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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시 금호읍 오계리]
선비의 지조를 지켜온 집

영천 만취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 새사랑채, 중사랑채, 가묘와 별묘, 재실 등 사대부가의 여러 공간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집이다. 가옥의 형태와 기둥 및 처마의 양식, 창호의 장식과 문양 등이 사대부가의 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랑채의 2칸 방을 앞뒤에 툇마루를 둔 제방(祭房)으로 꾸민 점이 독특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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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대구에서 포항을 잇는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지금은 대구에서 불과 30~4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만취당이 있는 금호읍은 영천에서도 대구쪽과 가까운 서쪽에 위치해 있다. 다른 경북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전통가옥이 여려 채 남아 있어 우리네 옛 사대부가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만취당(晩翠堂)이 위치한 오계리(五溪里)는 올해초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면서 ‘종동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지명으로 보면 현재의 지명이 오히려 이 지역의 유래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지역의 지명이 오종동(五宗洞)이었기 때문이다. 즉 마을을 둘러싼 다섯 개의 산 아래 마지막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천 만취당의 처마. 기둥과 보의 구성,

서까래의 모습이 전통 한옥 처마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병마절도사 지낸 조학신이 건립

이 집을 지은 이는 조학신(曺學臣)이다. 그는 선조때 성리학자인 조호익(曺好益)의 6세손으로, 정조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인물이다. 영천시의 자료에 따르면 조학신은 조선적(曺善迪)의 둘째 아들로 도량과 사람됨이 뛰어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때 칼 쓰는 시합에 나갔다가 임금님의 칭찬을 받고 사복(司僕) 내승(內乘)에 임명됐다.

 

이후 여러 고을의 목사를 지냈고, 내직으로 국가의 중요직책을 맡았다고 돼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예와 정성을 다해 정조께서 크게 칭찬하면서 규장각지(奎章閣誌)와 대전통편(大典通編) 각각 1부와 말 한필을 하사받았다. 그의 사후에는 임금으로부터 부조와 제문이 내려졌다고 한다. 만취당 뒤쪽에는 지금도 부조묘와 재실이 있다.

 


 만취당 대문채.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취당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는 조학신에 관한 내용이 보다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영조 35년 정시(庭試)를 보러 갔다가 서울에서 지내고 있는데 풍채가 빼어나고 완력이 남보다 뛰어나 당시 병조판서이던 김성응(金聖應)이 쓸만한 인재로 조정에 천거했다고 한다. 김성응은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후손이며, 잠곡은 조호익의 문인이다.

 

천거를 받은 영조 임금은 곧 인견(引見)을 명하고 청룡도를 내려 시험을 했는데, 칼 쓰는 솜씨에 감탄해 곧바로 사복시 내승을 제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영조대왕이 특별히 내시(內試)를 베풀어 급제를 내리고 선전관(宣傳官)을 제수했다. 영조 39년(1763년)에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都事)가 되고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영조 40년(1764년)에는 훈련원 부정 및 호조좌랑이 되고 영조 43년(1767년)에는 의금부(義禁府) 도사, 함종부사(咸從府使)가 돼 선정을 베풀었다. 또 자신의 6대조인 조호익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동(江東)에 가서 정부인(貞夫人) 허씨(許氏)의 묘소를 찾아 자손녹갈(子孫錄碣)을 세우고 위토를 보충하기도 했다.

 


만취당’이라는 당호를 가진 큰사랑채. 이 집에 있는 여러 사랑채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영조 45년(1769년)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 및 홍주영장(洪州營將)이 되고 이어 다대포(多大浦) 첨사(僉使),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길주(吉州) 목사(牧使)가 됐다. 영조에 이어 임금에 오른 정조대에도 조학신은 요직을 두루 맡았다. 정조 2년(1778년) 왕의 특별지시로 별군직(別軍職) 및 경상도(慶尙道) 좌수사(左水使)가 됐다.

 

정조 19년(1795년) 훈련원 도감(都監)의 중군(中軍)으로 특별히 수원 화성(華城)의 성을 쌓은 역사의 감독관으로 감독을 맡았다. 이 일이 끝난 후 조학신은 비단으로 만든 말 안장을 하사받았다. 정조 20년(1796년)에는 다시 별군직에 임명됐는데, 화성 역사 감독의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져 임금의 특명으로 ‘녹(祿)은 받고 직(職)에는 임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이처럼 조학신은 주로 무인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문인이기도 하다. 조학신의 아들 조수구(曺壽九)와 조석구(曺錫九)는 각각 진해현감과 오위장(五衛將)을 지냈고, 학신의 4세손인 조병문(曺秉文)은 장릉참봉(章陵參奉), 5세손인 조석환(曺奭煥)은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간. 왼쪽에 보이는 것이 중사랑이다.

 

 

사랑채 사랑방 맞은 편에 만든 제방 특이

이 집은 오계리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변에는 송림이 둘러싸고 있는데 조학신이 집을 건립해 정착하면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만취당이라는 집의 당호도 이 소나무 숲과 무관하지 않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선비로서의 곧은 지조를 지키겠다는 의미를 당호에 담고 있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 옆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문간을 사이에 두고 중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사랑 앞으로는 초가로 된 마굿간이 있다. 그리고 왼쪽에 새사랑채가 별도의 문을 갖춘 별채로 들어섰다. 이 집 바깥에 자리잡은 집은 모두 사랑채 역할을 하는 공간인 셈이다.

 


 널찍한 마당을 가진 안채. 대가의 풍채를 느낄 수 있다.

 


안채 뒤쪽의 모습. 대청 뒤쪽으로도 퇴를 두고 있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ㄷ’자 형의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전체적으로 ‘튼ㅁ’자 형의 구조를 이룬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과 부엌이 놓였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건넌방이 있는데,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박해진씨의 설명으로는 아씨들이 사용하던 방이라고 한다.

건넌방과 사이를 두고 웃방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사이에 작은 복도공간과 외부로 통하는 판장문이 설치돼 있다. 안채 건넌방과 웃방사이에 이같은 사이복도를 둔 예는 특이한 것으로 충북 괴산의 고택에서 나타난 예와 같다. 이 집에서는 안채의 뒷 공간을 독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녀자들을 위한 출입공간으로 보인다. 

  

‘만취당’이라는 이 집의 당호는 바로 큰사랑채의 당호다. 그런데 큰사랑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똑같은 형태의 제방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방 맞은 편 방에는 영모제(永慕齊)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같은 형식은 일반 사대부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다.

 


 새사랑채인 광명헌. 별채로 건립된 것으로 밖에서 따로 출입할 수 있다.

 

특히 이 제방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방과 대칭으로 놓인데다 사분합문으로 설치된 창호의 모습도 똑같아 동일한 규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뒤쪽에 작은 마루공간을 들여 사랑방과는 그 크기나 구조를 달리하고 있다. 이같은 마루공간의 설치는 제관들이 사용하기에 펀리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대청과 제방앞으로는 모두 너른 퇴를 두었다. 퇴위의 천장은 우물반자 형태로 만들어 고급스러운 건축형식을 보여준다. 사랑채의 기둥 또한 양쪽 끝에는 원주를 사용했고, 나머지 기둥들은 방주를 사용했다. 원주를 사용한 양쪽 끝 기둥의 경우 원형의 다듬은 주춧돌위에 다시 둥근 모양의 돌받침을 사용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1 부조묘 앞에 있는 보본재. 재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2 보본재 전경 3 큰사랑채 뒤쪽에 자리잡은 가묘. 이곳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구한말 독립군 군자금 대주다 사랑채 훼손

별채로 꾸민 새사랑채에는 광명헌(光明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두칸의 사랑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집앞을 지나면서 겉으로 보면 마치 누각이나 정자처럼 여길 법한 건물이다. 큰사랑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마루의 좌우에 헌함을 둘러 누마루를 갖추고 방 앞에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이 집에 다른 집과 달리 별채의 새사랑채가 건립된 데는 사연이 있다. 구한말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주다가 발각돼 일본 군인들로부터 사랑채 일부를 훼손당하는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후 훼손된 사랑채를 보수하는 한편 새사랑채를 지었다. 

 

안채로 통하는 중문 옆으로는 작은 사랑채가 또하나 있다. 중사랑채가 그것이다. 이곳에도 방옆에 작은 마루를 설치해 사랑공간으로서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중사랑채 옆으로는 안채 후원으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이 있다.

 

안채 뒤로는 정조가 내린 조학신의 불천위 사당과 재실이 있다. 불천위란 4대봉사와 관계없이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제사를 모시도록 한 인물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대개 문묘에 제향된 유학자 등이 불천위를 받았다. 재실의 이름은 보본재(報本齋)다. 조학신의 불천위 사당은 그의 사후에 만든 것이므로 집의 건축연대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큰사랑채 뒤로는 약간 높은 곳에 집의 가묘가 들어서 있다. 이곳은 큰사랑채에서 바로 통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전체적인 위치로 보면 불천위 사당이 가장 뒤쪽에 있고, 그앞에 보본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다시 그 아래쪽에 가묘가 있다. 한 집안내에서도 위계에 따라 집을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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