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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룡시 은농재]
한국의 예학 일으킨 대가의 숨결이 묻어나는 집

충남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있는 은농재(隱農齋)는 조선시대 예학의 대종으로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치며 머물렀던 고택이다. 전통가옥으로는 드물게 북동향을 한 집은 안채와 사랑채는 물론 대문채와 행랑, 곳간에 별당과 연못, 정자까지 두루 갖춰 대가집의 풍모를 보여준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항공사진 블루버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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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계룡시는 육·해·공 삼군 본부가 자리잡은 군사도시로 조선시대때 도읍지 후보로 거론될 만큼 입지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논산시에 속해 있었으나 2003년 계룡시로 출범했다. 이곳 계룡시 두마면 두계리에 말년에 사계 김장생이 내려와 살면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은농재가 있다.

 

 

영남학파와 양대산맥 이룬 기호학파의 태두

사계의 고향은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이며, 태어난 곳은 서울 정릉동으로 지금의 서소문 대법원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사계의 종가는 지금도 연산면 고정리에 있다.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예학자(禮學者)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의 전통이 내려왔는데, 관례(冠禮)와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가 그것이다. 사계는 바로 이 예절과 법도를 확립한 인물로 우리나라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사계는 대사헌을 지낸 김계휘(金繼輝)와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11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외직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조부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에는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에게서 배웠으나 20세 되던 해에 아버지와 절친한 교우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31세때 학문과 덕행이 높은 유일(遺逸)로 천거돼 창릉 참봉에 제수됐다. 그러나 그의 벼슬길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온 후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이 됐고,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에는 군량조달에 공을 세워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기도 했으나 1596년 고향인 연산으로 낙향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집이 사랑채인 은농재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높은 기단위에 선 집이 고상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후에도 관직에 나갔다가 반복하기를 몇차례 거듭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장령(掌令)으로 조정에 나갔다가 그만두었고, 병자호란때는 의병을 모아 공주로 내려온 세자를 호위하기도 했다. 그후 잠시 형조참판을 맡기도 했으나, 곧 다시 연산으로 낙향해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비록 조정 출사가 늦고 요직도 거치지 않았지만,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사계는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활동했으며, 서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사계의 학통은 다시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으로 이어지면서 기호학파를 탄생시켰다.

 

기호학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와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사계는 기호학파의 태두인 셈이다. 이후 그는 아들 신독재와 함께 동국 18현에 올라 문묘에 배향됐다.

 


▲사랑채 뒤에 위치한 안채. 안채 왼쪽으로 사이를 두고 서 있는 건물이 안사랑채다.



명문가의 계기를 만든 천 허씨 부인의 설화

사계의 집안과 관련해 내려오는 설화도 하나 있다. 사계의 7대조 할머니인 양천(陽川) 허씨(許氏) 부인에 얽힌 설화가 그것이다. 양천 허씨는 조선 태조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어린 나이에 사계의 7대조인 김문(金問)에게 시집을 왔다. 그러나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한림원 등의 벼슬에 나가 있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마침 아이를 갖고 있던 허씨는 친정에 머물고 있었는데, 친정부모들은 앞날이 창창한 허씨를 재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허씨는 이를 알고 친정이 있던 개성에서 나와 시댁이 있는 연산 고정리로 향했다. 여인이 낮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어 주로 밤길을 이용해 걸어가는데 결국 천안 인근쯤에서 기진해 쓰러졌다고 한다.

 

그런데 쓰러진 허씨 부인을 호랑이가 나타나서 연산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다. 호랑이가 허씨 부인을 데려다준 곳은 지금의 돈암서원 인근으로 이곳을 ‘범내미’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아버지가 허씨를 내쳤다. 집안으로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젊은 며느리의 고생이 눈에 선했기 때문일 터다.

 


1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안마당 2 안채 대청옆에 ‘잠소실(潛昭室)’이라는 편액이 걸린 공간이 눈에 띈다.

 

그러나 젊은 며느리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내친 자리에서 그대로 앉아 며느리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때가 추운 겨울이어서 눈이 왔는데, 시아버지가 집밖으로 나가보니 며느리는 그대로 앉아 있는데 그 자리에는 눈이 녹고 김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시아버지는 보통 며느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받아들였다.

 

허씨 부인은 유복자인 김철산(金鐵山)과 손자들을 훌륭하게 키워 이곳 광산 김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토대를 만들었다. 김철산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을 비롯해 4형제를 두었다. 김국광은 경국대전을 편찬한 인물이다. 이 사실이 알려져 후에 세조가 마을 입구에 정려를 세워주고 정경부인의 호칭을 내렸다.

 

허씨 부인의 사후에 관한 일화도 전해온다. 허씨 부인이 돌아가시자 한 스님이 찾아와 천하제일의 묘자리라며 지금의 묘자리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멀리 보이는 고개를 넘어간 후에 땅을 파고 관을 내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멀리서 고개를 넘는지 확인이 어려워 이틀이 지난 후에 이제는 고개를 넘어갔으려니 하고 땅을 팠더니 큰 벌이 나와 고개쪽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마침 스님은 가다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었고, 날아온 벌에 쏘여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스님이 넘던 고개에는 스님을 기리는 절이 건립됐고, 허씨 부인의 재실앞에는 부인의 묘를 바라보며 책을 옆구리에 끼고 서 있는 스님의 입상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입상은 누군가 훔쳐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안채 뒤쪽에 있는 장독대

 

 

학자로서의 겸손함이 묻어나는 말년의 거처

기록에 따르면 두계리의 은농재는 사계가 55세 되던 1602년에 건립한 집으로, 사계와 그의 정부인인 순천 김씨가 거처하던 곳이다. 그는 19세에 창녕 조씨와 혼인했으나 39세에 사별하고, 41세에 김종서의 후손인 순천 김씨 부인을 맞이했다. 순천 김씨는 사계가 세상을 떠난 후 애통하며 지내다가 자결해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은농재’라는 집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집은 ‘은둔하여 농사를 짓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은 마을에 고층아파트도 들어서고 큰 길이 나서 집을 찾기가 쉬워졌지만, 기자가 처음 이곳을 찾은 2004년에만 해도 큰 길에서는 집의 흔적조차 알기 어려웠다. 작은 구릉뒤 숲에 가려 그야말로 ‘별유천지’의 지경에 있던 은둔처였던 셈이다.

 

이 집은 대문채를 비롯해 사계가 거처했던 사랑채인 은농재와 안채 및 안사랑채, 후학들을 가르치던 성례당, 담장밖에 위치한 별당채, 그리고 행랑과 곳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집의 본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연못과 정자도 있다. 이 연못은 사계가 집을 건립할 당시 함께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연못앞에는 400년된 느티나무 한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사계고택(沙溪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은 평대문이다. 대개 사대부가의 대문은 솟을 대문이지만, 이 평대문에서는 학자로서의 겸손함이 묻어난다.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사랑채인 은농재다.

 

정면 4칸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높은 기단위에 서 있는 집의 모습이 격식과 고상함을 갖추고 있다. 이 사랑채는 특히 대청이 없이 모두 온돌방으로 돼 있는 점이 이채롭다. 지금은 기와지붕으로 돼 있지만 원래는 초가지붕이었다고 한다.

 


사랑채 마당에서 바로 사당공간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소관문(小關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해 들어가면 안채가 있다. 안채 맞은 편으로는 안사랑채가 있어 안채의 구조가 전체적으로 ‘튼ㅁ’자 형태를 띄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안사랑채는 부엌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로 돌아가면 툇마루 형태의 작은 마루를 둔 점이 특이하다. 이곳 마루위에도 은농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의 뒤쪽으로는 장독대가 있고, 그 옆으로 영당이 있다. 이곳은 사계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원래 사계의 사후 시신을 모셨던 곳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영당 앞으로는 성례당이 있다. 이 성례당은 사계가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안사랑채 뒤쪽에 있는 작은 일각문을 나서면 집 뒤쪽으로 별당건물이 서 있다. 본채를 뒤로 하고 돌아앉아 있는 별당 역시 3단 기단위에 서 있는데, 널찍한 퇴를 두고 반간 기둥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또 부엌은 방옆으로 따로 설치해 두었는데, 부엌이 딸려있지 않은 방 앞쪽의 퇴를 누마루처럼 올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두었다.

 

사랑채인 은농재가 있는 넓은 마당의 양편에는 행랑과 곳간이 있다. 또 집의 한쪽 측면으로는 초가가 두채 서 있는데, 이곳 역시 행랑채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또 사랑채 오른쪽으로는 영당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설치돼 있는데, 이름하여 ‘소관문’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안사랑채의 바깥마당. 안채와는 등진 안사랑채의 방앞으로 널찍한 퇴를 만들어놓은 점이 눈길을 끈다.



고택 내에 전시관 및 체험관 등 조성

은농재의 집터는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집의 방향이 일반적으로 남향을 하고 있는데 반해 이 집은 동북방향을 향하고 서 있다. 이는 집에서 멀리 구봉산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공사가 중단돼 흉물스럽게 잔해가 남아 있는 건물과 고층아파트 등으로 시야가 많이 가려 예전과 같은 풍광은 찾을 수 없다. 

 

이 집은 집의 본채와 집앞의 정자와 연못까지 합하면 매우 넓은 터에 건립돼 있다. 집의 본채와 연못사이에 현대식 건물의 집이 한 채 들어서 있는데, 이 집은 사계의 후손이 사는 집이라고 한다. 당초 사계가 이곳에 살다가 그의 여덟째 아들인 김규에게 물려줘 대대로 살아왔다. 은농재라는 당호는 사계의 7세손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의 후손이 문화재로 지정된 이 집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도록 종중에게 내놓았고, 종중에서는 이 집을 기증받는 대신 후손에게 현대식 건물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사계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관을 비롯해 예절 체험교육 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계룡시에서는 지난해 은농재에서 3㎞에 이르는 ‘사계 솔바람 길’을 지정해 개통했다. 이 길은 집 뒤의 왕대산을 배경으로 은농재에서 출발해 왕대산 입구, 모원재 입구, 왕대산 정상, 쉼터바위, 두계터널을 거쳐 은농재로 돌아오는 트래킹 코스다. 사계의 흔적을 짚어볼 수 있는 코스로, 왕대산 정상에는 사계의 학문과 설화 등을 담은 설명관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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