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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만 동원개발 회장]
부산과 울산에 랜드마크 건립 계획

동원개발은 명실공히 부산 및 경남지역의 1위 회사이다. 장복만 회장은 지난 몇 년동안 간 이식에 뇌수술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활동은 더욱 왕성하다. 부산 일원의 사업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활발하다. 얼마전에는 골프장도 건설했다. 협회 창립 30주년을 맞아 장복만 회장의 인생과 경영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취재 주택저널 편집팀 사진 왕규태 기자, 동원개발 제공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장복만 회장의 집무실은 몇 년전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직원들이 분주히 오가는 회사 사무실의 모습이나 회장실이 한쪽에 그리 넓지 않게 위치해 있는 점도 그렇거니와 집무실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더미의 모습도 그대로다. 그런데 그렇게 변하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반갑다.


예전보다 사람이 다소 늘어나고 더욱 분주해진 듯한 사무실 한켠에서 기다리는 동안 ‘근자치인(勤者治人)’이라는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풀자면 ‘부지런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부지런해야 다른 사람의 일을 살필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보다 앞서 나가 경영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일 터다.

 

이 말은 기실 장복만 회장의 인생을 한마디로 관통하고 있는 철학이다. 장 회장은 평생 부지런함 하나로 오늘의 동원개발을 일구어왔다. 지금도 “내 눈에 반 정도만 차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부지런함은 그의 몸에 배어 있는 일상이다. 주 5일 근무가 보편화된 요즘에도 동원개발은 토요일에 근무하는 것이 그의 철학을 잘 대변한다.

 

이미 칠순을 넘긴 연세인데다 요 몇 년새 건강이 안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던 차여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 장 회장의 모습은 언제 그렇게 큰 수술을 했나 싶을 만큼 건강해 보인다. 장 회장은 그간 간이식 수술에 뇌 수술까지 받았다. 얼굴모습은 몇 년전 만났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 회장과의 인터뷰는 최근 완공한 골프장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최근 동원개발은 장 회장의 고향인 통영에 18홀의 퍼블릭 골프장을 개장했다. 개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골프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기장과 경남의 다른 지역에 또다른 골프장을 건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골프의 대중화를 염두에 둔 사업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가장 좋은 학교를 만들 계획임도 밝힌다. 그것이 자신이 부산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장 회장은 연전 인터뷰에서 경남지역에도 서울의 에버랜드와 같은 위락시설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그 꿈은 접었다. 대신 다른 방향에서 부산을 위해 기여할 방법을 찾은 것이 바로 학교 설립이다.

 

 

“부산은 신항만 등으로 잠재력이 높은 도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부산의 주택시장 얘기로 옮겨갔다. 부산지역은 최근까지도 분양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얼마전에는 해운대에서 분양된 ‘엘시티 더샵’이 3.3㎡당 최고 7000만원이 넘는 높은 분양가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면서 청약경쟁률이 17대 1을 넘을 만큼 인기를 모았다.

 

“입지가 좋은 곳에는 아직도 수요가 있습니다. 엘시티 더샵의 경우 높은 분양가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조망권이 좋은 점 등이 인기를 끈 요인이라고 봅니다. 부산의 경우 그간 과열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호흡을 조절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과열분위기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분위기로 돌아오고 있으며, 당분간은 현 상태가 유지될 것으로 봅니다.”

 

장복만 회장은 지금의 주택시장이 20∼30년전처럼 일시적으로 과열됐다가 가라앉고 하는 식의 시장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파트의 입지나 위치 등에 따라 분양이 잘 될 수도 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금리를 올렸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금리는 당분간 저금리가 지속될 전망인데다 주식시장의 상황도 좋지 않아 결국 부동자금이 갈 수 있는 곳은 부동산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장전망과 관련해 장 회장은 특히 우리나라 주택관련 통계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부에서 거의 10년동안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는 통계의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보급률은 실제 가구수와 주택수를 놓고 측정을 하는 것인데 정부가 추정하는 가구수는 실제 가구수보다 적은 반면 주택수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 통계로는 우리나라 주택수는 1940만이고 가구수는 1870만이다. 주택수가 가구수보다 많으니 주택보급률은 당연히 100%를 넘는다. 그러나 여기에 허점이 있다는 게 장 회장의 지적이다. 지금은 핵가족화가 이루어져 가족 1인당 한가구를 설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택통계는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통계의 허실은 결국 주택건설 물량 추정에도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장복만 회장은 부산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부산신항의 하역규모가 세계 5위권으로 꼽히는 만큼 항만이 큰 자산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항만을 활용한 관광산업이나 수산업이 우리 경제에 기여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한다. 동원개발 또한 계열사로 수산회사를 두고 있기도 하다.

 

“바다에서는 원재료가 없어도 생산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합니다. 우리도 10여척의 배로 원양어업을 하고 있는데 바다에서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일본은 우리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러시아의 경우에도 자국 선원을 고용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수역에 못들어오게 합니다.

 

요즘 외국인 선원들이 늘면서 더러 문제도 생기지만, 수산업을 통해 유통되는 경제규모가 5조원에 이르는 등 순기능이 큽니다. 그래서 옛부터 항구도시에 부자가 많습니다. 제 고향인 통영만 해도 수산업을 통해 주민들의 소득이 높습니다. 여기에 울산이나 김해, 창원 등이 모두 한 권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부산의 잠재력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뉴스테이 정착 위해 값싼 택지공급 필요”

한편 장복만 회장은 뉴스테이 정책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우리 사회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부가 얼마나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뉴스테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결국 뉴스테이 정책의 성패는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장 회장은 뉴스테이에 관한 초점은 정부가 어떻게 값이 싼 땅을 제공해줄 수 있느냐 하는 점과, 뉴스테이가 제공되는 지역에 대한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느냐 하는 점, 그리고 이와 관련된 규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 것인지에 모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들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동원개발도 뉴스테이 시범사업 공모에 두군데나 신청해 놓았다고 한다.

 

“뉴스테이는 그야말로 임대주택 아닙니까. 즉 그만큼 싼 땅이 필요합니다. 비싼 집은 안됩니다. 만일 비싼 임대주택을 지어놓고 들어오라고 하면 서민의 입장에서 쉽게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직은 서울보다 땅값이 싼 지방이 뉴스테이 사업을 하기에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민간임대인 만큼 민간업체들의 참여가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필요합니다.”

 

 

▲장복만 회장의 책상에는 아직도 예전부터 즐겨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벽이나 사무실 바닥 등에는 서류더미들이 많다. ‘오직 부지런함’으로 그는 오늘의 ‘동원’을 일구어 왔다.

 

장복만 회장은 이같은 여러 상황들을 고려할 때 과연 현 정부의 임기내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을지 회의적으로 본다. 더군다나 임기 중반에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에서 부담이 된다고 해서 이를 지방자치단체에 맡겨서는 제대로 일이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부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가려면 공업용지 등을 풀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특별법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 만큼 이를 위한 TF팀 구성같은 방안도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현재 동원이 신청해놓은 시범사업 지역도 부산 북구와 기장 등 비교적 땅값이 싼 곳들이다.

 

뉴스테이뿐만 아니라 앞으로 주택임대관리사업의 진출도 생각하고 있다. 이웃 일본의 건설업체들이 부동산 버블이 붕괴된 이후 주택임대관리 등에 진출하면서 종합주택업체로 변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건설업체들도 10∼20년 후에는 그런 방향으로 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임대주택을 지어서 관리까지 맡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미 전세의 원세전환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택업체들도 앞으로는 집을 지어 관리까지 맡는 형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봅니다. 연간 5∼7%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으면 그런 패턴으로 가야 합니다.”

 

뉴스테이도 뉴스테이지만, 장복만 회장은 앞으로의 주택시장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인구증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단 주택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금처럼 낮은 출산율로는 경제의 성장동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주택시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낮은 출산율로 인구가 줄어들면 앞으로 30년쯤 후에는 경제 자체에 위기가 찾아올 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더러는 이민을 통한 인구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후에 소수민족 문제 등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간 국책 연구기관 등을 비롯해 여러 연구기관 등에서 나온 연구보고서에도 인구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있기도 하다.

 

 

“차입경영 최소화 등 내실 다져 어려움 극복”

동원개발은 1975년 설립됐다. 당시 부산은 물론 서울에서도 주택사업 면허를 가진 업체가 그리 많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기가 시작될 초창기 무렵에 주택건설업 면허를 얻고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당시 주택사업 면허를 받았던 업체들중 지금 남은 업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대형업체들도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원개발은 이를 극복하고 주택건설업의 명문업체로 우뚝 섰다.

 

“주택사업을 해오면서 여러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1979년의 석유파동을 비롯해 1997년에는 IMF가 찾아왔고, 지난 2008년에는 금융위기가 닥쳤죠. 저는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은행도 정부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사업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빚을 내지 않고 늘 감당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투자했습니다. 차입경영을 최소화 한 겁니다.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운영을 했어요. 그게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봅니다.”

 

장복만 회장의 경영방침은 이른바 ‘거북이경영’으로 대표되는 탄탄한 내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거북이는 목표를 향해 한눈팔지 않은 채 쉬지 않고 달린다. 장 회장 또한 그간 쉬지 않고 사업을 해 왔다. 그렇다고 결코 자본력에 부담이 갈 만큼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지는 않았다. 내실을 다지면서 회사를 운영해온 것이다.

 

“사업을 하다보면 잘 될 때도 있지만, 더러는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게 마련입니다. 사업이 잘 안될 때 ‘쉬어가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잘 안될 때에도 꾸준히 사업을 하고 있어야 찾아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쉬고 있으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없어요.” 동원개발도 꾸준히 사업을 하면서 필요한 기회를 살렸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게 장 회장의 생각이다. 

   

내실과 함께 장 회장이 강조하는 것이 신용이다. 그의 신용은 비단 자금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직원들의 임금을 한번도 연체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한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입주예정일도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그간 동원개발이, 그리고 장 회장이 지켜온 원칙이다. 이 때문에 동원개발을 ‘3무(無)회사’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동원개발이 설립후 40년간 건설해온 주택만 5만가구가 넘는다. 최근에도 부산 및 경남지역과 수도권 등에서 활발하게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남 미사지구를 비롯해 고양 삼송지구, 수서, 당산, 용인, 분당 등에서 성공리에 분양을 마쳤다. 지난 11월에는 용인 역북지구에서 모델하우스를 오픈했고, 올해 초에도 동탄신도시에서 분양에 나선다.

 

 

상대에 대한 배려로 얻은 이름 ‘동업의 달인’

장 회장이 가장 처음 시작한 사업은 건축자재를 판매하는 일이었다. 가난하게 자라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후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일하던 중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건축자재사업을 통해 주택건설업체들과도 거래를 하면서 주택건설업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아예 주택건설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

 

마침 당시는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을 시작하던 시기로 주택건설도 활기를 띄었고, 건자재 사업도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덕분에 소규모로나마 주택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른바 ‘집장사’로 첫발을 디뎠다. 집을 한 채 두채 지어주면서 성실과 신용으로 신뢰를 쌓아 인정을 받았고, 주택건설업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동원(東園)’이라는 회사 이름도 이때 지은 것이다.

 

1975년 3월 수영구 광안동 부지에 2층짜리 33세대의 전원주택단지를 지었는데, 모두 동향이었다. 그래서 ‘동(東)쪽으로 앉은 정원(庭園)’이라는 의미로 ‘동원’이라는 이름을 회사명으로 삼았다. ‘동원’은 그의 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역시 광안동에 4층짜리 아파트 1개 동을 지었다. 49세대로 첫 아파트사업인 셈이다.

 

당시 부산에서는 동업 형태로 주택사업을 하는 예가 많았다. 부지확보 등 주택사업에 들어가는 자금규모가 큰데 비해 자금동원능력은 그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 회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전원주택사업도 그랬고, 첫 아파트사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77년에는 ‘동원’은 그대로 둔 채 3인이 합작해 ‘동양개발’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동업은 자금을 합쳐 자본의 규모를 키운다는 점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실로 어려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오죽하면 ‘형제간에도 동업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장복만 회장은 사업 초기 여러 업체들과 동업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모두 성공적으로 사업을 마무리해 ‘동업의 달인’으로 불린다.

 

거기에는 장 회장만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하고 책임지는 부분은 51%로 하되, 이익은 49%만 갖겠다’는 원칙으로 동업에 임했다. 일은 더 많이 하고 이익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산의 주택업계에서도 신뢰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그는 부산 유수의 주택업체들과 동업관계를 형성했다. 대한건설협회장을 지낸 반도건설의 권홍사 회장도 한때 그와 동업파트너였다.

 

동양개발은 동래구 부곡동에 택지를 확보하고 49세대의 아파트 분양을 성공리에 끝냈다. 또 다른 회사의 종합건설업 면허를 인수해 시공권도 확보했다. 당시에는 건설업 면허가 없이는 집을 지을 수 없었다. 면허가 없는 업체들은 돈을 주고 면허를 빌리거나 면허가 있는 업체에 시공을 맡기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1, 2 금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그리고 체육훈장 기린장 등 장복만 회장은 훈장만 3개를 받았다. 3 지난 해에는 부산시에서 수여하는 부산문화대상(경영부문)을 받았다.

 

 

집마다 돌면서 품질 확인한 정성으로 신뢰 구축

그러나 이듬해 장 회장은 독자적인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동양개발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개인업체로 있던 동원을 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상호도 ‘(주)동원주택’으로 바꾸고 주택건설업체로 등록했다. 그해말에는 다시 현재의 상호인 ‘(주)동원개발’로 고쳤다. 이때부터 비로소 동원개발의 실질적인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법인으로 전환하고 독자적인 사업에 전념하던 초기 주택시장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1978년부터 가라앉기 시작한 주택시장이 1979년에는 완전히 침체에 빠져들었다. 당시 주택업계의 선두주자 군을 형성하고 있던 삼익주택이나 한양주택 등도 사업을 망설일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중소업체들은 아예 전업을 서두르는 곳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장 회장의 거북이 경영이 진가를 발휘한다. 동원개발은 어려운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시기이니만큼 더욱 품질로 승부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다. 그는 아파트 층마다 돌면서 일일이 한 채 한채의 집을 확인할 만큼 정성을 들여 집을 지었다. 그리고 이것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어 어려운 시기에도 분양에서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그 스스로 젊은 시절 수없이 이사를 다니며 애환을 경험했기에 집 한 채 한 채에 쏟는 정성은 각별하다. 1980년이 되면서 주택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고, ‘튼튼하고 하자없는 아파트’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동원개발의 아파트는 분양에 탄력이 붙었다. 어려운 시기에 사업을 시작한 것이 기업성장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동원개발은 최근 재개발·재건축사업에도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이들 사업을 통해서만 6000억원 규모 정도의 물량을 확보해 놓았다. 그는 앞으로 주택건설업체들이 재개발이나 재건축사업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수주하는 것이 아니다. 역세권 등 입지를 철저하게 따진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사업을 수주할 때는 위치가 좋은 곳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불황에도 분양이 잘 될 수 있는지, 손해를 보지 않을지 등이 주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사가 수주한 재건축사업들은 모두 지하철이 인접해 있어 위치가 좋습니다. 이 때문에 억대의 프리미엄이 붙는다고 합니다. 반면 도시재생사업은 재개발이나 재건축과는 다소 다릅니다.”

 

장 회장은 해외진출도 장기적으로는 검토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생전에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간 다른 업체들의 해외진출 사례를 볼 때 리스크가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세계경제가 불안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회사를 무리하게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해외진출같은 문제는 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복만 회장은 1985년 설립된 한국중소주택사업자협의회(대한주택건설협회의 전신)의 초대 및 2대 부산지회장을 지냈다. 그역시 중소주택사업자로 회사의 첫발을 내디뎠기에 중소업체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중소업체들의 권익향상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당시 지회장으로서 시공권 획득을 위해 뛰어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동원개발은 이미 종합건설업 면허를 갖고 있던 터여서 시공권 획득을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될 처지였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업체들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당시 국회 건설위원회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을 찾아 주택사업자들에게도 시공권을 달라고 건의했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니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움직일 때도 적지 않았다.

 

“당시 주택사업자들이 집을 지으려면 시공권이 있는 업체에 맡기거나 면허를 빌리지 않으면 안됐습니다. 건설업 면허가 있는 일반 건설업체들은 시공권이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장관에게 로비를 하는 상황이어서 우리 입장에서는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지역 회장들이 조를 짜서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했습니다. 여관에 짐을 풀고 구멍난 양말을 빨아신기도 하고 여관주인에게 양말을 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회사일 때문에 저녁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야 할 때도 있었는데, 저녁에 회사일을 본 후 그길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할 상황도 적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현장이 곧 사무실이었다. 그렇게 2년동안 쫓아다닌 끝에 저층과 고층시공권을 따낼 수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의 상황은 그야말로 ‘사투’나 다름없었다.

 

 

▲장복만 회장은 기업성장을 바탕으로 교육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은 부산권 최고의 학교설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육사업 통해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실천

동원개발은 비단 건설 및 관련분야뿐만 아니라 수산업 및 금융관련 계열사도 있고, 교육사업 및 사회사업도 펼치고 있다. 특히 교육사업은 인터뷰의 모두에서 밝힌 것처럼 지역사회는 물론 나아가 나라의 장래를 위한 인재육성 차원에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교육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동원의 계열사로 돼 있기는 하지만, 교육사업에는 그간 전혀 관여하지도 않았고, 돈 10원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교육을 잘 아시는 분들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통영에 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여기에서 서울대나 카이스트 등에도 진학하고 있습니다.”

 

학원도 없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유명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만 하다.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의 바람은 부산권 제일의 학교 육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가 교육사업을 하는 것은 사회환원의 일환이기도 하다. 당초 무일푼이던 그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지역사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볼 때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앞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양육기관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하다. 그간 동원개발은 대한주택건설협회에서 1994년 이후 매년 실시해오고 있는 국가유공자 노후주택 무료개보수 사업을 비롯해 지역내 불우이웃 및 저소득층 지원, 장학금 지원, 인재육성 기금 기부, 지역내 문화행사 지원 등을 위해 거의 1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했다.

 

장 회장은 그간 모두 3개의 훈장을 받았다. 가장 먼저 받은 것은 금탑산업훈장으로 1995년 주택건설사업을 잘 해서 받은 훈장이다. 또 하나는 2000년대 초반 한일월드컵을 비롯한 체육관련 일을 열심히 해서 받은 체육훈장 기린장이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해 201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주택건설업계에서 이처럼 훈장을 3개나 받은 경우는 아마도 장 회장이 처음일 것이다.

 

장복만 회장은 부산과 울산에 지역을 대표한 수 있는 랜드마크적인 건물을 짓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부산에서는 해운대 센텀시티에 ‘동원빅시티(DWBC)’라는 복합건물을 구상하고 있고, 울산에서는 우정혁신도시에 68층 이상의 고층빌딩을 건립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층수보다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게 장 회장의 구상이다.

 

장복만 회장은 요즘 하루 한시간 운동하는 것으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골프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 외에는 여전히 하루종일 일에 파묻혀 산다. 그에게는 일이 오히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일에 묻혀 있다보면 스트레스도 없다. 토요일,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출근해 일을 한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 겸손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요즘 장 회장이 자주 하는 얘기다. 일흔을 넘긴 성상동안 앞길만을 보고 달려온 대기업의 수장으로서 경륜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의 말 속에서 엄격한 대기업의 경영자로서보다는 오히려 상대를 품는 따뜻함과 정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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