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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그리는 한국화가 김도영]
한옥에서 우주를 만나다

앳된 여자아이가 한옥을 노닌다. 

대청마루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담장 밖으로, 다시 마당으로 방으로, 긴긴 여름 낮을 한옥과 숨바꼭질 중이다. 아이에게 마당은 도화지가 되고, 뒤편 대숲은 노래가 되어 어른들이 돌아오는 석양 무렵까지 심심함을 잊게 한다.

그 아이가 도시로 나와 그림공부를 하고 결혼해 두 아들을 키우며 다시 한옥을 불러냈다.

지난해 ‘한옥에서 한글을 보다’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어 신선함을 전하고 올여름 다시 한옥의 기억을 담은 ‘長長夏日’전으로 찾아온 한국화가 김도영이 바로 그 아이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촬영협조 전주한지산업지원센터 063-28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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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물감으로 붓질한 듯한 패턴의 원피스가 한옥카페의 처마와 유독 잘 어울리는 그녀다. 자신을 한국화가 김도영(42)이라고 소개하는 그녀를 만나 찻집으로 들어선 이후 굵은 장대비가 한바탕 휘몰아쳤다.

“이런 날 한옥에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죠. 처마 낙수소리가 정말 좋거든요.”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바라보며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다. 일하는 부모 때문에 김제의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어린 소녀는 집이 놀이터이자, 심심함을 달래주는 친구였던 셈이다.

 


 길고 긴 여름날 63.5×63.5×3pcs 토분, 분채, 한지

 

“전라도 지역의 한옥은 앞마당이 정말 넓거든요. 집 뒤로는 대나무가 빼곡한 숲이 있었고요. 바람에 쓸리는 대숲 소리를 들으며 넓은 마당을 도화지 삼아 그림 그리며 놀았어요. 그때의 기억이 작품에 큰 영향을 준 게 사실이지요.”

 

작가의 길로 접어든 그녀는 장지를 앞마당 삼고 토분을 재료 삼아, 어린시절 마당에서 놀듯이 즐겁게 그림을 그려왔다. 초기 작품에는 아이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벌거벗은 악동들이 마당을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투영돼 있다. 최근 몇년사이 한옥에 몰입하기 시작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다.

 

“강릉의 오죽헌을 가본 적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좋은 한옥이 죽은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한옥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생각에 한옥을 주제로 작업하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김도영 작가의 전시가 열린 전주 한지산업지원센터 전경. 연중 다채로운 전시와 체험교육이 열리는 곳으로,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자리한다.

 

한옥을 그리겠다고 마음을 먹자마자 그녀는 돌연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떠난 후 돌아오기까지 4년이 걸렸다. 그곳에서 한옥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미국에서 사귄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줄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글의 원리를 알려주니 쉽게 알아듣더라고요. 한글이 정말 대단한 언어임을 깨달았죠. 한옥도 마찬가지예요. 외국인들은 한옥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갖고 있어요. 채나눔이라든가, 재료라든가, 건축양식에 대해 물어오곤 했죠.”

 


1 건너 바라보다 63.5×63.5cm 토분, 분채, 한지 2 그 해 여름 40.9x31.8 토분, 분채, 한지

 

가장 함축적으로 추상화된 문자인 한글의 조형 틀 안에, 단아하고 절제된 한옥이미지를 더해 풍경을 그려보겠다는 작가의 구상은 세종문화회관 한글갤러리 공모전과 만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5월 열린 ‘한옥에서 한글을 보다’전에서 작가는 한글과 한옥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명쾌하게 보여주었다.

 

“한옥은 지붕, 문, 계단, 기둥들로 그 만의 고유한 조형원리를 가지고 있죠. 한글은 간결하면서 매우 함축적인 조형미를 지녔고요. 두 매개체의 공통된 구조적인 조형미를 찾아 따로 또 같이 담아본 거랍니다.”

 

작가는 한옥의 지붕에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대입하고, 한옥에서 느껴지는 온화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반듯하고 정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림기법도 ‘한옥스럽다’. 한지 위에 숯, 황토, 백토 등의 재료를 얇게 겹겹이 올리면서 긁고 반복된 붓질로 마당을 표현했다. 이들 재료를 잘 섞어 막 화장을 끝낸 듯 푸실푸실한 느낌을 살려내는 것도 그녀만의 표현기법이다.

 

 

갈색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김도영 작가. 한옥에 대한 각별한 추억과 애정이 그녀의 작업을 이끄는 힘이다.

 

지난 7월30일부터 전주 한지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長長夏日’전에서 작가는 본격적으로 한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옥에서 느꼈던 모든 것과 소소한 일상들을 이야기하듯 풀어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림 속 한옥에는 어린 소녀가 체험한 우주가 스며 있다.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고무신과 마당에서 날려 보내던 종이비행기 그리고 자신이 머물렀을법한 모기장 둘러친 작은 방 풍경 등등 그녀의 그림 속 세상에는 여름날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들어서 있다. 작가 김도영은 삭막함과 건조한 공간에 사는 이들을, 이곳 한옥으로 초대하고 있다.

 


1 꿈꾸는 달 53x53 토분, 분채, 한지 2 달빛 아래 53×90cm 토분, 분채, 한지 3 한옥에서 한글을 보다-I 45.5×53.0cm×9pcs 황토, 숯, 분채, 한지

 

여름을 여름답게 만드는 아름다운 한옥에서 추억의 조각보를 이어 만든 나의 그림은 개인의 소소한 삶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비록 공간을 막고 있는 담이 있지만 동양화 시점 중의 하나인 부감법을 이용해 구석구석 그 안의 삶과 일상을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닫힌 공간일지라도 누구나 엿볼 수 있는 개방형 시점인 것이다.


집이라는 편안하고 행복한 공간에서 은밀한 공간을 꾸며가고 제작해내는 나의 직업이 너른 세상과의 위대한 소통을 원하는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 2013 長長夏日 작가노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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