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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염근당]
현존하는 단 하나의 왕손 고택 조선왕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 40-1. 자은산 기슭에 자리한 ‘조선왕가’는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한옥호텔이다. 이 조선왕가가 각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이곳에 들어선 99칸 한옥 염근당 때문이다. 1800년대 창건되고 1935년 중수된 염근당은 원래 서울 명륜동에 있던 고종황제 영손인 황족 이근이 살던 고택이다. 지난 2008년 사라질 위기에 처한 왕가를 한 사업가가 연천으로 이전해 와 수년에 걸쳐 다시 지어낸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왕가’는 그저 한옥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유일무이한 ‘왕가’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할 수천년의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항공사진 블루버드항공 촬영협조 한옥호텔 조선왕가 (www.royalresidenc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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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발견된 국내 유일의 조선왕가

경기도 연천군 고문리 40-1번지에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단 하나뿐인 왕가, 조선왕가가 자리한다. 이곳은 자은산을 뒤에 두르고 멀리 한탄강이 휘감아 도는, 풍수지리적으로도 명당인 집터다. 태풍도 피해간다는 집터 앞으로는 150만평의 너른 평야가 펼쳐져 풍요로운 분위기가 물씬하다. 터의 중앙에는 99칸 한옥이라는 염근당이 ㅁ자 구조로 자리한다. 그 뒤편 언덕에는 아담한 별채 자은정이 비옥한 평야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한켠에는 서양식으로 신축한 갤러리와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99칸 한옥 염근당과 후원에 자리한 자은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경이다. 2008년 약 5개월간 해체한 트럭 300대 분량의 한옥을 현 위치인 자은산 기슭으로 옮겨 27개월에 걸쳐 본래의 그 자재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보수해 마침내 2010년 9월 7일 중건했다.

 

연천에 조선왕가가 자리하게 된 계기는 2008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명륜동의 오래된 한옥 염근당의 대들보에서 붉은 비단에 싸여진 상량문을 발견한 순간, 남권희(54) 조선왕가 호텔회장은 강력한 운명의 기운에 온 몸이 꽁꽁 묶여 버렸다고 회상한다.

 

“이 집의 꽃 한 송이, 돌 하나라도 반드시 신중하게 지키시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은택이 영원히 보존되게 하여 주소서!”

붉은 비단에 검은 먹으로 써 내려간 긴긴 상량문에는 이 집의 영원을 바라는 간절한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집의 주인이 고종황제의 영손이며, 바로 이근의 고택임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집의 이름도 풀어 놓았다. 염근당(念芹堂), 즉 미나리처럼 혼탁한 물 속에서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자라는 기상을 생각하는 집이라는 깊은 뜻이다.

 

 


1 해체한 한옥의 서까래와 대들보를 그대로 가져다 재건한 실내의 모습이다. 한옥의 아름다운 가치는 유지하면서 현대에 맞추어 공간의 편리함을 더했다. 2 염근당의 대청마루다. 후원을 차경으로 끌어들이는 전통한옥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성균관대가 염근당 터를 기숙사로 개발하기로 하면서 한옥을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지상권을 불하받은 남 회장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친 것이다. 적어도 상량문을 보기 전까지의 그는 한옥의 일부를 살림집 정도로 되살려내고 싶다는 정도의 구상을 하던 차였다. 붉은 비단의 상량문을 받아든 순간 그에게는 기와 한 장, 기둥 하나도 잃어서는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불타올랐다.

 


염근당은 17개의 한옥 객실로 이뤄져 있다. 모두 황토로 바닥과 벽을 만든 황토객실이다.

 

 

사업가가 사재 털어 이축, 한옥호텔로 되살려내

염근당의 주인 이근은 역대 왕의 종묘제례를 관장한 왕자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아들 중 세자로 책봉된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은 즉위식 후 궁 밖으로 나가 살도록 했다. 이 왕자들의 집을 ‘왕가’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남아있는 왕가가 없다. 적어도 남권희 회장이 염근당의 실제 주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왕실재산을 몰수해갔고, 이후 들어선 이승만 정부가 왕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왕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꼬박 5개월간 99칸 한옥 염근당과 별채 자은정 등 왕가의 해체작업이 이뤄졌다. 그러나 명륜동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엔 성균관대 담장을 헐어 트럭 300대 분량의 기와, 대들보, 서까래, 기둥, 주춧돌, 기단석, 토방돌 등을 조심스럽게 이동시키는 고단하고 지난한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의 연천 터로 옮겨온 후 내로라하는 무형문화재 대목수를 불러 다시 짓는데 장장 27개월이 걸렸다. 그런 사이 남 회장은 자신의 사재를 한옥 이전과 재건립에 쏟아 부었다. 결국 잘 나가던 회사 운영에도 손을 떼고, 회장은 조선왕가를 지키는데 발 벗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1 한옥을 이전 복원하는데 무형문화재 도편수 최명렬 선생과 무형문화재 와공 이도경 선생이 직접 참여했다. 복원공사는 조선조의 전통왕가 건축양식을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 벽체와 바닥은 화토를 사용했다. 2 별채 자은정의 누마루에서 바라본 염근당의 뒷태다. 3 염근당 곳곳에서 99칸 한옥이 지닌 남다른 정취를 만날 수 있다. 

 

남권희 회장은 조선왕가를 옮겨 지은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닌, 우주만물의 순리대로 자신에게 찾아든 책무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군대시절 건축을 전공한 그에게 군단사령부의 대규모 법당을 손수 설계하고 짓는 책임이 떨어지면서 한옥에 대한 조예가 깊어졌고 남다른 한옥사랑의 소유자로 거듭났다. 젊은 시절에는 사업을 일궈 부를 축적했고 연천에 넓은 터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가는 준비된 그 앞에 비밀을 드러냈고, 결국 연천 터의 주인은 조선의 왕가가 되었다. 이것이 과연 우연으로 설명되는 일인지, 남 회장은 되묻곤한다.

 

 


화려한 캠핑이라는 의미의 글램핑이 이뤄지는 텐트촌이다. 왕실 고택 호텔에서 즐기는 캠핑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 연일 숙박이 매진되고 있다.

 

 

한옥은 가장 강력한 한류 문화의 콘텐츠다

조선왕가에는 지난 몇 년간 세계의 오피리언리더들이 수없이 다녀갔다. 세계적 예술가와 해외 공기업의 사장들, 세계적 기업의 CEO와 각국의 대사, 정치인들도 연천의 어느 이름 모를 기슭에 자리한 조선왕가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옥이라는 유산을 부러워했고, 건축정신에 공감했다. 남회장은 그들의 피드백을 통해 한옥은 최고의 한류문화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연천의 조선왕가는 옛 한옥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집은 시대상을 담는 최고의 건축이라고 생각한 남 회장은 염근당을 옮길 때도 거주의 편리함을 생각해 방의 칸수를 늘려 재건립했다. 화장실도 실내로 들였다. 그러나 기와지붕의 선이라든가,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창호, 자연합일의 배치와 자연회귀적인 재료 등 한옥의 고유 가치를 지키는 것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일반인들이 보다 가까이서 자연 속 한옥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클램핑을 론칭했다. 염근당 주변에 조성된 너른 잔디밭 주변으로 복층형 텐트 7동이 늘어서 있다. ‘글램핑’은 ‘글래머러스’와 ‘캠핑’을 조합한 신조어로 특급 호텔 못지않은 시설과 서비스를 갖춘 캠핑장에서 아늑하고 호화로운 캠핑을 즐기는 새로운 캠핑 트렌드다. 왕실 고택 호텔에서 즐기는 캠핑에 대한 관심은 뜨거워 연일 숙박이 매진되고 있다. 조선왕가 호텔의 17개 객실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입구에 자리한 홍자은 미술관이다. 갤러리와 한방역사자료관, 세미나룸, 왕가식당, 카페테리아와 야외데크 등으로 구성된다.

 

 

지난 수년간 한옥호텔의 기본을 마련한 남 회장은 앞으로 이곳을 가족관계 회복을 위한 공동체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구상을 마련 중이다. 다도와 사상, 한옥 등 우리의 문화를 가르치는데 직접 나서 젊은이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서울에서의 비즈니스도 모두 접었고, 남은 인생을 조선왕가에 쏟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6년간 조선의 왕가를 지키기 위해 남회장이 쏟아부은 사재가 100억원에 달한다. 그러고도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는 그에게서 우리시대가 목말라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발견한 기분이다.

 

안타까운 게 있다면, 조선왕가를 찾아가는 내내 도로의 안내표지판 하나가 없다는 점이다. 작은 유산 하나도 소중히 안내하는 선진국의 풍토와 사뭇 다른 게 아쉽다. 문화유산을 한 독지가의 노력만으로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역사회 모두의 관심이 있을 때만이 연천에서 기적적으로 부활한 왕가가 다시 수천년을 살아낼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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