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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 정원채 고가]
독특한 평면구조와 건축수법 갖춘 사대부가

정원채 고가는 집 뒤의 작은 야산을 배경으로 산 기슭에 마을을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기본적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사랑채에 별도로 낸 대문이나 안채에 덧달아낸 마루와 방, 기둥을 세우고 만든 담장 등 독특한 평면구조와 건축요소들이 눈길을 끄는 집이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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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어귀에서 바라본 정원채 고가의 전경. 담장을 두른 집 뒤로 선조들의 묘역도 한눈에 들어온다.


정원채 고가가 자리잡은 곳은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남양동(南陽洞) 송림리(松林里)이다. 남양동은 화성시청이 소재하고 있는 지역으로, 농업과 도시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같은 화성에서도 동탄이나 향남, 봉담 등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이곳은 아직 그렇지 않다.

 

 

남양, 한때 국제무역항의 역할도 했던 곳

경기도 화성은 당초 수원부와 남양부로 나뉘어 있던 곳이다. 수원부는 삼국시대때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때 수성군(水城郡)으로 바뀌었고, 남양부는 삼국시대 당시 ‘당성(唐城)’ 또는 ‘당항성(唐項城)’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당나라로 가는 뱃길의 길목에 위치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가 통일신라때 당은군(唐恩郡)으로 바꿨다.

 

수성군은 고려시대때 수주(水州)로, 고려말에는 다시 수원도호부로 승격됐다. 특히 조선 정조때 정조의 아버지인 장현세자의 능을 천봉하면서 화성(華成)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도시 건설과 함께 유수부로 승격됐다. 남양부는 고려때 양평도에서 경기도로 귀속됐다가, 조선시대 들어 남양도호부로 개편됐다.

  

조선 말에는 13도제의 시행과 함께 경기도 관찰부를 수원에 둠으로써 수원이 경기도 지역의 으뜸지역으로 자리잡았다. 일제때에는 군면 통합에 따라 남양군이 없어지고 수원군으로 통합됐다가 해방후인 1949년 수원이 시로 승격되면서 수원시 이외의 지역은 화성군으로, 음덕면은 남양면으로 이름이 바뀌게 됐다.

 


1 정면에서 바라본 정원채 고가. 맨 앞쪽에 사랑채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문은 ‘벼슬문’이라고 부른다. 2 집 뒤 산중턱에서 바라본 모습,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한 마을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남양지역은 삼국시대때 당나라로 가는 뱃길로서 일찍부터 국제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그래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때도 구포, 마산포 등이 남양만의 주요 포구로써 상업과 해상교통의 주요역할을 해왔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남양을 ‘소금 굽는 집’이 많은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금수산에서 나온 줄기가 서쪽으로 가서 남양부를 만들었고, 충청도 당진과의 사이에 작은 바다가 있을 뿐이어서 매우 가까우며 밀물, 썰물이 통한다. 지세는 좌우로 포구와 항구를 끼고 바로 바다로 들어갔다. 수백호나 되는 소금 굽는 집이 남쪽과 북쪽 바닷가에 별처럼 깔려 있다.” 택리지의 기록이다.

 

‘송림(松林)’이란 지명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 소나무가 많고 산수가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실제 남양에서 송림리로 가다보면 작은 야산에 소나무들이 많이 심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정원채 고가의 배경이 되는 뒷산에도 소나무가 많다. 당초 남양면 송림동이었던 곳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남양동 송림리로 바뀌었다.

 


안채와 안마당. 오후의 햇살을 받아 안온한 고택의 정취가 느껴진다.

 

 

독특한 건축형태와 수법 보이는 안채의 별채공간

정원채 고가는 이곳 송림1리에 작은 야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집이다. 화성에서 제부도로 가는 큰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남양사거리에서 송림으로 가는 작은 도로가 나오고, 이 도로를 따라 가다 송림1리 마을회관을 지나 커브길을 돌면 바로 정원채 고가가 멀리서 눈에 들어온다. 마을앞 논에는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어논 모습이 펼쳐진다.

 

이 집은 한눈에 보아도 다소 특이한 형태로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을 지나는 앞길에 보이는 대문을 비롯해 경사를 따라 산기슭 중턱에 널따랗게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겉에서 집을 둘러보면 정면을 비롯해 양 측면 등 삼면에 모두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설치돼 있다. 이 집의 규모가 간단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ㄱ’자형의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아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형태다. 여기에 사랑마당이 집의 정면쪽으로 별도로 설치돼 있고, 사랑채를 위한 대문도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안채 또한 안방쪽으로 마루와 방을 덧대 내민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 덧댄 공간쪽으로 별도의 마당이 설치돼 있다. 아주 독특한 구조인 셈이다.

 

집안으로 드나드는 주출입문은 집의 측면에 나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바로 안마당으로 통한다. 안채는 원래 ‘ㄱ’자 형태이지만, 지금은 거의 ‘ㄷ’자 형태로 돼 있다. 건넌방쪽에 살림살이의 편의를 위해 일부 공간을 덧대어 냈기 때문이다. 이 집이 문화재로 지정돼 본채에는 손을 댈 수 없다보니 부득이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주병원 할머니(80세)의 얘기다.

 

안채는 가운데 두칸의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배치돼 있다. 안방 옆으로는 부엌이 자리한다. 부엌에는 아직도 아궁이와 솥이 걸려 있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부엌 한쪽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이 집외의 다른 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 집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즉 안방 뒤로 1칸 넓이의 대청이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방이 딸려 있는 공간이다. 방앞에는 대청보다 높은 누마루를 설치했다. 물론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넣어두고 있지만, 예전에는 이 공간이 바깥 사람들에게는 쉬 노출되지 않는 이 집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임에 틀림없었던 듯하다. 이 공간을 외부로 터 놓은 것이 아니라 막아놓은 것이 이같은 사실을 짐작케 한다.

 


1 안채 안방 뒤에 있는 ‘작은 며느리방’. 마루와 방이 별도로 설치돼 있고, 방앞에는 약간 높게 마루가 설치돼 있다. 2 담장에 기둥을 세운 모습이 특이하다. 이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수법이다.

 

“안방 뒤에 있는 이 공간을 ‘작은 며느리방’이라고 불렀어요. 안채에는 안방마님이 거주해야 하니 새로 며느리가 들어오거나 또는 소실로 들어오는 부인이 있으면 사용하게 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주병원 할머니의 얘기다. 그러니까 이 공간은 안채의 별채였던 셈이다.

 

안채 부엌 옆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나가면 안채 별채 측면에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 주위로는 역시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장독대와 우물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안채의 후원으로 이용된 공간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담장을 낀 두채의 건물과 함께 외부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두채의 건물중 하나는 사당이고, 다른 하나는 목욕탕이라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이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눈길을 끄는 것 하나는 마당을 둘러싼 담장을 한칸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위에 보와 서까래를 설치하고 지붕을 얹은 점이다. 이는 보통의 담장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수법과 형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담장을 설치함으로써 담장의 보와 지붕사이에 약간의 틈이 생기는데 안채의 아낙네들이 바로 이곳을 통해서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을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제가 이 집에 3대째 독자 며느리로 7남매의 맞이에게 시집을 왔어요. 와보니 시조부모를 비롯해 식구가 모두 15명이나 됐어요. 거기다 머슴이 둘이었죠. 집안에 무슨 행사가 있을라치면 다른 동네에 있는 친지들도 다 모이게 되는데, 이때 담장 틈으로 오는 손님들이 누구인지 살필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겁니다.” 할머니의 설명이다.

 

독특한 담장형식은 비단 안채 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기슭 집의 뒤쪽으로 높게 쳐진 담장 일부도 기둥을 세우고 보와 서까래를 얹고 그위에 다시 기와를 얹는 형식으로 담장을 만들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 대청과 마주보고 있는 쪽에는 외양간과 사랑채 사랑방을 위한 부엌, 그리고 광이 있다. 외양간에서는 한때 소도 키웠다고 한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사이에 작은 쪽문이 있는데 이 문은 외부로 통하는 문이다.

 


안채 후원에 있는 장독대와 우물. 맞은 편에 보이는 건물이 사당(왼쪽)과 목욕탕이다. 두 건물 사이로 외부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사랑채 앞에 높이 솟은 ‘벼슬문’

사랑채는 정면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 외에 양쪽 측면으로도 문이 나 있다. 사랑채 대문 위부분에는 특별한 문양이 설치돼 있다.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할머니의 시조부께서 조선말 참사 벼슬을 하시면서 만든 대문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벼슬문’이다. 사랑채 측면 문에도 같은 문양이 있다. 할머니가 이 집에 처음 시집왔을 때 불린 이름도 ‘참사댁 손주며느리’였다.

 

사랑채는 사랑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1칸의 마루방이 놓였다. 이 마루방에는 문을 설치해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다. 마루방 측면으로도 판장문을 달아놓았다. 이역시 더운 여름에 문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사랑방 뒤쪽으로는 안채와 통하는 작은 문을 달았다.

 

당초 이 집의 규모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재청의 설명에도 당초 이 집에 행랑채 등 부속건물이 많았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집의 측면에는 담장 바깥쪽에도 장독대가 있다. 안채 측면 담장 안쪽에서 바깥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만들어놓은 것도 이처럼 담장 바깥에 있는 시설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1 사랑채 대문. 이 집에 살고 있는 할머니의 시조부께서 벼슬을 하면서 만든 대문이라고 한다. 2 안채 ‘작은 며느리방’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3 안채로 통하는 대문 옆 공간 벽면을 숫자를 새긴 나무판으로 만들었다.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 이 집에 시집왔을 때만 해도 ‘인근 300리안에서는 우리집 땅만 밟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도 집 뒷산을 비롯해서 인근에 상당수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뒷산에는 이 집 선조들의 납골묘가 조성돼 있다. 마을 어귀에서 집을 바라보면 집의 전경과 함께 집뒤에 자리잡은 묘소의 전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집 대문에 기록된 상량문에는 광무 8년(1904년)에 지었다고 돼 있으나, 안채는 이보다 시대가 이른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다. 할머니의 설명으로는 안채는 400년이 넘었고, 사랑채도 200년 정도는 됐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침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들어오는 어르신 한분을 만나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남양 풍화당(南陽 風化堂)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풍화당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요즘말로 하면 경로당이다. 남양에는 예부터 있던 경로당이 지금도 남아 있다. 할머니도 취재를 끝내자 마을 경로당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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