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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 안재홍 생가]
150년 향나무에 담긴 독립운동가의 자긍심과 고뇌

안재홍 고택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언론인이고 교육자이기도 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이 살았던 집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ㄷ’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사대부가의 격식을 갖춘 집이다. 특히 안채 대청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연결통로가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안재홍 생가의 정면 모습. 앞에 보이는 것이 사랑채다. 사랑채 오른쪽으로 문간채가 있고, 뒤쪽으로 안채의 초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평택시고덕면은 시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원래 평택에 속해 있던 고두면(古頭面)과 수원에 속해 있던 종덕면(宗德面)이 합해지면서 고두면의 ‘고’자와 종덕면의 ‘덕’자를 따서 ‘고덕(古德)’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두릉리는 원래 수원 종덕에 속해 있던 곳으로 원두릉과 계루지 마을로 나뉘어 있다.

 

‘계루지(桂樓地)’라는 지명도 독특하다. 평택시사에는 ‘계수나무 정자가 누각처럼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설명에는 ‘마을의 동쪽에 계곡이 있어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머무는 땅‘이라는 의미의 ‘계류지(溪流地)‘’라는 이름이 변형되어 계루지가 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계루지라는 이름은 지명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어서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요즘 이 마을에는 한창 개발바람이 불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이곳 땅이 곧 개발될 지역임을 알려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또 마을 곳곳에는 이와 관련된 플래카드도 내걸려 있다. 고덕면은 국제화 신도시가 조성되는 지역이다. 실제 마을에는 사람이 거의 살고 있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사랑채 전경. 사대부가의 격식과 위엄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의 처마가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안재홍

큰 도로에서 이 계루지마을 쪽으로 돌아들어오면 도로 밑 기슭에 안재홍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이 집에는 민세 안재홍의 큰 며느리인 김순경(金筍卿, 90) 여사가 혼자 살고 있다. 당초 초등학교 교사였던 작은 며느리가 집을 지키다가 몸이 아파 서울의 아들 집으로 옮기면서 집이 비게 됐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폐허로 변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없어 2001년부터 김여사가 내려와 지키게 된 것이라고 한다. 

 

 

 

민세 안재홍은 잘 알려진대로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고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일제의 아픔과 분단의 고통을 고스란히 몸으로 살다간 인물이다. 1891년 태어난 그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유학시절부터 조선인기독청년회 등에 관여하면서 학우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15년 일본에서 귀국한 민세는 주로 언론계에서 종사하다가 1916년 상해로 망명해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서 활약했다. 191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으로 몸담기도 했고, 조선 중앙기독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그해 5월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됐는데, 민세는 여기에 참여해 총무로 활동했다. 그러나 청년외교단 조직이 그해 11월 대구에서 발각되면서 민세도 검거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후 1924년 5월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사장으로 있던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조선일보 주필로 들어가 부사장과 사장을 역임하는 등 10년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 기간동안 조선일보에 게재한 사설 등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언론인 생활을 하던 1927년 좌우합작단체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해 총무간사를 맡았다.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있던 1929년에는 문맹퇴치를 위한 문자보급운동과 생활개선운동 등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그해 말 신간회가 주도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중국 남경 군관학교에 두 청년의 밀파 입학을 알선한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돼 구금되기도 했다.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수감됐다. 민세는 1919년 이후 20여년동안 7년8개월동안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사랑채.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다. 대청과 방 앞으로 넓은 퇴가 설치됐다. 왼쪽으로는 한단 높여 누마루를 만들었고, 대청 창호앞에는 들어열개가 있다.

 


 사랑채 뒤쪽에 안채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양옆으로 낮게 설치된 굴뚝이 있다.

 


1 사랑채 측면의 기둥 밑에 장식이 눈길을 끈다. 2 사랑방 밑에 만들어놓은 아궁이

 

 

납북인사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어려움 겪어

1945년 해방된 뒤에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됐지만, 곧 사퇴했다. 그리고 그해 9월 국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됐다. 그후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46년에는 한성일보사 창립 사장, 비상국민회의 의원, 민주의원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1947년에는 입법의회 의원이 되고, 미군정청의 민정장관이 되어 한인을 중심으로 한 행정기반 체계를 구축했다. 1950년 무소속으로 그의 고향인 평택시(당시 평택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로 피신해 있던 중 그해 9월 제자인 권태휘의 밀고로 납북되고 말았다.

 

납북 이후 민세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965년 3월1일 평양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납북됐다는 이유 때문에 국내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다가 1989년 해금 이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랑채 누마루 천장의 우물반자. 한옥 천장의 가구미를 보여준다.

 

김순경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중농수준의 경제력을 유지하던 집안이 민세의 부친인 안윤섭(安允燮)때에 마을의 대지주가 됐다고 한다. 안윤섭은 모두 8남매를 두었는데, 민세는 둘째였다. 첫째인 안재봉은 큰 부자였지만, 6.25전쟁때 죽었다. 일본 경도제국대학을 나와 독일로 유학했던 셋째 안재학은 일제하에서 일을 하지 않겠다는 소신으로 경성제대와 연희전문의 교수직 제의를 뿌리쳤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규모도 많이 줄어들었다.

 

역시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인 김 여사는 민세의 첫째아들인 안정용(安晸鏞)의 부인이다. 민세가 이미 납북된 후인 1953년 결혼해 민세와 함께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민세가 해방정국의 대표적 정치가의 한사람이었던 탓에 학생모임 등을 통해 토론도 많이 했고, 또 각종 집회에서도 몇 번 뵈어 잘 알고 있었다다고 한다.

 


사랑채 대청과 사랑방 사이의 창호문양이 고급스럽다.

 

안정용은 이승만 정권 시절 많은 탄압을 받아 어렵게 지냈다. 4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택에서 출마를 준비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권이 민세와의 비밀접촉설을 조작해 구속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4.19 혁명후 혁신계 활동을 하다 5.16쿠데타로 결국 정치활동이 좌절됐으며, 1970년 젊은 나이에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 사후 전처 소생까지 모두 5남2녀의 일곱남매를 떠안은 김 여사는 갖은 고생을 겪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다행히 아이들이 부모나 조상들을 원망하지 않고 잘 자라 주었지만, 정권의 탄압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안채 전경.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이 부엌, 오른쪽에 건넌방이 위치해 있다.

 

 

안채 대청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통로 특이

안재홍 생가는 경계에 담장을 두르고 그안에 초가인 안채와 사랑채를 남향으로 앉혔다. 안채는 당초 초가였던 것을 둘째 며느리가 살면서 편의를 위해 기와로 고쳤다가 1994년 보수때 다시 원래 형태인 초가로 복원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담장에 바짝 붙어 서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런 형태의 구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화재청 등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는 대문간채까지 남아 있던 큰 집이었으나 지금은 작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앞뒤로 배치돼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 동쪽으로는 문을 중심으로 작은 문간채와 화장실이 있고, 안채 뒤쪽으로 높은 계단을 쌓고 일각문을 냈다. 안마당 한쪽에는 우물과 오래된 향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2단의 기단위에 건축한 안채는 전체 7칸으로 규모가 꽤 큰 집이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방앞으로 부엌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대청에서 부엌으로 이어지는 작은 내부통로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대청에서 부엌으로 가자면 밖으로 나와서 이동해야 하는데, 이같은 내부통로는 일반 민가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안채 대청에 민세 안재홍의 커리커처가 걸려 있다. 대청 오른쪽에 수납공간을 아래위로 만들었다. 이 집에는 대체로 수납공간을 많이 두어 공간활용성을 높였다.

 

안채 건넌방의 창호형태도 특이한 형태를 띄고 있다. 즉 벽위로 창호를 낸 것이다. 보통은 대청에서 이어지는 퇴를 깔고 출입이 가능한 문을 내는데, 이 집에서는 창호의 역할만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건넌방 옆으로 작은 문을 내고 작은 퇴를 만들어둔 것도 눈길을 끈다. 방 한쪽에는 수납공간을 두었다.

 

이 집 안채의 대청에는 안재홍 선생의 초상화와 커리커쳐가 걸려 있다. 초상화는 1930년대 조선일보 사장시절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대청에도 뒤로 벽을 내어 감실을 만들었는데, 이집이 종가가 아니어서 제사용 공간이 아닌, 순수한 수납공간으로 이용됐다는 게 김 여사의 설명이다. 부엌에도 벽을 뒤로 내밀어 별도의 수납공간을 두었다.

 

이 집이 지어진 연대가 일제시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이같은 형태들은 당초의 한옥에서 다소 진화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즉 20세기 들어 사는 사람들의 생활편의를 위해 일부 구조를 개량해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채 대청에서 복도로 통하는 공간. 전통가옥에서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다.

 

 

누마루와 들어열개 설치해 격식 갖춘 사랑채

역시 낮은 기단위에 앉은 사랑채는 정면 8칸으로 안채에 비해 규모가 약간 크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왼쪽에는 방옆으로 누마루를 설치했다. 대청과 온돌방앞에는 퇴를 만들었다. 대청과 방의 기둥아래에는 방형 주춧돌을 놓은 반면 누마루 아래에는 높은 주춧돌을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대청과 누마루의 창호에는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누마루 천장은 우물반자를 만들었고, 대청과 방 사이에 놓인 창호와 누마루 창호도 격식이 있다. 사랑채에 있는 양쪽 방에도 모두 수납공간을 설치했다. 안채나 사랑채나 수납공간을 많이 둔 점은 이 집만의 특색이라 할 만하다. 사랑채 뒤로는 문 옆으로 낮은 굴뚝이 설치돼 있다.

 

또 이집 사랑채 앞의 담장에는 민세가 좋아했던 능소화가 심어져 있었지만, 이때문에 담장이 자꾸 허물어져 시청에서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집을 지키고 있는 김 여사가 화초를 좋아해 안채 대청 한쪽에는 화초가 가득 놓여 있다. 안채 옆에는 비닐로 된 온실도 갖추고 있다. 높은 석축위에 만든 화단에는 철쭉이 가득 심어져 있다. 

      

이 집 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50년의 향나무가 서 있다. 민세의 큰 아들과 친분이 있던 재벌그룹 회장이 이 집을 찾았다가 이 나무를 보고 당시로서는 큰 돈인 3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했지만 가족들이 거절했다는 나무다. 이 향나무에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후일을 걱정했던 민세의 고뇌가 담겨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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