(于勿里)는 상주시의 연혁과 지명유래에 따르면 처음 지명이 ‘우천’이었다고 한다.

 

녹사청. 녹봉을 가지고 오는 지방관리들이 묵던 곳으로, 집안에 둔 점이 특이하다.

 

수암은 22세에 향시(鄕試), 29세에 증광진사시(增廣進士試)에 각각 장원으로 합격했다. 31세때 김직재 등이 모반한 해서무옥(海西誣獄)에 연루된 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인조가 즉위한 후 비로소 벼슬에 나선 그는 봉화현감을 시작으로 형조정랑, 예천군수,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문중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지조가 높고 심성이 깨끗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면 집안이 썰렁해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였지만, 안빈자락(安貧自樂)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효종때 이조참판으로 증직됐으며, 1662년에는 사림의 추천에 의해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했다. 그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류진에 이어 그의 후손들에서도 뛰어난 인물이 적지 않게 나왔다. 수암의 아들인 어은(漁隱) 류천지(柳千之)를 비롯해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坡) 류후조(柳厚祚), 류교조(柳敎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차산(此山) 류인목(柳寅睦), 해사(海史) 류도석(柳道奭) 등이다.

 

후손들중 류광억과 류후조는 대과급제한 인물이다. 특히 낙파 류후조는 4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성균관에 들어갔고,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와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이후 전라도 장수현감에 제수돼 선정을 베풀기도 했다. 한동안 벼슬을 그만두고 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부임, 향약을 제정, 시행했다.

 

사당. 불천위인 수암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대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61세 되던 해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해 다시 벼슬을 시작한 점이다. 이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시작으로 우승지, 형조참판, 대사간, 호군, 한성좌윤, 이조참판, 대사헌, 공조판서 등의 높은 관직을 거친 후 좌의정에 올랐다.

 

그가 이처럼 높은 벼슬에까지 이른 것은 그의 학문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기 전 부친인 강고 류심춘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강고는 당대의 학자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벼슬은 주로 현감 등 외직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등의 일을 맡았으며, 그에게 학문을 배운 제자들이 많았다.

 

경사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종택의 지붕선이 뒷산의 소나무와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낙파의 아들인 계당 류주목은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학문에만 정진했던 인물이다. 나라에서 몇차례 벼슬이 내려졌지만, 한번도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조부인 강고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300명이 넘는 문하생을 두었다. 또한 문집외에도 예학을 집대성한 ‘전례류집(全禮類輯)’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들 외에도 일제때 독립운동에 헌신해 서훈을 받은 류우국(柳佑國)과 류원우(柳元佑) 등이 있다.

 

사랑채 전경. 사랑방 위에 ‘우천세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왼쪽에 보이는 초가는 마굿간이다.

 

 

정남향으로 앉히지 못한 건축당시의 일화

수암이 상주에 들어와 먼저 터를 잡은 곳은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인근 가사리(佳士里)였다. 가사리에 터를 잡고 초가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류기우(柳淇佑)씨의 설명에 따르면 집은 후대에 지었지만, 집터는 수암선생이 직접 잡아 두었다고 한다. 집터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집터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터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삼산은 태백산과 일월산, 팔공산 등 3개 산의 끝자락이 만나는 곳이자, 낙동강과 위천(渭川)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이곳이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매화가 떨어지면 향기를 내뿜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 사랑방의 창호. 사랑마루와 연결된 이 창호의 가운데 별도의 작은 창을 마련한 점은 여느 가옥에서 볼 수 없다. 2 사랑방에 있는 작은 벽장. 대체로 서고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벽장 오른쪽은 사랑방 다락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집에도 안채나 사랑채 모두 수납공간을 많이 두고 있다.

 

문중에서 펴낸 ‘우천사백년(愚川四百年)’의 기록에 따르면 수암의 현손인 류성로(柳聖魯)때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돼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초가였던 것을 현재 모습의 종택으로 고쳐 지은 것은 그 이후인 낙파때였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때의 일화도 있다. 류성로가 집을 짓던중 집이 두 번 무너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으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네 고집에 내가 졌다’고 말하면서 ‘대신 정남향으로 짓지 말고 약간 비껴 지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 집의 향이 정남향이 아닌 약간 동남향의 방향을 잡고 앉은 것도 그때문이라는 것이다.

 

안채 건넌방 아래쪽의 마루공간. 집안 부녀자들의 활동공간이자 사랑채 공간과의 구획공간이기도 하다. 건넌방 위에 ‘이강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강’은 선조의 호를 딴 것이다.

 

수암종택은 집앞의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낮은 야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집 뒤에 있는 야산은 일월산의 줄기가 이어져 오는 곳이다. 대문에서부터 맨 뒤쪽의 사당에 이르기까지 건물이 경사지형에 따라 배치돼 있다. 강 건너편으로는 선비가 당나귀를 타고 오는 모양의 나각산(螺角山)이 자리잡고 있다.

 

집의 구조는 비교적 단출하고 소박하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먼저 왼쪽에 서 있는 녹사청(祿事廳)이라는 건물을 만나게 된다. ‘ㄴ’자형으로 낮게 서 있는 녹사청은 낙파가 은퇴한 후 녹봉을 관리하는 녹사가 기거하면서 봉조하의 녹봉을 가지고 오는 지방관리들을 묵게 했던 곳이라고 한다. 녹사청은 집밖에 짓는 것이 보통인데, 집안에 둔 점이 특이하다.

 

안채 중문의 내외벽. 사랑채쪽으로 아궁이를 두었다.

 

 

청빈한 삶 보여주는 ‘곳간이 없는 집’

정침은 녹사청보다 높은 곳에 기단을 쌓고 ‘ㅁ’자 형태로 앉혔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사랑채로 사랑방과 마루로 구성돼 있다. 앞으로는 모두 퇴를 둘렀고, 대청앞에 분합문을 만들었다. 특히 사랑방에서 마루로 통하는 문에 별도의 작은 문을 만들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여느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창호형태로 실용적인 구조인 듯하다.

 

사랑채 왼쪽으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가에서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할 때 중문에 내외벽을 두는데, 이집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이 집의 경우 전체적인 집의 크기에 비해 내외벽의 규모가 여느 집보다 큰 편이다. 중문간채의 오른쪽에는 사랑방을 위한 아궁이가 놓여 있다.

 

안채 전경. 이 집은 소박하지만 학문과 높은 벼슬을 지낸 선비가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규모로 대청과 안방, 건넌방,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건넌방 아랫쪽에 공간을 터놓은 마루방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 공간은 집안 여인들의 작업활동공간이자, 사랑채와의 구획공간이기도 하다. 즉 이 마루방 아래쪽은 사랑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안채에서 사랑채로 연결된 퇴는 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채 왼쪽으로는 안방에서 부엌으로 이어진다. 부엌 아래쪽으로는 고방이 이어진다. 그런데 원래 이 부엌 바로옆 고방 밑으로 저장고가 있어서 부엌에서 계단을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부엌을 개조하면서 이 저장고를 폐쇄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밖으로 난 광창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 안채 부엌 아래쪽의 고방. 밑부분에 광창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저장고로 사용됐던 곳이다. 2 안채 뒤쪽의 굴뚝

 

안채 뒤쪽으로는 사당이 있다. 입향조인 수암을 모시는 사당이다. 수암은 불천위로 모시고 있으며, 1년에 3번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 사당의 문은 대개 판장문이 일반적인데, 수암종택의 경우 일반적인 가옥의 문양을 띤 창호로 만든 점이 눈길을 끈다.

 

사랑채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면 멀리 낙동강을 비롯한 건너편 나각산까지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동강 앞으로 작은 들이 끝나는 지점에 소나무 한그루가 외로이 서 있다. 풍수상 지기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소나무를 많이 심어놓았지만,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안채 뒤쪽에 있는 자연석. 거북 모양의 바위로 집을 지을때부터 있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이 집에는 몇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먼저 안채 뒤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다. 이 바위는 원래부터 있던 자연석으로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때도 다른 기둥의 주춧돌은 모두 별도로 만들어 썼지만, 안채 한가운데의 기둥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썼다.

 

또하나는 이 집에 곳간이 없다는 점이다. 안채 옆으로 방앗간과 마구간은 있지만, 곳간이 없는 것은 그만큼 이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청빈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낙파의 경우에는 정승까지 지냈음에도 청백리로 일컬음을 받기도 했거니와 그 외에도 모두 안빈낙도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집을 둘러보는 내내 시끄러운 비행기소리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이곳 인근에 공군사격장이 있어 수시로 비행기가 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얼마전 이지역 땅을 국방부에서 수용했는데, 유독 이 집만은 제외됐다. 이건을 하는데 필요한 비용 때문이다. 지켜야 할 필요한 문화재라는 점에서 정부 차원의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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