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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고가]
위엄과 격식 갖춘 조선시대 명 유학자의 종가

청천리 고가는 조선시대의 명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종가로 내려오던 집이다. 지금은 전체적인 집의 형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집의 규모도 클 뿐 아니라 안채나 사랑채나 사대부가의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축을 맞춰 옆으로 나란히 배치된 점과 사랑채 누마루가 2단으로 구성된 점 등이 특이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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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군 청천리에 있는 고택 전경. 사랑채와 안채가 담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배치된 모습이다.


몇 년전부터별러오던 청천리 고가를 드디어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 집은 1984년 1월 충북 괴산에서 칠성면에 있는 김기응 가옥과 함께 국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집이다. 지정 당시 취재를 계획했지만, 충북양로원으로 사용되던 집이어서 취재를 하지 못하고 김기응 가옥만 취재했다.  

 

2011년 여름, 문화재 보존 및 관리가 강화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취했더니 ‘양로원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보수에 들어가 공사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또 되도록 주변에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진 계절에 사진을 찍으면 보기 좋을 것이라는 안내도 해주었다. 그렇게 몇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이번에 취재를 하게 된 집이다.

 


 안채 전경. 마당에 놓인 널찍한 장독대가 옛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해방전 고택 구입해 양로원으로 사용

이 집은 한동안 조선시대 우리나라 양대 유학계의 한 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종가로 내려오던 집이다. 그러던 것이 1944년부터 사회복지법인인 충북양로원에서 노인들을 위한 사회복지시설로 사용해 왔다. 이후 1996년 현재의 집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양로원으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빈 가옥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청천리 고가의 소유자는 충북노인실버요양원이다. 충북양로원의 바뀐 이름이다. 당초 차재윤이라는 분이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의 보호를 위해 고택과 주변의 땅들을 매입한 것이 양로원의 시작이었다. 당시 양로원이 전국에 4곳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사랑채 뒤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사당이 보인다.

 

이후 이곳 면사무소에 재직하던 안경원(安景元)씨가 원장을 맡아 오랜 기간 운영해 왔다. 지금은 양로원이 실버요양원으로 바뀌었으며, 안씨의 며느리인 우영환(禹英煥)씨가 대를 이어 원장을 맡고 있다. 수용시설을 옆에 별도로 지어 국가지정 문화재를 온존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된 점이 다행스럽다.

 

우리나라 유학계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내려오는 영남학파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에서 시작된 기호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암은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가 벼슬에 나가 있는 동안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 할 만큼 그는 정치와 사상에서 조선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그와 관련해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내용으로 1,2차에 걸쳐 벌어진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있다. 예송논쟁은 임금이 죽은 후의 복상문제에 관한 논쟁이다. 1차 예송논쟁에서 우암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1년상을 주장했고,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세력은 3년상을 주장했다. 결국은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없이 1년상복을 입게 한 규정에 따라 서인이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예송논쟁은 효종(孝宗)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자의대비가 어떻게 상복을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졌다. 2차 예송논쟁에서는 당시 임금인 현종(顯宗)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됐다. 1,2차 예송논쟁은 겉으로는 예론의 해석을 두고 빚어진 일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철학과 정국 주도권 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1 안채에서 바라본 광채. 장독대 옆으로 우물이 있다. 2 새로 복원한 굴뚝의 모습이 아름답다. 3 안채 부엌의 수장고. 벽을 내밀어 만든 것이다. 이 집의 부엌은 일반 사대부가의 부엌과 비교해서도 매우 커 살림규모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4 밖에서 본 부엌의 모습. 광창 옆으로 돌출된 수장고가 보인다.

 

 

청천리 일대 우암관련 유적 많아

이 집이 우암의 종가였던 만큼 집 주변에는 우암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청천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양계곡이 있다. 화양계곡은 효종이 죽은 후 우암이 내려와 산수를 즐기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모두 아홉계곡이 있어 화양구곡으로 불리는 화양계곡의 풍광은 지금도 일품이다.

 

이곳에는 암서재(巖棲齋)와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암서재는 반석위에 집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하던 곳이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인 권상하가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던 사당이다. 일제때 건물을 철거당해 최근 다시 정비하고 있다고 한다. 

 

청천리 고가의 집 뒤 산에는 우암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조선시대 명 유학자의 묘소답게 문인석과 망부석 등을 갖추고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본래 수원 무봉산에 있던 것을 1757년(영조33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묘소옆에 있는 신도비는 국난이 있을 때 땀을 흘린다고 한다. 묘소옆에는 재실이 있다.

 


안방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현재 실버요양원 원장을 맡고 있는 우영환씨에 따르면 청천리 고가를 매입한 차재윤이라는 인물은 당초 보부상이었다고 한다. 그가 이곳 고택과 땅을 매입하고 당시 면에서 일하고 있던 안경원씨에게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 운영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안경원씨는 그때부터 50년 넘게 이곳을 운영해 왔다.

 

우암과 같은 명문가의 종가가 남의 손에 넘어간데는 무언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종가였던 집이 차재윤씨에게 넘어온 과정에 대해 우씨는 “이 집이 종가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5대째 친 자손이 없이 양자로 계속 대를 잇게 돼 집을 팔고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한다.

 

한편 청주시 문화동에 살고 있는 우암가문의 종손 송영달(宋永達) 옹은 “집이 팔리게 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다만 아흔이 넘은 그가 이 집에서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것은 기억하고 있다. 이 집외에 집 뒤에 위치한 묘소와 재실 등은 지금도 여전히 종가에서 관리하고 있단다.

 


 사랑채 전경. 한옥의 곡선미를 보여준다.

 

 

규모 크고 수장공간 많은 안채

우암의 종가였던 만큼 당초 집의 규모가 꽤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 사당 등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는 가운데 사잇담을 두고 서로 축을 맞추어 나란히 배치돼 있는데, 이는 일반적인 사대부가의 형식과는 다른 특이한 형식이다.

 

안채는 정면 7칸에 양쪽으로 3칸씩 날개를 달아내 ‘─’자 형을 취하고 있으며, 매우 큰 규모다. 평면구성은 남도방식을 따르고 있다. 서쪽 좌우 2칸에 넓은 부엌을 설치하고, 이어서 안방과, 웃방 그리고 대청이 위치한다. 대청 건너편으로 건넌방이 배치됐다. 넓은 부엌 옆 날개쪽으로도 방이 2개 더 붙어 있다. 부엌의 아궁이는 안방쪽과 날개방쪽으로 모두 만들었다.

 

안채 대청앞에는 분합문을 설치해 들어열개로 열 수 있도록 해놓았다. 사랑채 대청앞에도 들어열개로 여닫을 수 있는 문을 달아두었는데, 이는 겨울에 추위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 웃방과 대청사이에도 분합문이 설치돼 있다. 창호는 대부분 2중으로 설치돼 있는데 이역시 추위를 막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싶다.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일각문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건넌방 앞까지 넓직한 툇마루를 깔았다. 안채 대청의 뒷부분에도 넓직한 툇마루를 깔았다. 그러나 안방과 건넌방의 뒤쪽은 퇴를 내지 않고 방을 그만큼 내어 넓게 만들었다. 넓은 부엌이 있는 반대편 동쪽 날개에는 2칸의 아래위 건넌방과 작은 부엌이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안채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장공간의 활용이다. 안방에서 시작된 다락이 고방 위까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웬만한 대가집에서도 보기 어려운 넓은 규모다. 날개채의 방에도 작은 수장고를 두었다. 부엌에도 넓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부분을 밖으로 내밀어 수장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점이 이 집의 부엌살림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안채에서 또하나 눈에 띄는 점은 안채 대청앞에서 큰 방 사이에 복도같은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이 복도공간을 통해 안채의 몸채와 날개채가 분리되는 느낌을 준다. 이같은 공간구성 수법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복도의 끝에는 작은 문이 달려 있다. 아마도 안채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누마루를 2단으로 설치한 사랑채

사랑채는 정면이 6칸, 날개채는 2간 맞배집으로 역시 ‘─’자형이며 안채보다는 약간 작다. 평면구성은 서쪽부터 부엌과 골방, 상하 2칸 크기의 안상랑이 위치하고, 윗사랑과 대청, 그리고 작은 사랑방으로 이어진다. 사랑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로 넓은데, 1칸의 규모가 다른 칸에 비해 넓은 점이 특징이다. 정면으로 분합문과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사랑채도 안채와 마찬가지로 대청 뒤로 넓은 툇마루를 깔아놓았다. 그러나 안채의 방들에는 퇴를 두지 않은 것과 달리 사랑방 뒤로는 작은 퇴를 두었다. 사랑채에서는 특히 누마루를 2단으로 조성한 점이 특이하다. 일반 사대부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사랑채 측면으로도 누마루 낮은 부분까지 퇴를 두었다.

 


 사랑채 대청. 양옆으로 분합문이 있다.

 

사랑채 또한 수장공간을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작은 사랑방 옆에 널따란 다락을 설치했으며, 다락 밑으로는 아궁이가 설치돼 있다. 또 작은 사랑방 뒤에도 벽장을 설치했다. 아마도 이는 책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됐던 듯 싶다.

 

사랑채 뒤로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사당이 있다. 전퇴를 두고 있는 사당은 정면 4칸 규모인데 보통의 사당이 3칸으로 이루어진 점에 비해 넓은 셈이다. 양쪽에 구들을 두었으며 가운데는 대청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으로서는 특수한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집이 우암의 종가였다는 점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이 집을 처음 건립한 이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괴산군청 자료에는 우암의 7대손인 송병일(宋秉一)이 지은 것으로 나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자료에는 충청감사를 지낸 우암의 후손 송시현이 별당건물로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종손인 송영달 옹도 집의 건립시기에 관해서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안채 앞에는 커다란 장독대와 우물이 있다. 그리고 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담에는 작은 일각문이 있다. 사랑채 앞으로는 문간채가 자리한다.

얼핏 보아도 집의 당초의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크고 모양새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문도 이 정도 규모의 집이면 당연히 솟을대문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우영환 원장의 설명으로는 사당도 담으로 분리돼 있었지만, 아직 복원이 안됐다고 한다.

 

어차피 별도의 건물을 짓고 요양원을 옮겨 고택을 온존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됐다면 집의 원래의 모습을 찾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아직은 이 집에 살았던 우암 종가의 종손도 살아 있는 만큼 기억을 떠올리면 원래의 모습으로의 복원도 가능하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온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다. 그만큼 그는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종가라면 문화재적 가치도 충분히 있다. 그런 점에서 더 늦기 전에 복원을 서두르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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