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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군 광석면 노강서원]
유교적 위계질서 갖춘 서원

논산에 있는 노강서원은 명재 윤증을 비롯한 기호학파 소론의 인물들을 제향하고 있는 충남지역의 대표적 서원중의 하나다. 특히 기호지역에서 볼 수 있는, 평지에 건립한 서원으로서의 공간적 위계를 부여해 건립한 서원이다. 정문에 해당하는 솟을삼문과 강당, 내삼문, 사당, 동서재 등이 유교적 위계질서에 따른 엄격하고 정연한 배치를 보여준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항공사진 블루버드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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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버드 항공

 

논산에는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유명한 서원 두곳이 있다. 하나는 돈암서원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노강서원(魯岡書院)이다. 이들 두 서원은 조선시대 각기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노론과 소론의 거두들을 제향하고 있다. 그런 탓에 조선 말기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는 곳이다.

 

돈암서원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이다. 김장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맥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송시열은 예송논쟁 등을 거치며 노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들외에도 김장생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도 배향하고 있다.

 


노강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계단위에 있는 외삼문

 

 

300년동안 원형을 지켜온 문화유산

돈암서원보다 40년 늦게 건립된 노강서원은 팔송(八松) 윤황(尹惶)과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윤증은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송시열과 결별했는데,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들 외에 노강서원에는 윤증의 아버지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도 배향하고 있다.

 

회니시비란 윤증과 송시열간의 갈등을 일컫는 사건이다. 당초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윤증은 자신의 아버지인 윤선거와 송시열의 오해를 풀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갈라서게 됐다. 회니란 이름은 은진 송씨의 세거지인 대전 ‘회덕’과 파평 윤씨의 세거지인 ‘니산(현재지명 노성)’에서 따온 것이다.

 


 노강서원 강당과 동서재. 강당은 교육을 하기 위한 공간이고,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숙식하면서 공부하는 공간이다.

 

회니시비는 윤증이 아버지인 윤선거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한데서 비롯됐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과거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사상 등을 문제삼아 행장을 정리하는데 정성을 들이지 않았다. 이에 윤증이 미진하다고 여겨 몇년후 개찬을 청했으나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윤증과 송시열은 주자학에 대해서도 대의명분과 현실론적 접근으로 대립했다. 이같은 일들을 계기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강서원도 곡절을 겪게 된다. 1674년 건립된 노강서원은 건립된지 8년이 지난 1682년 당시 임금인 숙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송시열과 윤증이 대립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이후인 1714년 가례원류 찬술문제로 노소갈등이 커지면서 윤증이 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노강서원의 사액마저 철거되기에 이른다.

 


강당 전경.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충남지역에서 대표적으로 큰 규모다. 기단위에 선 모습에서 옛 선비의 기품이 드러나는 듯하다.

 

그러나 경종 2년인 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 4대신이 출척되고 소론이 재집권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윤선거와 윤증 부자의 신원이 이루어져 작위가 회복되고 노강서원도 다시 사액을 받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723년 1월에는 경종 임금이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할 것을 명했다.

 

‘치제’란 임금이 공신이 죽었을 때 제물과 제문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곧 공신의 예우로 대한 것이다. 노강서원에 윤증이 배향된 것도 1723년의 일이다. 

 

이처럼 건립 이후 정치적 대립 등의 갈등에 휘말려 적지 않은 곡절을 겪은 노강서원이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3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원형을 보존하며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또한 사액과 철액, 소장 문서 목판의 훼손, 제향인물의 삭탈과 복관 등 그 변천사도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창건 당시 주향으로 배향된 윤황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자 사위다. 성혼은 신라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선비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문묘에 배향된 18현중 하나로 동방의 성현으로 일컬어지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퇴계의 주리론(主理論)과 율곡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한 절충파의 원조로 꼽히기도 한다.

 


1 장대석을 정교하게 쌓아 기단을 만든 점이 강당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2 강당의 측면.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점과 함께 박공널 아래 눈썹지붕을 붙인 점이 특이한 건축수법이다.

 

윤황과 함께 배향된 윤문거와 윤선거는 모두 그의 아들이고, 윤증은 그의 손자다. 윤선거는 김장생의 문인으로 충청5현의 한사람이다. 윤증은 송시열과 갈라서면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즉 노강서원은 노론계를 대표하는 돈암서원과 함께 소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이지역 양대 학맥을 대표하는 서원인 셈이다.

 

특히 윤증은 가장 늦게 노강서원에 제향된 인물이지만, 기실은 서원의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생전에 조정으로부터 많은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던 탓에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가 출사하지 않았던 것은 송시열과의 절의와 윤휴와의 친분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충청지역 소론계 서원의 수장 역할을 한 노강서원에는 제향인물들의 문집 등 다양한 자료가 소장돼 내려오고 있기도 하다. 창건과정과 연혁은 물론 중수시의 부조록, 학규와 완문, 전장기(傳掌記)와 도조기(賭租記) 등 사회경제적 자료들도 다양하다. 특히 용하기(用下記)와 전장기 등은 서원 문건의 인수인계서로서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강당의 분합문과 천장, 대청 등의 모습. 충남지역의 대표적 서원답게 선의 흐름이나 목재의 사용, 건축수법 등이 뛰어나다.

 

 

지붕과 기단, 공포 등 뛰어난 건축수법 보여주는 강당

노강서원이 자리잡은 곳은 마을 뒤편 산자락이 길게 뻗어 이룬 나지막한 구릉을 등진 곳이다. 기호지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서원이다. 마을 앞으로는 개울이 감돌아 나간다. 이처럼 평야지대에 자리잡았으면서도 서원으로서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고려시대의 민간교육기관이었던 소규모 서재(書齋)가 조선시대에 와서 발전된 형태를 띈 것이지만, 서재가 단순히 강학공간이었던데 비해 서원은 강학과 함께 선현을 모시는 제향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러한 제향기능으로 인해 서원이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서원의 건축 또한 서원의 기본성격에 맞춰 이루어졌다. 교육을 하는 공간과 공부하는 공간, 제사를 지내는 공간 등이 구획된 것이다. 강당은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즉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친다. 강당 앞쪽 양옆에 배치된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숙식하면서 공부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강당 뒤쪽에는 선현들의 제사를 위한 사묘(祀廟)를 따로 두었다.

 


 노강서원은 사액과 철액, 제향인물의 삭탈과 복관 등 정변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이같은 기본공간외에 서적 등을 보관하는 장판고나 제기고, 그리고 학생들의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한 교직사 등을 두기도 했다.

 

노강서원도 이같은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에 홍살문을 두고 홍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외삼문을 만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강당이 크게 자리잡고 있고, 양쪽으로 동재와 서재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에는 내삼문과 사당이 제향공간을 이루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충남지역 서원중 대표적으로 큰 규모이다. 가운데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한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대청에는 4분합문을 달았고, 온돌방에는 2분합문을 설치했다. 대청과 온돌방사이에 설치한 분합문은 소수서원이나 도동서원 등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모습이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강당건물의 기단과 공포이다. 기단의 장대석은 3벌대로 비교적 높게 쌓았는데, 정교하게 다듬은 점이 강당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이 들어간 원주를 세웠다. 공포도 화려함과 검박함을 함께 갖추고 있는 고풍스러운 양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이 지역 중심서원으로서 건물의 기품이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강당의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이는 같은 강학기능을 갖고 있는 향교의 명륜당 등이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특이한 점으로 꼽힌다. 한편으로 맞배지붕이면서도 팔작지붕이 지닌 곡선미를 살린 점이 뛰어난 건축수법을 엿보게 한다. 맞배지붕 측면에 박공널 아래에 눈썹지붕같은 덧지붕을 붙인 점도 특이하다. 아마도 이는 풍우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것과 함께 어색하게 높은 건물에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는 효과도 있다.

 

강학공간보다 다소 높게 설치한 제향공간에서도 노강서원은 엄격한 예적 질서를 따르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즉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을 일곽으로 처리하지 않고 따로 3개의 문을 만들었다. 이는 신과 사람의 출입동선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흔치 않은 형식이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돼 있으며, 간결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선비가문의 엄격함이 서원건립에도 영향

노강서원은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고택이 있는 노성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노성면 일대는 충청지역 유학타운으로 일컬어도 좋을 만큼 유교와 관련된 건물들이 많다. 고택을 중심으로 노성향교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궐리사,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문중서당으로 일컬어지는 종학당(宗學堂)이 있다.

 

특히 노강서원에 제향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파평 윤씨 가문은 당시 호서지방의 명문가로 이미 이름을 얻고 있었으며, 문중서당인 종학당 등을 통해 높은 수준의 가학(家學) 전승을 통해 많은 대과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문에 벼슬을 지낸 이가 많았음에도 윤선거와 그의 아들인 윤증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인물들이다.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윤황가문의 가정교육은 엄격했다. 윤황은 선비가문으로서의 절제와 검약을 당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자식을 훈계하는 글’을 두차례나 내려 가정교육의 모범을 세웠다. 이같은 교육의 엄격함이 노강서원의 건립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제향공간. 노강서원은 건립 당시 정형적인 배치가 해체되는 경우가 많은 시기였음에도 엄격한 위계질서를 따르고 있다.

 

노강서원이 건립된 시기에는 대체로 정형적인 배치가 해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노강서원은 이전 시기의 엄격한 질서체계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 사당과 일곽을 이루는 내삼문의 경우 1동으로 처리하지 않고 3동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예적 질서를 따르기 위함이다.

 

노강서원은 서원건축의 전형적 배치와 함께 기호지역 유교건축의 양식적 특징과 지역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엄격한 공간질서 체계를 갖추고 있는 점도 건물의 가치를 높여준다. 특히 기호지역 유학의 양대학맥을 대표하는 곳이자, 한 가문의 영욕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서 300년 넘게 지켜온 발자취가 건물의 고풍스러움에도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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