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인사이드뷰 > 인사이드뷰
[김석철 교수의 도시건축 이야기]
천년도시 베이징을 이해하는 키워드 후통(胡同)

베이징의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후통은 베이징의 어반 네트워크다. 원나라가 대제국의 수도를 베이징에 세울 때 황궁 주위에 수천 수만의 사합원을 지었다. 후통은 바로 이 서로 다른 크기의 사합원들이 만든 통로이다. 후통은 베이징을 열 수 있는 키워드다. ‘보이는’ 사합원에서 ‘보이지 않는’ 후통을 볼 수 있으면 베이징을 알 수 있다.

글·사진 김석철(명지대학교 건축대학 석좌교수·명예건축대학장,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장)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19세기 베이징 도성의 모습(1880년 작성 추정)

 

베이징(北京)은 세계도시역사의 보물 같은 도시이다. 왕조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한 다른 제국의 수도와 달리 베이징은 원(元)·명(明)·청(淸) 세 왕조의 수도로 계속 이어 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끊임없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베이징은 중국 북부 평원의 전략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인류의 첫 정착민인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이 이곳에 자리한 것이 70만년 전이었다. 상(商) 왕조(BC 11c~16c)와 주(周) 왕조(BC11c~771)때 최초의 성곽도시가 현 베이징의 서남쪽에 있었다.

 


1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베이징의 모습 2 1950년대 베이징 중심지의 모습

 

베이징은 원래 춘추전국시대에 연(燕)나라의 수도로 시작되었다. 베이징을 옌칭(燕京)이라 부르는 것은 그런 연유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은 수도를 함양으로 정하였고, 한(漢)나라 때는 낙양이 수도가 되었다가 당(唐)나라에 와서는 장안이 수도가 되었다. 베이징은 천하를 통일한 쿠빌라이 칸이 진(秦)나라의 옛 수도 북측에 세운 타타르 제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베이징의 남측은 차이니즈 시티, 북측을 타타르 시티라 부르기도 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베이징은 영원한 중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베이징의 자금성과 천안문광장이 이루는 도성 중심축의 모습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된 신도시 ‘베이징’

원의 대(大) 도성(都城)으로 시작된 베이징은 계획에 따라 건설된 신도시로 도시계획가 유병충이 주관하여 계획한 것이다. 이 계획은 춘추전국시대의 이상적 토지계획사상을 실현한 것이다. 원의 도성 건설은 엄밀한 계획과 준비 하에 진행되었다. 건물과 도로를 만들기 전에 성 전체에 하수도를 매설하고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자 정식으로 대도(大都)라 이름 하였다.

 

원의 수도였던 대도는 폐허가 된 금(金)의 중도(中都) 위에 건설하였으나 전혀 다른 신도시이다. 도성의 형태는 외성, 황성 및 궁성으로 나뉘어졌다. 외성은 장방형으로 동서 6,635m 남북 7,400m이며 모두 11개의 문이 있는데 북에 2개, 그 나머지 3방향에 각각 3개의 문이 있으며 문 밖에는 옹성이 설치되었다. 성벽은 전부 토벽으로 건축되었고 기초부분의 폭은 24m에 달했다.

 

2중 성벽인 황성은 둘레가 약 20리로서 성 전체의 남부 중앙지역에 위치하였다. 황성의 중부는 중해, 남해, 북해라는 세 해자(海子)로 되어있는데 동쪽은 궁성이며 황성의 동북부는 어원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궁성은 황성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 도성의 중심축상에 있다. 궁성의 남문은 지금의 자금성 태화전 자리이고 북문은 지금의 경산소년궁 앞이었다. 궁성 중앙에는 조전과 침전이 마주하고 있었다. 대도의 서측에 사직단이, 동측에 태묘가 세워져 있으며 상업지구는 성 북측에 집중되어 있었다.

 

원의 대도는 당의 장안성 이후 새로 축조된 최대의 도성으로 중국 고대의 도시계획의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켜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다. 현 베이징성(成)은 비록 명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규모지만 모두 원나라의 대도의 기초 위에 축조된 것이다. 도성계획의 우수한 전통수법인 중앙 대칭의 도시구성에 기초하여 규칙적인 궁전을 배치하되 건축은 기하학적 질서를, 조경은 유기적 질서를 갖게 하여 고도의 예술적 효과를 이루었고 특히 수로를 녹지와 결합하여 도시를 풍요롭게 하였다.

 


 현대 베이징 도시분석도.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제공

 

 

베이징 특유의 옛거리 ‘후통’

베이징하면 누구나 먼저 자금성(紫禁城)과 천단(天壇),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이화원을 생각하지만 중국인과 중국문명의 참 모습을 알자면 베이징인들이 살던 마을을 알아야 한다. 황제가 살던 집보다 베이징인들이 살던 집이 당연히 그들의 삶을 더 많이 말해줄 수 있는 곳이다.

 

베이징 사람들이 살던 후통(胡同)이 아직 베이징 한 가운데 남아 있으나 다들 잘 모른다. 원 나라가 대제국의 수도를 지금 베이징에 세울 때 황궁 주위에 수천 수만의 사합원(四合院)을 지었다. 베이징 성곽과 자금성 사이를 가득 채웠던 후통과 사합원은 많이 부서졌으나 아직 그 틀은 남아 있다. 현대의 베이징은 천안문 광장주변 이외는 대부분 옛 도성 바깥에 세워져 자금성 주위와 경산북측 옛 도시 구역의 후통은 성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후통은 베이징 특유의 옛 거리이다. 후통은 베이징의 구 성내를 중심으로 산재한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말로서, 중국의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 가옥 건축인 사합원이 이 후통에 많이 접하고 있어, 베이징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도 베이징에는 수천이 넘는 후통이 남아 있다. 자금성 주변의 후통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 세워진 것이다. 황제들은 주례고공기에 의해 도시를 계획하였다. 도성 한가운데 금단의 도시인 자금성이 자리하고, 자금성과 도성 사이를 운하가 흐르고 운하를 거슬러 격자가로망이 도성 전체를 채우고 있다. 큰 격자 가로망 안에 동서로 후통이 이어지고 사이에 사합원이 들어선 것이다.

 

후통은 두 종류였다. 정통적 후통은 자금성 좌우에 질서 정연하게 들어선 것이었다. 대부분 거주자들은 황실의 인척이거나 귀족들이었다. 자금성 남측 천안문광장과 북측 경산 바깥 멀리 지어진 후통은 보통 사람들의 마을이었으며 주로 장사치나 평민들이 살았다. 후통의 주공간은 네 방향에 자리한 네 집으로 이루어진 사합원이다. 고위층 공직자나 부유한 사람들의 거대한 사합원에는 전정과 후정이 있으며 화려하게 장식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보통 사람들의 집은 작은 대문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후통은 마을을 가리키기보다 서로 다른 크기의 사합원들이 모이면서 이룬 통로를 말한다. 사합원은 대부분 남향이었으므로 후통은 대부분 동서를 달린다. 동서로 이어지는 긴 후통 사이에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작은 길이 있게 마련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정교하게 짜인 거대한 그물이 높은 장벽 안에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후통 역사지구와 현대의 베이징 스카이라인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주역의 원리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공간

서울에서는 600년 역사도시의 시간과 공간이 박제되었으나 베이징에는 그들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후통과 사합원이 아직 거기 남아 있다. 후통을 제대로 보려면 경산 북측 종루에 올라야 한다. 급경사계단을 올라 종루에 서면 사방팔방으로 펼쳐진 천년도시의 삶의 현장이었던 수천 수백의 후통과 수천 수만의 사합원을 볼 수 있다. 베이징의 옛 도성은 부서졌으나 옛 도시 원형의 틀은 아직 남아 있다. 옛 도시는 왜곡되고 부서져 있어도 현대건축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현대의 베이징 스카이라인 모습(2013년)

 

서울 사대문안 옛 도시는 고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건축 아래 묻혀버렸고 수백년 살아온 주거공간은 일부가 유적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후통같이 마을이 그대로 남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서울은 옛 것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세운 배반의 도시이나 베이징은 옛 것을 비껴 그들의 도시를 세운 공생의 도시이다. 자금성과 후통이 있어서 베이징은 위대한 도시인 것이다. 왕의 공간인 경복궁과 창덕궁과 종묘는 남았으나 서울사람들이 살던 서울사람의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폐허가 된 누황의 거리여도 후통에는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다. 서울사람들의 삶이 담긴 길은 모두 사라졌으나, 후통은 비록 피폐하지만 살아있는 도시구역이다.

 


후통은 도심안의 거리이자 동시에 베이징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는 공간이다.

 

후통은 베이징을 열 수 있는 키워드이나 정작 후통에는 부서진 사합원만 남아 있다. 후통에 베이징의 키워드가 있어도 사합원의 마을에는 후통이 없다. 북경과 자금성과 사합원은 실재(實在)하는 공간이지만 후통은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공간이다. 후통은 주역(周易)의 원리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4000년 전 중국인들이 발견한 주역의 세계가 바로 디지털의 세계이다. 주역의 세계와 디지털의 세계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후통에 서면 네트워크 위에 서 있는 기이한 체험을 한다. 1000만 도시 베이징의 키워드인 후통을 모르면 베이징의 어반 네트워크를 알 수 없다.

 

후통과 사합원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는 베이징의 실재이다. ‘보이는’ 사합원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후통을 볼 수 있으면 베이징을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합원의 조감도. 일반적인 사합원의 전형적 공간 구조를 엿볼 수 있다. 2 사합원 내부의 모습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