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피플&컬처 > 컬처
[일본 관서지방 기행 ②고베·교토·오사카]
일본의 전통과 현대를 만나다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에는 ‘금각사’와 ‘청수사’가 있다. 그리고 옛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거리들이 있다. 오사카에는 토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오사카 성이 있다. 오사카의 중심거리인 도톤보리 일대에는 예전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건설한 운하와 다리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취재 권혁거 사진 신정철((주)건축사사무소AD 그룹 대표건축사)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효고현립 미술관. 바다로 향한 모습이다.

 

 

효고현립 미술관과 타카토리 교회

다음 행선지는 고베(神戶) 시다. 효고현의 현청 소재지인 고베 시는 1995년 대지진을 겪었지만, 지금은 훌륭하게 복구돼 새로운 도시로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일본 제2의 공업지역인 게이한신공업지역의 중심도시로 오사카에서도 전철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위성도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큰 도시여서인지 이곳에서는 아파트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고베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효고현립 미술관이다. 역시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늘 빛과 물, 바람 등 자연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미술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술관 뒤쪽으로는 계단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가 바로 미술관의 한 부분이 된다. 이름하여 ‘물의 광장’이다.

 

 

미술관 내부. 안도는 유리나 천장을 통해 빛을 끌이들이는 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미술관 건물 또한 안도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노출콘크리트와 유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모양도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들이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다. 건물 사이사이를 비워두어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만들었으며, 유리 벽면이나 천장을 통해 외부의 빛이 내부로 흘러내린다.

 

효고현립 미술관도 다음 행선지 탓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겉핥기 식으로 둘러본 후 이번에는 고베 외곽에 위치한 타카도리(鷹取) 교회를 찾았다.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坂茂)이 고베 대지진으로 불타 없어진 건물을 단 5주만에 종이파이프로 된 기둥을 이용해 다시 만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희망을 심어준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타카토리 교회 외관

 

시게루 반은 비단 교회뿐 아니라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종이 숙소를 만든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유엔과 협력해 지진 등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세계의 여러 곳을 돌면서 값싸고 빠른 시간안에 지을 수 있는 임시숙소를 여러차례 건축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2014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외에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건축계 최고의 상을 수상한 것이다.

 

종이로 만든 건물은 해체해 다른 용도로 재사용하기에도 쉽다고 한다. 타카토리 교회 또한 주요 기둥 부위만 남기고 2005년 해체해 대만의 다른 교회를 짓는데 사용했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도 연관돼 있는 듯 마당에 서 있는 예수상에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한글문구가 새겨져 있고, 교회안에 걸린 현수막에도 한글이 적혀 있다.

 

 

고베항의 야경. 지진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메모리얼 타워가 있다.

 

이날 숙소는 고베항 여객터미널 위에 들어선 호텔이다. 크루즈가 들어오는 고베항의 터미널위에 호텔을 세운 점이 눈길을 끈다. 호텔을 비롯해 고베항의 야경이 아름답다. 고베항에는 고베지진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메모리얼 타워가 서 있다.

 

빛과 물 등 자연적 요소를 끌어들인 안도의 ‘명화의 정원’

다음날은 고베의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고속도로를 달려 교토(京都)로 이동한다. 교토는 지금의 도쿄(東京)가 수도가 되기 전 1000년 이상 일본의 황궁이 있던 수도였다. 지금은 오사카 및 고베 등과 함께 게이한신 공업지대의 중심도시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일본의 전통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문화관광도시이기도 하다.

 

 

교토시내를 흐르는 강의 풍경이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강변으로 일본의 전통가옥들이 몇몇 눈에 띈다.

 

교토의 첫 인상은 아주 깨끗한 도시의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나지막한 가운데 전통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멀리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보이고, 거리마다에는 일본의 전통가옥들이 스쳐간다. 우리나라 신라의 옛 고도인 경주를 찾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안도가 설계한 ‘명화의 정원’

 

교토시내를 흐르는 강의 풍경이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강변으로 일본의 전통가옥들이 몇몇 눈에 띈다

교토에서 가장 먼저 들린 곳도 안도의 작품이다. 이름하여 ‘명화의 정원’이다. 말 그대로 명화가 있는 건축이다. 이곳은 안도의 초기작품으로 그의 건축적 특성이 잘 반영돼 있다.

 

물과 기하학적 선, 그리고 그림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작품이다. 한 팻말이 눈길을 끈다. ‘Watch your life’.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한 명화앞에서 자신을 찾아보라는 얘기다.

 

 

연못위에 떠 있는 듯한 금각사의 모습. 2층과 3층 누각을 금으로 입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금각사’와 ‘청수사’

오랜만에 일본의 전통음식인 초밥과 우동으로 점심을 먹은 후 이동한 곳은 금각사(金閣寺)다. 최근 어느 유명 소설가의 표절시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해진 절로, 일본 극우작가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작품이름이기도 하다. 절의 원래이름은 녹원사(鹿苑寺)지만 절의 2층과 3층 누각을 금으로 입혔다 해서 금각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금각사 입구

 

이곳은 원래 바쿠후 시대의 한 쇼군의 별장이었던 곳이다. 쇼군이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절이 되었다. 이 절은 전쟁의 와중에서 여러차례 불에 탔는데, 특히 1950년 한 수도승의 방화로 절이 또다시 불에 타게 돼 지금의 절은 1955년에 다시 건축됐다. 이때의 방화가 소설 금각사의 소재가 됐으며,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금각사 내부. 금각사는 원래 쇼군의 별장이었던 것을 그의 사후 절로 바꾼 것이다.

 

금각사는 커다란 입구를 통과해 본채로 들어오게 돼 있는데, 넓은 연못위에 서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특히 우리가 금각사를 방문했을 때 물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절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절 주변으로는 정원과 함께 부속채들이 있다. 그러나 기실 금빛으로 빛나는 금각사를 제외하고 나면 크게 볼 것은 없는 절이다.

 

 

청수사 입구. 주황색의 건물이 눈길을 끈다.

 

금각사를 보고난 후 향한 곳은 청수사(淸水寺)다. 금각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교토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꼽히는 절이다. 나라(奈良)에서 온 승려 엔친(延鎭)이 778년 세운 청수사의 원래 이름은 키타카논지(北觀音寺)였던 것이 이곳에 내려오는 물이 하도 맑아 청수사란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특히 이 절은 ‘유식(唯識, 불교 화엄경의 중심사상)’을 근본으로 삼는 일본 법상종(法相宗)의 총본산인 청수사는 절의 창건설화도 갖고 있다. 어느날 이곳을 방문한 한 무사의 임신한 부인을 위해 엔친이 순산을 기원했고, 무사히 자식을 얻은 무사가 엔친에 깊이 귀의하면서 이 절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청수사는 절벽에 세운 절로도 유명하다. 돌출된 부분을 받치기 위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이 절은 절벽위에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즉 본당의 일부는 언덕에 기대고 있지만 일부는 언덕앞으로 돌출돼 있다. 본당 건물 밑에 많은 기둥을 세워 돌출된 부분을 지탱하도록 하고 있는데 마치 우리네 전통가옥의 누마루처럼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우리나라 전통가옥처럼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교토의 천년 넘은 전통거리 ‘니넨자카’와 ‘산넨자카’

절도 유명하지만, 절의 주변에 교토의 전통가옥이 들어선 옛 거리가 있어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바로 니넨자카(二年坂)와 산넨자카(三年坂)다. 원래의 이름은 각각 ‘二寧坂’과 ‘産寧坂’으로 부부의 안녕과 산모의 안녕을 기원하던 이름이었는데, 이곳 계단에서 넘어지면 ‘이년밖에 못산다’, ‘삼년밖에 못산다’는 전설이 생겨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청수사 아래쪽의 니넨자카와 산넨자카의 거리 모습. 이곳에는 일본의 전통기념품을 비롯해 갖가지 물건들을 판다.

 

‘자카(坂)’는 우리말로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각각의 거리 입구에는 길고 가파른 계단이 있다. 그러고보면 이런 전설도 계단을 걸을 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니넨자카가 807년, 산넨자카가 808년 조성됐다고 하니 1000년도 넘은 일본의 전통거리인 셈이다. 지금은 보존지구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서는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또 가게로 개조한 상점에서는 각종 기념품을 비롯해 갖가지 일본의 전통물건들을 판다. 과자 등 먹는 종류도 많다. 이들 물건들이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 기실 거리를 제대로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기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보고싶었던 곳이 교토였다. 교토는 일본 문화와 전통가옥의 정수를 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토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니넨자카와 산넨자카가 교토의 전통적 거리를 갖고 있지만, 제대로 모습을 보기 어려웠고, 다른 교토의 거리도 겉모습만 훑었을 뿐이다.

 

일본 전통가옥의 모습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대개 마당과 정원을 갖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의 마당은 거의 중정(中庭) 형태이다. 즉 집의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집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구라키시의 전통미관지구에서도 이같은 모습을 많이 봤던 터다.

 

 

교토에서 만난 주택들. 좁은 집에서도 정원을 만들거나 꽃을 심는다.

 

교토에서도 집에 들어가보지는 못했지만, 집집마다 대개 정원을 갖추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겉으로 보는 모습으로도 일본의 전통주택에서 정원의 중요성을 직감할 수 있다. 정원을 둘 수 없는 좁은 마당에서는 집밖 대문옆에 작은 화초들을 심어둔다. 작은 집에서도 정원과 차고를 함께 만든 집을 여럿 볼 수 있다. 일본의 소형주택으로 대표되는 효율적 공간이용이 정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교토는 간무천황이 중국의 장안을 본떠 만든 도시라고 한다. 도시 전체를 1200개 구역으로 나눠 건설한 계획도시이다. 그런만큼 철저한 도시계획에 의해 천황의 거처를 비롯한 정부의 건물과 시장 등이 들어섰다. 도로 또한 계획됐다. 그러나 도시가 건설된 이후 화재와 전란 등을 거치면서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그래도 도로는 아직도 옛 도시계획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반듯하고 깨끗한 골목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오사카 성. 원래 토요토미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크게 지은 성이었으나, 지금의 성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재건한 것이다.

 

 

토요토미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만든 ‘오사카성’

교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향한 곳은 오사카(大阪)다. 오사카 바다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호텔에서 묵은 후 다음날 아침 향한 곳은 오사카 성이다. 당초 일본을 대표하는 3대 성의 하나로 꼽혔지만, 지금은 당초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점이 아쉽다.

 

오사카 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성이다. 5층으로 이루어진 이 성은 외성을 두고 기와 등에는 금박을 입혀 크고 화려한 성으로 건설했다. 3중의 해자와 운하를 갖춘 대규모 성으로, ‘일본내에서도 이에 견줄만한 성은 없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토요토미가 성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천하를 통일하는데도 오사카 성은 큰 역할을 했다. 즉 토요토미가 자신의 성을 내세우며 ‘전쟁을 하지 않고 협력하면 걸맞는 예우를 해주겠다’고 다이묘들을 회유한 것이다. 다이묘들의 입장에서는 오사카 성의 크고 화려한 규모에 위압당해 토요토미의 제의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토요토미의 사후 이 성은 결국 도쿠가와에 의해 파괴된다. 도쿠가와가 에도막부 시대를 연후 오사카 성에서 도쿠가와와 대립하던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는 1615년 도쿠가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토요토미 가문은 멸문되고 오사카 성도 대부분 파괴돼 재만 남았다.

 

 

오사카 성을 둘러싼 해자는 아직도 오사카 성의 위용을 말해주는 듯하다. 당초 해자는 이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 의해 성이 재건된다. 그러나 이때의 성은 당초의 성이 있던 자리 전체에 흙을 돋우고 그위에 높은 석벽을 쌓아 토요토미 시대의 성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전체 성의 크기는 토요토미때보다 1/4 정도로 적었지만 천수는 오히려 토요토미 시대를 능가했다고 한다.

 

에도막부 시대 동안 쇼군의 통치아래 있던 오사카 성은 메이지유신때 신정부군과의 전란통에 다시한번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다. 메이지 정부는 성내에 군부대를 주둔시키고 병기공장을 건설하는 등 군 부지로 활용했다. 한때 군 부대 청사를 이전하고 천수각 등을 재건했으나 2차대전때 미군의 공습으로 남았던 건물마저 소실됐다.

 

지금의 천수각은 1931년 당시 오사카 시장인 세키 하지메(關一)가 복원한 것이며, 도쿠가와 가문의 성을 기반으로 철근콘크리트로 건설됐다. 천수각 4층까지는 도쿠가와 형식의 백색으로, 5층은 토요토미 형식의 흑색에 금박으로 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대폭 개수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오사카 성은 당시의 규모에는 못미치지만, 그래도 큰 해자가 남아 있고, 성벽도 일부 남아 있다. 특히 이 성벽은 커다란 돌로 만들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에도막부 시절 다이묘들에게 토목공사를 시켰기 때문에 그 돌을 가지고 온 다이묘들의 각인이 남아 있다. 성의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는 등 성의 본래 모습은 상당부분 훼손됐지만, 성의 규모나 위엄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우메다 공중정원을 올려다본 모습

 

 

백제인의 흔적이 남은 신사이바시와 도톤보리

다음 행선지는 ‘우메다(梅田) 공중정원’이다. 40층짜리 두 개의 건물 상층부를 연결한 스카이빌딩이다. 이 건물은 지은지 20년이 넘은 것으로, 35층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나머지 정상부까지는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한다. 공중정원으로 오르면 사방으로 오사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이 흘러 바다로 나가는 도시의 전망이 일품이다.

 

 

우메다 공중정원 빌딩 입구

 

건물의 지하에는 옛 쇼와(昭和)시대의 시장 거리를 재현해 놓았다. 쇼와는 쇼와 천황이 다스리던 시기의 연호로, 1926년 12월에서 1989년 1월까지를 말한다. 여기 재현된 것은 우리나라 강점기 시대에 해당한다. 당시의 우체국 모습이나 가게, 세탁소, 포스터 등의 모습이 재미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나라 강점기 시절임을 떠올리면 씁쓸하기도 하다.

 

 

공중정원에서 바라본 오사카 시의 모습

 

다음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오사카 중심지 신사이바시(心齋橋)와 도톤보리(道頓堀) 거리 일원이다. 서울로 치자면 청계천과 명동 일대쯤 되는 곳이다. 같은 중심 번화가라도 신사이바시는 명품상점과 백화점 등이 많은 고급상점 중심의 번화가라면 도톤보리는 서민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번화가이다.

 

오사카는 남북과 동서로 가로가 크게 구획돼 있다. 특히 이곳이 바다에 면한 지역이어서 개인상인들이 교역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잇는 운하를 많이 만들었다. 운하를 건너려면 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 곳에 다리를 건설했다. 이곳은 바로 운하를 통해 바다의 교역물이 바로 들어와 거래되던 시장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신사이바시와 도톤보리의 운하. 옛 오사카 상인들은 교역을 위해 운하를 많이 만들었다. 도톤보리라는 이름은 운하건설의 책임자였던 백제인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도톤보리 또한 도톤보리 강의 약어로, 여기서 말하는 강이란 운하를 일컫는다. 이 운하공사를 직접 지휘한 사람이 바로 나리야스 도톤(成安道頓)으로 백제인의 후손이다. 이 지역의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일본 오사카의 중심지에서 옛 백제인의 흔적을 보니 반갑다. 오사카에 한국인이 많이 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톤보리로 들어가는 큰 길 입구에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서면서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이곳에는 없는게 없다고 할 만큼 많은 물건들을 팔고 있다. 층마다 다른 물건을 진열해 놓은 백화점식 가게에서부터 의약품 등만을 파는 전문상점, 각종 간식을 파는 노점상까지 다양한 가게가 갖춰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호두과자 비슷한 타코야키가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곳이라고 한다.

 

도톤보리 시장 방문을 끝으로 일본 관서지방 여행이 막을 내린다. 4박5일의 짧지 않은 여정이었음에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곳이 많은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서 일본의 전통 민가건축이나 료칸(旅館)을 보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쉽다. 다음에 한번 더 기회를 잡아 둘러볼 것을 기약하며 간사이 공항으로 향한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