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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
올곧은 선비정신이 담긴 집 ‘무기연당’

‘무기연당(舞沂蓮塘)’은 집 주인인 국담(菊潭) 주재성(周宰成)의 별당채에 있는 연못을 일컫는다. 연못 옆으로는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이라는 누각이 서 있고, 충효사도 건립돼 있다. 무기연당은 조선후기 정원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주변의 누각들은 우리 선조들의 선비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장소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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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성은 조선 영조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때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면서 영남 일원에 있던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의병을 일으킨 것뿐만 아니라 사재를 털어 관군에게 양식도 제공했다. 난이 평정된 후에 관군들이 돌아가면서 주재성의 공적을 치하하는 창의사적비를 동네 어귀에 세웠다.

 

그리고 집앞 마당의 넓은 곳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이름을 국담이라고 했다. 연못 가운데에는 석가산을 쌓아 당주(當洲)를 만들고 양심대(養心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못 주변으로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냈다. 이곳이 바로 무기연당이다. 연못 옆에 선 풍욕루와 하환정은 후에 건립된 건물들이다.

 


 연못 옆 기단위에 고고한 선비의 삶을 상징하듯 높게 서 있는 풍욕루. 바람에 몸을 씻기듯 열려 있는 공간이다.

 

 

조정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

‘국담’이라는 연못의 이름을 그대로 자신의 호로 삼은 주재성은 조정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연못가의 서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가 학문을 연구하며 지은 책판들이 지금도 전해온다. 그의 사후 영조는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경정참찬관’을 추서했고, 정조때는 충신의 정려를 받았다. 

 

‘무기연당’은 이곳 지명인 ‘무기리’에서 따온 호칭이다. 함안군의 지명유래에는 ‘옛고을 칠원현 주산인 청룡산(옛 작대산)밑에 자리잡아 물맑고 산세좋아 고을에서 무우기수(舞雩沂水)에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라 하여 판결사 주선원공(周善元公)이 무기라고 지명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청룡산에서 물이 춤추면서 내려오기에 무기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풍욕루 마루 안쪽에 걸려 있는 ‘경(敬)’자 현판. 소수서원의 ‘경’자 바위와 관련이 있는 현판으로 선조를 생각하며 쓴 것이라고 한다.

 

무기라는 이름이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編)에 나오는 ‘浴乎沂 風乎舞雩(욕호기 풍호무우, 기수에서 목욕하고 풍우에서 바람 쐰다)’에서 따 왔다는 얘기도 있다. 공자가 네 제자에게 ‘너희를 알아준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증석(점)이라는 제자가 대답한 말이다. 공자도 그 말을 듣고 ‘나도 함께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에 묻혀 지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말로, 조정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은 채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한 주재성의 생각과도 맥이 닿는다. 특히 연못 옆에 서 있는 누와 정도 모두 자연을 벗하며 사는 선비정신을 담은 명칭을 쓰고 있어 더욱 그렇다.

 


 풍욕루 앞 소나무 너머로 연못 한쪽에 서 있는 하환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무기연당은 건축적으로 조선후기 연못의 정수를 보여주는 백미로 꼽힌다. 외곽에 석축을 쌓고 가운데에는 석가산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풍욕루 앞쪽에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고, 소나무 밑에는 탁영석으로 된 계단이 있다.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으로 이곳이 맑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석가산은 중국의 전설속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을 형상하는 것으로, 양심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곧 이곳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정신을 수양하겠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읽힌다. 양심대 아래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을 새겨 놓았는데, 이또한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뜻이다.

 


풍욕루는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배치돼 있다. 방위의 문고리 장식이 특이하다.

 

 

고고한 선비정신을 품은 ‘풍욕루’

연못 옆 한쪽에 서 있는 ‘풍욕루’와 ‘하환정’도 모두 선비의 고고함을 표현한 이름들이다. 먼저 풍욕루를 보자. 이는 ‘바람에 몸을 씻는다’는 뜻으로 ‘씻는다’는 뜻의 ‘浴’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탄관 신욕자 필진의)’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떨어서 입는다’는 뜻으로 세속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누의 이름인 풍욕루의 현판과 별도로 ‘경(敬)’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이것도 그냥 흘려 지나쳐서는 안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다. 이는 주역에 나오는 ‘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의입이덕불고(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풍욕루에는 사방으로 창호가 설치돼 있다. 특히 방 뒤쪽으로 난 조그만 창호가 눈길을 끈다.

 

이 글자는 또한 정축지변(丁丑之變)에서 비롯된 소수서원의 ‘경(敬)’자 바위와도 관련이 있다. 정축지변이란 순흥도호부(현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귀양을 가 있던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당시 순흥부사였던 이보흠(李甫欽)과 의기투합, 영남의 인사들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일로 금성대군도 사약을 받았고, 이보흠도 참형을 당했다. 순흥은 현으로 강등당하고 인근 30리의 주민들도 모두 처형당했으며, 그 핏물이 10리를 흘렀다고 한다.

 

이때 주민들이 수장된 곳이 바로 소수서원의 ‘경’자 바위 아래였다. 후일 이곳에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였던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면서 그때까지도 떠돌던 억울한 혼령들을 달래기 위해 친필로 바위에 ‘경’자를 써 넣고 제사를 지내자 더 이상 혼령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백운동서원이 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주세붕 또한 함안 칠원 출신으로 주재성은 바로 그의 방계자손이다. 즉 주재성이 풍욕루에 ‘경’자의 현판을 걸어놓은 것은 바로 이같은 선조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조선의 선비로서 자신이 어떻게 학문을 연마하고 어떤 정신을 가져야 할지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하환정은 은둔하는 학자의 삶을 담은 공간이다. 방 앞과 옆으로 너른 퇴를 두고 있으며 난간을 달았다. 2 하환정 맞은 편에 서 있는 충효사는 주재성을 주벽으로 배향한 기양서원을 대신해 1971년에 세운 것이다. 기양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때 훼철됐다. 3 무기연당 옆에 있는 오래된 나무의 모습이 특이하다.

 

 

초야에 묻힌 학자의 삶 담은 ‘하환정’

하환정은 초야에 묻혀 은둔의 삶을 사는 선비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하환이라는 이름의 ‘환’은 ‘삼공불환차강산(三公不換此江山)’이라는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삼공벼슬에도 이 강산을 놓을소냐’는 뜻이다.

 

후한 광무제 시절 황제의 죽마고우였던 엄광(嚴光)이라는 인물은 높은 학식이 있었음에도 광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거의 삶을 즐겼다. 그런 그의 삶을 두고 후에 지은 시의 한 구절이 바로 ‘삼공불환차강산’이다. 임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산 학자의 정신을 대변하는 문구로 조선 선비의 좌우명이 됐다고 한다. ‘하환’이란 ‘어찌 바꾸겠느냐’는 뜻으로, 끝내 벼슬을 마다한 주재성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문구인 셈이다.

 


 풍욕루의 들보와 공포 등 건축적 장식도 눈길을 끈다.

 

연못 옆에 있는 풍욕루와 하환정은 각기 높이를 달리하며 서 있다. 하환정은 지면에 가깝게 세운 반면 풍욕루는 높은 기단을 만들어 계단을 오르도록 돼 있다. 하환정에는 작은 방 앞으로 툇마루 형식의 마루를 양면으로 깔았는데, 마루 끝에는 고식의 난간을 설치했다. 방 뒤에는 작은 창호를 냈다.

풍욕루는 하환정보다 규모가 다소 크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방을 배치한 형태이며, 방앞에는 너른 퇴를 두었다. 특히 풍욕루의 방 창호위에 달린 문고리 장식이 일반 건축물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이한 양식을 보여준다. 들보와 공포의 모양도 눈길을 끈다. 방마다 아궁이를 두고 뒤쪽으로 작은 창호를 만들어놓은 점도 특이하다. 문을 열어놓으면 사방이 트이는 셈이다.

 

하환정과 마주보고 있는 곳에는 충효사가 서 있는데 이는 주재성을 주벽으로 배향했던 기양서원(沂陽書院)을 대신해 1971년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무기연당을 두르고 있는 담장 한쪽에는 본채와 출입할 수 있도록 작은 일각문을 냈는데, 기록에는 이곳을 영귀문(詠歸門)이라 했다고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문 위에 ‘한루문(寒樓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무기연당으로 출입할 수 있는 일각문, 기록에는 당초 ‘영귀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돼 있으나 지금은 ‘한루문’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부모와 나라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 담은 ‘감은재’

이 집의 본채는 솟을삼문과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문위에는 충효정려가 나란히 붙어 있다. 충신정려는 주재성이, 효자정려는 주재성의 장남인 감은재(感恩齋) 주도복(周道復)이 받은 것이다. 주도복은 어머니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목숨을 연장케 했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왼쪽으로 사랑채가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소박한 규모인 사랑채의 당호가 주도복의 호와 같은 감은재다. 감은재란 이름은 부모와 나라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주도복은 영조임금이 승하한 후 3년동안 궁궐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 집의 사랑채 역할을 하는 감은재. 부모와 나라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붙인 이름이다.

 

감은재는 주도복이 서실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안내문에는 문집책판을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다. 책판이란 주재성이 지은 중용과 대학의 어려운 구절을 해석한 ‘용학강의’와 삼강오륜의 도를 밝힌 ‘오륜론’ 등을 말한다. 사랑채는 대청위에 현판이 붙어 있고, 대청 뒤로 작은 퇴와 판장문이 있다.

 

사랑채 옆으로는 작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안채로 들어갈 수 있다. 안채는 ‘ㅡ’자형의 평면으로, 정면이 5칸 규모로 꽤 큰 편이다. 측면은 1칸으로 홑집 형태다. 방앞으로는 퇴를 두었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안채는 전면에 유리를 설치하는 등 당초의 형태에서는 많이 벗어난 모습이다.

 


무기연당의 솟을삼문. 충신정려와 효자정려가 나란히 붙어 있다.

 

안채 뒤에는 사당이 있는데, 이 사당은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 사당이란 임금의 명으로 ‘영원히 위패를 옮기지 말라’고 한 사당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경우 보통 4대조를 모시는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임금이 불천위를 명하고 오래도록 그 정신을 기리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주재성의 충절을 높이 평가한 것을 의미한다.

 

불천위가 있는 집은 대개 종가로 내려온다. 본채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입구에는 ‘교양 있고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하자’라는 현판이 세로로 붙어 있다. 아마도 주씨 가문의 가훈처럼 내려오는 글귀인 듯하다. 이 글귀처럼 이 집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초야에 묻혀 지내는 올곧은 선비정신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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