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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자천교회]
초기 우리나라 교회의 모습을 간직한 한옥 예배당

자천교회는 아직도 한옥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개신교의 초기 예배당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다. 남녀의 좌석을 구별하는 칸막이나 예배당 한켠에 쉬거나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점은 요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또 예배당과 별도로 널찍한 한옥을 건립해 학생들의 교육기관으로 사용한 점도 초기 우리나라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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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천교회 입구. 우진각 지붕과 교회 앞 종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천(慈川)이라는 지명은 이 마을의 산과 개울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영천시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이곳에 있는 보현산의 옛이름이 자모산(慈母山) 또는 모자산(母子山)이라고 했으며, 마을앞을 흐르는 내(川)가 ‘을(乙)’자형으로 흐른다고 해서 ‘자을천(慈乙川)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을자가 빠지고 자천이 됐다고 한다.

 

 

선교사와 시골선비의 운명적 만남

자천교회는 100년이 넘은 한옥 건물이다.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면사무소의 건물등기부에 1904년 목조기와 건물로 등록된 것을 보면 그 이전에 건축이 된 것만큼은 분명한 셈이다. 교회측에서는 1903년 4월을 헌당일로 기념한다.

 


 교회 옆에 있는 신성학당. 교회 설립 당시 함께 세웠던 신성소학교의 맥을 잇는다.

 

교회를 지은 이는 권헌중(權憲中) 장로다. 그가 구한말 이곳에 교회를 짓게 된데는 당시 한국에 선교를 하러 와 있던 선교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비롯됐다. 당초 경주에서 작은 고을 선비로 서당훈장을 하던 권헌중은 청송군 헌서면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대구로 이사하기 위해 이동을 하던중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선교여행을 가던 선교사와 만나게 된다.

 

권헌중이 선교사를 만난 시기는 1897년쯤이라고 한다.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은 권헌중은 대구로 이사가는 것을 포기하고 영천 보현산 자락의 화북면(당시 신촌면) 자천리에 초가를 구입해 정착한다. 그리고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노비와 머슴들과 함께 성경을 공부했다. 이것이 자천교회의 시작이다.

 

그후 신자가 늘어나면서 선교사로부터 초가 대신 더 넓은 공간의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권유받고 건물을 신축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에 부딪혔다. 당시만 해도 유교적 문화가 강했던 탓에 동네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던 것이다. 결국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경찰주재소(지금의 파출소)와 면사무소를 지어주는 조건으로 예배당 건축을 허락받았다.

 

유교적 문화를 감안해 예배당을 짓다보니 남녀의 출입과 자리를 구분한 형태를 띄게 됐다. 그리고 1913년에는 교회옆에 있던 서당을 그만두고 2년제 신성소학교를 설립했다. 구한말에서 일제초기에 이르던 시절, 교회와 함께 새로운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세우는 일이 적지 않았다.



 신성학당은 지금은 교육관 및 교회의 역사자료실, 문화체험관 등 ‘Church Stay’로 활용된다.

 

 

우진각 지붕과 남녀 구분 위한 칸막이 설치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특이한 모습을 띄고 있다. 도시에서는 당시에도 서양식의 벽돌건물이나 석조건물들이 건립되기도 했지만,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었던 만큼 건물의 외형도 전통양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자천교회는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되는 초기의 개신교 한옥 예배당으로 남아 있다.

 

집의 외관이나 내부 모습도 특이한 점이 많다. 먼저 지붕이 우진각 지붕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우진각 지붕은 가운데 용마루를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지닌 형태로, 일반적으로 가옥에는 쓰이지 않고, 누(樓)나 정자 등에 이용된다.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넓은 공간을 감싸려다보니 우진각 지붕형태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자천교회 전경. 낮은 산을 배경으로 한 마을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교회 내부는 똑같은 형태의 장방형 두채를 나란히 붙여 겹집 양식으로 만들었다. 건물의 좌우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셈이며, 전체 내부공간은 정방형의 형태를 띄고 있다. 내부에서는 모두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으며, 천장과 지붕틀의 가구가 모두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지붕틀을 만든 구조수법이 일반 민가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트러스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일반 민가와는 다른 정방형 형태의 넓은 공간을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소 조잡하고 격식도 떨어지지만, 전체적인 자연미를 갖고 있다. 현재 교회의 담임목사를 맡고 있는 손산문 목사에 따르면, 당시 지방에서 활동하던 목수가 집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 예배당의 모습. 낮은 굴뚝이 인상적이다.

 

4개의 기둥중 가운데 2개의 기둥을 이용해 나무로 칸막이를 해놓은 점도 특이하다. 이는 당시의 유교적 분위기를 감안해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지방 유림 등에 의해 교회의 설립 자체가 힘들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남녀석을 구분한 것은 유교적 전통을 반영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한때 칸막이를 철거하기도 했고, 낮은 칸막이를 만들기도 했으나 지금은 서로 좌석을 볼 수 없을 만큼 다소 높은 칸막이를 설치했다. 그런데 강단에서는 칸막이를 전혀 의식할 수 없다. 칸막이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강단과 예배석의 기능적 조화를 꾀하기 위해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신성학당. 이 건물은 당초 ‘ㄷ’자 형태였으나 후에 증축돼 지금은 ‘ㅁ’자 형태를 띄고 있다. 당초 교회를 설립한 권헌중 장로의 소유였으나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가 다시 기증받은 건물이다.

 

 

지붕에 ‘교회’ 표기해 폭격 면하기도

자천교회도 6.25전쟁을 거치면서 자칫 훼손당할 수 있었지만, 보존된데 대해 한 일화가 전한다. 교회의 지붕에 흰 횟가루로 ‘교회(CHURCH)’라고 써 놓았다는 것이다. 폭격을 하던 미군이 이를 보고 이곳에는 폭격을 하지 않아 화를 면했다는 얘기다. 다소 평평한 우진각 지붕이기에 가능했던 얘기다.

 

교회 옆에는 커다란 목재 종탑이 서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이 종탑 또한 오래된 것으로, 신성소학교에 있던 풍금과 함께 교회 신도들의 헌금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제가 모든 쇠붙이를 공출해가는 과정에서 종을 압수당해 광복후 지금의 종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자천교회 안에는 요즘의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간이 또하나 있다. 예배석 뒤편에 작은 온돌방을 마련해놓은 점이 그것이다. 손선문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 선교사들이 예배가 끝난후 교인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장소겸 교회에서 숙식을 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라고 한다. 초기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면이다. 

       

온돌방이 있으니 당연히 굴뚝도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이곳의 굴뚝은 낮고 아담하다. 아마도 이는 낮은 자세로 섬긴다는 교회의 원리와 함께 연기가 높게 피어오르지 않도록 해 마을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우리 전통한옥에서도 드물지 않게 낮은 굴뚝을 설치한 예를 볼 수 있다.

 


 강단에서는 칸막이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좌석 뒤편에 별도로 조성된 공간이 보인다. 이곳은 성경공부 겸 선교사들이 숙식하던 곳이다.

 

 

신성소학교 맥 잇는 한옥의 ‘신성학당’

교회 옆 신성소학교 건물은 한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기증받아 ‘신성학당(新星學堂)’이라는 간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한옥 교육관으로, 지금은 교회의 교육관 겸 역사자료실과 독서교실, 문화체험관 등 Church Stay로 운영하고 있다. 신성소학교의 맥을 잇게 된 셈이다.

예배당 옆 한쪽에는 교회를 설립한 권헌중 장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권헌중은 구한말 한때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그가 이사를 다닌 것도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교회활동을 하는 중에도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주는 등 민족해방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강단은 별도로 마련돼 있다.

 

한편으로 종교에 귀의하면서 자신의 노비와 머슴들을 풀어주는 등 반상(班常)의 철폐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그가 학교를 세운 것도 이런 민족의식 고취와 문맹퇴치를 통한 주민계몽사업 등의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천황을 숭배하라는 일제의 압박도 종교의 자율성을 들어 거부했다.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사적 2호로 지정돼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도 지정돼 있다. 영천시에서는 자천교회 일원에 역사관과 공원을 만들어 관광자원화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교인수가 불어날 때마다 분가시키고 있는 자천교회는 초기 개신교의 초대교회로서 물질주의에 물드는 요즘 교회에도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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