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피플&컬처 > 컬처
[바르셀로나를 꿈꾸다]
안토니 가우디

무려 7곳의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그는 자신의 사후에도

지어지고 있는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설에 죽는 날까지 열정과 희생을 바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과 인생이 한 세기를 훌쩍 넘은 이 시간 한국에서 재조명 되고 있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자료제공 (주)씨씨오씨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실에서 연구 중인 가우디(리카르드 오피소, 1990년)

 

지난 7월 31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안토니 가우디전이 시작됐다. 국내에서는 3번째 열리는 그에 관한 전시다. 이번 전시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다양한 방면으로 안토니 가우디를 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가우디 연구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카탈루냐 공과대학의 가우디연구원이 전시를 구성한 점도 기대를 갖게 만든다.

 

 

1 가우디는 자연에서 실마리를 가져온 곡선의 건축을 현실로 보여주었다. 2, 3 직각의 벽에서 벗어나 곡선의 자유로운 평면을 구사한 카사 밀라 주택의 모형

 

 

4 안토니 가우디의 설계를 모형으로 실현한 모습 5 안토니 가우디의 흉상, 1924년(조안 마타말라 작) 6 구엘공원에 적용한 트렌카디스 기법의 육각형 조각

 

 

전시에는 그의 다채로운 작업을 엿볼 수 있는 도면과 스케치, 가구와 장식물 등 170여 점이 대거 공개되고 있다. 실제와 같은 웅장한 모형들이 등장하며 그의 건축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점도 반갑다. 건축물을 촬영한 80여 점의 사진도 생생한 재미를 더해 준다. 더불어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은 한 세기 전 존재했던 건축가를 보다 친근하게 느끼게 만들고 있다.

 

무려 7개의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그를 예술성이 탁월한 천재건축가 정도로 판단하고 있다면 건축가의 정면만을 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건축이 예술성과 함께 경제성과 시공 용이성, 도시 주거의 쾌적성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 낳은 산물임을 엿보게 될 것이다.

 

 

▲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작업실 침상, 1925년경

 

 

가우디는 누구인가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넷(Antoni Gaudi i Cornet, 1852~1926)은 백 년 전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에서 활동한 건축가다.

 

그는 대장간이 있는 마을의 소박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리 세공 장인이었고, 어머니가 텃밭을 가꾸며 가족을 부양했다. 어린 시절 보고 경험한 대장간 일은 훗날 여러 장인들과 친분을 이어가게 만들고 그의 작업에도 큰 영향을 준다. 평범한 노동자인 아버지 프란세스크 가우디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병약하기 그지없던 어린 가우디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장래 이 건축가가 이룬 빛나는 성과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 농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자연의 법칙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라는 가우디의 건축 철학은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것으로 보인다.

 

학창 시절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가우디의 아버지는 대장간 문을 닫고 바르셀로나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가우디는 건축학교에 입학하고, 19세기말 도시의 건축계를 주도하던 건축가들의 도면공으로 일하는 기회를 찾아 나선다.

 

전시에서는 이제 갓 건축가로서 일을 시작하는 청년 가우디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실에서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사는 말년의 가우디가 병원의 작은 침대에서 세상을 떠나 수많은 사람들이 추모하는 장례식에서 매장되기까지 한 인물의 변천사와 마주할 수 있다.

 


안토니 가우디의 대학강당 단면도(1988년 10월 22일, 건축학부 졸업작품)

 


천재 혹은 광인 건축학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2기생이었던 안토니 가우디는 여느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당시의 건축은 작업 자체보다는 이론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우디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재학기간 유명 건축사무소의 조수로 일하며 경험을 쌓는데 열중했다.

 

가우디가 처음에 조수로 일한 건축가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초대 건축가인 프란시스 코 데 파울라 델 비야르다. 훗날 가우디는 이 성당의 2대 주임건축가로 취임한다. 또, 가우디는 학창시절 시우타데야 공원 계획안을 맡은 명망 있는 장인 주셉 폰세레와도 작업했고, 직접 공원을 둘러싼 담장, 기념 분수, 거대한 저수조의 건설과 계산 등을 해냈다. 이 덕분에 그는 학교 수업에 출석하지 않았음에도 교수로부터 흔쾌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다. 1878년 졸업 즈음에는 일찍이 건축사 자격도 취득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교장이었던 엘리아스 로젠은 가우디에게 졸업장을 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여러분, 제가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광인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우디의 건축학교 졸업작품인 대학의 강당 프로젝트를 비롯해, 전도유망한 그의 보석 같은 학생 시절 도면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대학 강당 계획안은 웅장함과 장식성이 강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코메야 장갑 상점을 위한 진열대를 그린 스케치

 

 

이겨내기 위해서는 미친 듯이 일해야 한다

무명의 젊은 건축가 가우디는 명망 있는 공방에 드나들던 유명한 장인들과 친분을 맺으며 협업을 즐겼다. 그의 첫 작품은 바르셀로나 시에서 의뢰한 가로등이다. 가우디는 기능적이고 도시적이면서도 장식적이고 기술적인 모든 측면이 잘 드러난 가로등을 선보였다. 그의 초기작들은 당시대를 풍미하던 중세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장식과 기능을 모두 챙기는 데 주력했다. 

 

무명 건축가 가우디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어느 남성복 상점의 상품 진열대 제작 일이었다. 상품 진열대에 대단히 만족한 주인장 코메야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제품을 선보이기 위한 진열대를 가우디에게 의뢰하기에 이른다. 박람회장에서 이 진열대를 보게 된 에우세비 구엘이 가우디를 찾아가면서부터 건축가로서의 인생에 변화가 시작된다.

 

 

카사 바요트 빛의 파사오(중정)

 

 

운명적인 만남, 가우디와 구엘

가우디만의 독창적인 건축 세계는 에우세비 구엘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됐다. 구엘은 가우디의 아낌없는 후원자이자 그의 둘도 없는 친구다. 젊은 시절의 가우디에게 있어 최초의 중요작인 구엘 저택, 자유롭고 독자적인 형식을 취하는 구엘 공원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구엘의 한결같은 지지 덕분이었다. 1918년 구엘의 죽음으로 인해 지하 예배당만 건축된 채 미완성으로 남은 콜로니아 구엘 성당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지하 예배당

 

이번 전시에는 구엘 저택의 모형과 도면, 사진 등이 등장한다. 종교 행사, 음악회, 다양한 연회 등 구엘 가의 중요한 사교생활을 위해 설계한 중앙부 주변으로 배치된 실내는 호화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중앙부 천장에 만든 돔을 통해 들어서는 자연광은 저택에 위엄을 더해준다.

 

세계적 명소가 된 구엘공원은 구엘이 바르셀로나에 영국식 전원주택단지를 도입하고자 시작한 계획이었다. 가우디는 이곳에 세워질 60채의 주택을 위해 근사한 단지 개발 계획을 세운다. 두 채의 멋진 경비실이 세워진 정문과 구불구불한 벤치로 둘러싸여 도시를 내려다보는 넓은 전망대 광장 등이 인상적이다.

 

 

구엘공원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시 전경

 

가우디는 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멋진 트렌카디스 조각을 건축에 활용했다. 트렌카디스는 유리나 대리석, 에나멜이나 유약이 발라진 세라믹의 불규칙한 파편들로 만든 모자이크의 일종으로, 건축물의 곡면을 덮는 데 효과적이다. 또한, 가우디는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주변과 적절히 어우러지는 공사를 실행하는데 성공했다.

 

이번에 전시된 도면은 전체적인 주택 단지 계획을 살펴볼 수 있는 실시도면이다. 이 주택 단지는 경기 불황과 수요 부족으로 분양에 실패한 뒤 바르셀로나 시민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1 카사 칼베트의 후면 파사드 2 카사 비센트 3 카사 바트요의 후면 파사드 4 카사 밀라 주택의 파티오(중정) 5 가우디가 디자인한 인체공학적 형상의 손잡이

 

 

집은 가족이 사는 작은 나라 ‘도시주택’

안토니 가우디는 주택 건축에 각별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의 건축물 7군데 가운데, 4군데가 주택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그는 1898년부터 1912년에 걸쳐 19세기 중반부터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도시계획 지구인 에이샴플라에 위치할 세 채의 주택을 설계했다. 카사 칼베트(1898~1901), 카사 바트요(1904~1906), 그리고 카사 밀라(1906~1912)가 그곳이다.

 

결과적으로 가우디는 이 세 채의 주택을 통해 도시주택에서 정면과 후면, 지붕의 구성과 처리가 얼마나 건물의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며 높은 평가를 얻었다. 또한 파티오(중정)의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렸으며, 이를 통해 채광과 환기, 주거의 쾌적성을 모두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기능적인 주택을 실현했다. 또한 카사 밀라 건축에 이르러서는 내력벽 구조로 인해 직각으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주택 양식을 탈피, 기둥으로 실현한 혁신적인 자유 평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카사 바트요 주택의 정면 파사드

 

첫 작품인 카사 칼베트는 에이샴플라의 관행적인 도시주택 모델을 따랐다. 1층에 건축주가 소유한 섬유회사의 점포와 사무실을 두고, 본층을 자택으로 사용하도록 설계했다. 그럼에도 1900년에 바르셀로나시로부터 최우수 건축상을 받게 된다. 후면을 정면처럼 취급해 후면의 한정적 성격을 극복한 점을 높이 평가 받았다. 단순히 후면의 경관만 멋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개폐가 독특한 창을 달아 기능과 멋을 모두 챙겼다. 그밖에 건물의 중앙에 위치한 중정을 멋스럽게 설계해 도시주택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었다는 평을 얻었다.

 

 

카사 밀라 주택 전경

 

이후 가우디는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 도시 주택에서 눈에 띄는 발전을 보여준다. 재건축을 진행하려 했던 30년 된 주택을 개조한 카사 바트요에서, 가우디는 종전에 없던 아름다운 내부 공간을 창조하며 기존 주택의 형식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카사 바트요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가우디에게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이자 유행을 선도하는 도시적인 공간인 그라시아 거리의 가장 좋은 부지에 유례없는 주택을 건설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가우디는 이 자리에 카사 밀라 주택을 설계한다.

 

카사 밀라는 자유로운 평면이 도입된 최초의 공동주택이라고 볼 수 있다. 건물의 하중을 내력벽이 아닌 기둥이 감당함으로써 기존 벽식 건축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보다 연속적이고 열려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카사밀라는 외부의 형태뿐만 아니라 내부의 평면 역시 곡면으로 이뤄지며 아름다움 공간을 선보인다.

그러나 소유자인 로제르 세지몬 부인은 가우디의 건축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소송으로 까지 번진 상황에서 카사 밀라는 완공됐다. 카사 밀라는 가우디가 남은 생을 바쳤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설에 전념하기 전 완성한 최후의 주택이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가구를 적용한 카사 바트요 주택의 식당

 

 

도시주택에 실현한 가우디의 예술과 공예

가우디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기능성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인간의 신체에 적합한 가구를 제작했다. 가우디의 작품은 대부분의 동시대 건축가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장인들의 존재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나무 가구들과 나무 문, 나무 장식들은 주택의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특히 가우디는 파티오(중정)에 타일을 적용하길 좋아했다. 빛의 각도와 영향을 고려해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농담이 옅은 타일을 붙여 마치 물이 출렁이는 듯한 착각을 연출하기도 했다.

가우디는 구리 세공 장인이었던 아버지와 대장장이였던 큰아버지의 후손답게 금속 재료를 다루는 데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가 만든 금속 장식물들은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에 걸맞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주택 입구의 담장과 창살 등에 적용한 금속구조물들은 정원에 있던 실제 나뭇잎 형상을 따서 주조했다고 한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인체공학적 의자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성스러운 가족성당’이라는 뜻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열정과 희생을 바쳤던 곳이다. 그는 성당이 건설 중단 위기에 처하자 헌금 모금에 직접 나섰고, 다른 일에서 물러나 1926년 사망 때까지 성당에서 거처하며 건설과 계획안 구성에 전념했다.

 

1882년부터 건설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초기 계획안은 지극한 평범한 고딕양식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2대 주임건축가로 선정된 가우디는 이 양식이 20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계획안에 큰 변화를 주었다.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무엇보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가르켜 “형틀을 사용하지 않아 경제적이고 용이한 시공이 가능하며 기후 적응력이 훌륭한 건축물”이라고 설명한다. 놀랍게도 건축가는 예술적 감성을 표현하는데 있어 돌이라는 재료가 허락하는 가장 용이하고 경제적인 건설 방식을 찾으려했던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2026년 가우디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 완공될 예정이다. 지난 100년간 공사를 둘러싼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뢰인(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가우디의 말처럼 다른 건축가들이 건설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로지 기부금을 통해 건설되고 있는 이 성당의 건설과정을 담은 희귀한 기록사진과 성당의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다양한 모형과 도면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건축가로서 가우디의 열정과 희생, 숭고한 노력을 마음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