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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청녕헌과 제금당]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형식을 보존한 정청과 살림집

청녕헌과 제금당은 조선시대 충주목의 목사가 집무하던 정청과 별관건물이다. 특히 제금당은 귀빈들을 맞이하던 영빈관으로도 사용했던 건물로, 별관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ㅡ’자형 건물이며, 지방의 관아건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한 점과 마루 밑으로 굴뚝을 설치한 점 등이 특이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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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아공원 안에 있는 청녕헌과 제금당, 산고수청각의 전경


‘경상도에서 서울가는 길이 좌도에서는 죽령(竹嶺)을 지나 이 읍에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鳥嶺)을 지나 이 읍과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읍에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경기도와 영남과 왕래하는 길의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서로 점령하려는 곳이 될 것이다’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충주지방을 소개하는 내용의 한 부분이다. 택리지에서는 충주를 영남과 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소개하는 것과 함께 ‘온 나라의 한복판으로 중국의 형주(荊州)나 예주(豫州)와 같다’는 설명도 곁들이고 있다. 실제로 충주에는 우리나라의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일명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칠층석탑이 있다.

 


청년헌은 충주목사가 집무하던 정청답게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정청과 살림집으로 구성된 관아건물

이곳 충주시 성내동 일대는 충주문화원을 비롯해 충주 예총회관과 전시관, 갤러리 등 문화와 관계된 장소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이곳에 조선시대 충주목(忠州牧)의 관아(官衙)건물들을 모아놓은 ‘관아공원’이 조성돼 있다. 동헌으로 쓰인 청녕헌(淸寧軒)과 별관인 제금당(製錦堂)도 바로 관아공원내에 수직청인 산고수청각(山高水淸閣)과 함께 들어서 있다.

 

관아란 나라일을 보기 위해 지은 건축물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와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懸) 등을 두었다. 각 도는 관찰사가 총괄했고, 각 부 이하에서는 지역마다 수령을 두어 일을 보았다. 관찰사가 집무하는 곳은 감영(監營)이라 했고, 수령들이 집무하는 곳은 동헌(東軒)이라 불렀다.

 


1 관아공원 담장밖에서 본 청녕헌 2 제금당 뒤쪽에 있는 산고수청각. 제금당의 수직청으로 쓰인 건물이라고 한다.


지방의 관아는 동헌을 중심으로 살림집인 내아(內衙), 관원들이 근무하는 향청(鄕廳) 등으로 구성됐다. 내아는 수령들이 살던 살림집으로, 객사로도 불리며 외부의 손님을 맞는 곳이기도 했다. 향청에는 고을 양반들의 대표자인 좌수와 별감이 있던 곳이고, 아전들이 근무하던 질청, 기생과 노비들이 있던 관노청, 군사를 관리하는 군기청 등이 있다.

 

관아는 궁궐건축이나 사찰건축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라일을 보는 관청으로서의 위엄은 나타낼 수 있도록 건립된다. 동헌은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정청(政廳)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해 건물의 크기나 공간의 규모에 있어 다른 건물과 차별을 두었다. 대개 기단도 높게 구성하고 익공식 공포를 갖추며 지붕을 장중하게 꾸미는 것이 보통이다.

 


청녕헌 측면. 온돌방 아래 합실을 만들어 아궁이를 만들었다.

 

수령이 집무를 보던 정청을 동헌이라 부른 것은 숙소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은 ‘수레’나 ‘건물 난간’을 뜻하는 용어로, ‘건물’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동쪽에 정청을 건립한 것은 음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즉, 양의 기운이 동쪽에 왕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동헌이 그냥 관아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동헌이 수령이 집무를 보는 정청인데 비해 내아는 수령과 권솔들이 생활하는 살림집이다. 그래서 내아는 상류주택의 모습을 본따 짓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동헌이 공적공간임에 비해 내아는 사적인 생활공간이어서 대개는 동헌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동헌의 서쪽에, 되도록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아는 동헌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해서 ‘서헌’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은 또한 외국 사신이나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내는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이용되는 등 손님들을 위한 영빈관으로도 활용됐다. 특히 객사는 왕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왕부(王府)에 속하는 건물이기도 했다.

 

 

충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청녕헌

청녕헌과 제금당은 조선시대 충주목사가 집무를 보면서 기거하던 관아건물이다. 청녕헌은 충주목의 정청으로, 제금당은 객사로, 귀빈들을 맞이하던 영빈관으로도 사용됐다. 두 건물 모두 조선 초기에 건립됐다고 하나, 고종 7년(1870) 8월에 이들 건물이 불에 탄 것을 같은 해 10월 충주목사로 있던 조병로(趙秉老)가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청녕헌은 그간 내부를 개조해 중원군 청사로 사용해 오다가 1983년 군청이 이전하면서 해체, 복원해 원형을 살렸다. 청녕헌 옆에 위치해 중원군수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제금당 역시 청녕헌과 마찬가지로 1983년 대수선을 통해 원형을 살려 복원했다. 제금당 뒤쪽에는 부속건물인 산고수청각이 있다.

 

지금은 이들 관아건물이 있는 곳을 정비해 ‘관아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공원 입구에는 ‘중원루’라 이름붙인 출입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 출입문외에 제금당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이 따로 서 있다. 널찍한 관아공원의 한가운데 청녕헌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제금당과 부속건물인 산고수청각이 있다.

 


1 청녕헌 뒤쪽도 퇴에 단차를 두어 누마루처럼 만들었다. 2 청녕헌의 뒤쪽 모습. 창호 앞쪽이 집무공간인 대청으로, 이곳은 아마도 집무중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됐던 듯 하다.

 

청녕헌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답게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높은 기단위에 위엄있게 서 있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으로 꾸몄으며, 오른쪽은 대청보다 약간 높여 마루방을 들였다. 이 마루방 앞에는 퇴를 두어 누마루 형식으로 만들었다. 대청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 아래쪽에는 합실을 두어 아궁이를 들였다.

 

동헌은 대청 뒤편으로도 넓은 퇴를 만들었으며, 뒤쪽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설치했다. 대청 뒤쪽으로 만든 퇴도 단차를 두어 누마루처럼 만든 점이 눈길을 끈다. 동헌 대청의 뒤에 설치한 공간은 정무를 보던 앞쪽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휴식 등을 취할 수 있는 사적 공간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측면의 창호문양도 특이하다.

 

 제금당.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영빈관으로도 사용됐던 건물이다. 특히 건물에 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

 

 

살림집 겸 영빈관으로 사용된 제금당

제금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정면의 규모는 청녕헌과 비슷하지만 청녕헌에 비해 낮은 기단위에 지은데다 지붕의 모양새도 청녕헌의 그것과는 달라 소박한 살림집의 품새를 지니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지방의 관아건물로는 드물게 단청을 해놓은 것이다. 단청문양은 1983년 대수선을 하면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을 만들었다. 양쪽 끝은 모두 마루방으로 꾸민 것으로 보인다. 건물앞으로는 반칸 넓이의 퇴를 내었는데, 특히 청녕헌과 마찬가지로 대청 오른쪽의 퇴는 약간 높여 누마루 형식으로 설치했다. 또한 일반 건물의 형식과는 달리 누마루 형식으로 만든 퇴의 앞부분을 창호로 막아놓은 점도 특이하다.

 


1 제금당 아래쪽으로 굴뚝을 만들어놓은 모습 2 제금당도 관아건물로서 우수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제금당은 앞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호를 설치해 놓았다. 가운데 2칸의 대청도 앞부분에 문을 설치해 공간을 막아 놓았는데, 창호 앞으로 들어열개가 설치돼 있다. 즉 필요시 공간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건물의 양쪽 끝에 위치한 마루방도 창호를 만들어 공간의 개폐가 가능하도록 했다.

 

대청 위에는 광창을 설치했고, 누마루의 앞부분에서 측면으로 이어지는 창호문양도 ‘亞’자 문양으로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아마도 고을 수령의 숙소로 사용하는데다 귀빈을 맞이하는 영빈관으로도 사용했다는 점 때문에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방 밑으로 아궁이와 굴뚝을 길게 설치한 점도 눈길을 끈다.

 

제금당 뒤에는 산고수청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제금당의 수직청 역할을 하던 곳으로, 방 2칸과 부엌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내문에는 제금당과 산고수청각이 모두 왕부에 속한 건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제금당이나 산고수청각이나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추는 반듯하게 다듬어서 사용하고 있다.

 


공원 입구에 3D로 충주읍성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빨간선으로 표시된 부분이 관아공원에 있는 건물들이다.

 

 

제금당으로 출입하는 솟을대문

제금당으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일반 살림집을 출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솟을삼문이 별도로 설치돼 있다. 이 솟을삼문에는 ‘예성별관(蘂城別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예성’은 충주의 또다른 별칭이라고 한다. 즉 이곳이 충주 관아의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문패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건물외에 관아공원의 한쪽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솟을삼문이 설치된 곳에도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다. 또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한쪽에는 충주축성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충주읍성의 규모와 문루의 규모 등을 기록해 놓았다.

 


관아공원 한쪽에 서 있는 보호수. 수령 500년이 넘은 나무다.

 

현재 관아공원의 중원루가 있는 입구쪽으로 들어오면 충주읍성을 3D 디지털로 복원해놓은 안내그림이 있다. 여기에는 읍성내에 청녕헌과 제금당, 산고수청각 외에도 객사, 경무청, 사령청, 군기소, 수문청, 영청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충주가 교통의 요충지였던 만큼 읍성의 규모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현재 관아건물은 전국의 각 지역별로 몇몇 곳에 한두채 정도 남아 있는 것이 고작이다. 일제때 정책적으로 대부분 헐어버렸거나 더러는 개화의 물결에 밀려 없어졌기 때문이다. 청녕헌과 제금당은 일부나마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형식을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보존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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