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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말하는 건축가’ 故 정기용을 다시 만나다

두해 전 고인이 된 건축가 정기용(1945~2011)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지난해 유족들이 2만점에 이르는 방대한 그의 건축 아카이브를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것이 계기였다. 건축전문 큐레이터와 건축과 교수, 건축 평론가 등이 모여 1년에 걸쳐 정리한 아카이브는 건축가 정기용을 새롭게 조명하기에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준비한 ‘그림일기: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은 사상가로, 인문학자로, 교육자로, 사회운동참여자로, 평생을 ‘말하는 건축가’로 살아온 정기용의 인생을 통째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취재 구선영 기자 사진 왕규태 기자 자료제공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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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람객이 깨알 같은 내용을 일일이 살펴볼 수 있도록 건축 프로젝트마다 사본 파일을 마련해 두고 있다.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제5전시실. 지난 2월28일부터 ‘그림일기:정기용 건축 아카이브’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실 끝에 마련된 렉처 룸에서 마주한, 수척하고 야윈 얼굴에 회색 배래모를 눌러쓴 남자는 건축가 정기용이다. 살아생전 강연 모습을 편집한 영상 속 그의 목소리는 병세의 위중을 짐작케 한다.

“건축가는 늘 히얼 앤 나우(Hear and Now), 바로 여기가 문제입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건축가는 그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는 자세가 있어야…”

 


1 정기용은 도시의 집합주거에도 관심이 많았고, 다채로운 자료를 남겼다. 2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방대한 아카이브를 통해 사상가로서,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3 건축가가 프로젝트마다 정리한 글과 메모, 스케치, 설계집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영상의 대미를 장식한 이 구절은 그가 남기고자 한 가장 중요한 말이자, 자신을 평생 건축가로 살게 한 철학이다. 2011년 고인이 된 정기용은 그의 사후 개봉된 영화, ‘말하는 건축가’를 통해 대중적으로 더 유명해졌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건축가의 일상과 작업을 담은 휴먼다큐멘터리로 주목을 받았다.

영화가 건축가 정기용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한 다큐라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이번 전시는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다큐라고 할 수 있다. 전시회에는 삼청동 기용건축 지하 창고에 수북이 쌓여있던 자료와 건축도면, 사회 활동에 대한 보고서, 스케치 등 약 2만여점의 아카이브 가운데 추려진 2000여점이 공개되고 있다.




광주 목화의 집_2004, 땅의 이미지를 건물로 승화한 광주 목화의 집 스케치 전개과정을 볼 수 있도록 벽면 가득 펼쳐 놓았다.

 

 

건축의 모든 문제는 땅과 사람에게 있다

전시의 시작은 정기용 건축의 뿌리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정기용은 1972년 파리에 유학해 1986년 귀국하기까지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을 차례로 공부하며 실무의 기틀을 쌓았다. 그는 68혁명 직후 프랑스 신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신도시 건설에 비판적 논의 등을 전개했고, 귀국 후 자연스럽게 우리 땅의 문제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농촌지역의 변화(1983)’ 논문 등을 통해 새마을운동으로 파괴되는 농촌 풍경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무주 안성면 개발계획_마스터플랜_1997 
 

정기용의 주택작업을 속살까지 만날 수 있는 전시공간도 마련됐다. 땅이 지닌 나뭇잎의 이미지를 건축물로 구축해 나가는 광주 목화의 집 등 주택의 스케치 과정과 메모, 설계집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모든 주택의 설계 작업은 땅과의 대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관심은 공공주거, 흙건축으로 발전해나가며 ‘농촌건축’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가 10년 넘게 매달린 무주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대다수 현대 건축가들이 외면한 농촌지역을 방문해 주민들의 삶을 살피며, 그들에게 필요한 삶의 행태를 건축으로 그려냈다.

 


▲ 동숭동 무애빌딩_단면도_1994, 정기용은 우리 도시에 대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발언한 건축가였다. 도시 속에 세워진 한 건물 안에는 도시 전체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성장의 공간’에서는 기적의 도서관과 학교건축이 소개된다. 정기용이 설계한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는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친근함과 진솔함이 가장 많이 묻어난다. ‘추모의 풍경’에 다다르면 ‘부산 민주공원’ ‘제주4.3평화공원’과 같은 추모의 장소들이 기다리고 있다. 정기용은 우리 도시에 대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발언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문화연대, 서울건축학교 등에서 각종 활동을 하면서 도시를 보고, 읽고 표현한 그의 해석들을 만날 수 있다. 그밖에도 그가 생전에 남긴 글과 메모, 각종 자료들이 총출동했다.

 

건축가는 13년에 걸쳐 무주군의 공공건축물 수십채를 완성했다. 현대 건축가들이 외면한 농촌에 찾아가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삶의 행태에 주목해 그려진 공공건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건축전문 큐레이터는 “그림일기라는 전시제목에는 본인이 평생 남긴 드로잉과 글이 건축과 삶에 대해 새긴 일상의 보고가 되기를 바랐던 작가의 소망이 담겨있다”며, “인문학자,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해기적의 도서관_드로잉, 정기용의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는 유명하다. 그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건축 언어로 작업해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다시 정기용의 렉처 룸. 영상 속 야윈 그는 온힘을 다해 말한다.

“건축가는 누구냐. 60~70%는 집 그려주는 사람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집 지어주는 사람, 설계사, 건축사, 건축가 이렇게 부르지. 아직 이름도 정확하지 못해. 건축가를 잘 몰라.”

 

우리 사회는 아직 건축가를 정의하지 못하고, 건축을 정의하지 못한다. 한국의 건축가를 뒤로하고 외국의 유명 건축가를 불러와서 오래된 도시의 흔적을 상징적인 랜드마크 건물들로 갈아치우고 있지만, 기존 도시와 동화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 이런 풍토가 안타까웠던 정기용은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했다. 그가 말한, 한국에서 건축은 무엇이고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한번쯤 귀기울여 보고 싶다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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