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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철 교수의 도시건축 이야기]
단게 겐조의 작품과 삶

일본 건축학회에서는 현재 단게 겐조의 서거 1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 중이다. 이번 달 주택저널에서는 일본이 배출한 최고의 현대건축가 단게 겐조의 서거 1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과 삶을 재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글·사진 김석철(국가건축정책위원장·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장)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아시아 최초로 프리츠커 어워드 수상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년~2005년)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건축계 최고의 영예인 프리츠커 어워드를 수상하였던 일본 최고의 현대건축가이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 중 한 사람이며, 전통건축에 모더니즘건축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고, 전 세계에 걸쳐 일본건축의 이름을 알리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도쿄올림픽과 오사카엑스포에서 선보인 단게 겐조의 건축은 세계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일본의 현대건축을 서양 현대건축의 모방 정도로 알고 있을 때, 세계를 앞서간 단게 겐조의 작품은 세계가 놀란 새로운 일본 현대건축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도쿄 도청사_1991년작

 


도쿄 도청사_1991년_중앙광장의 모습

 

1913년 이마바리에서 태어난 단게 겐조는 1938년 도쿄대학 건축학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르꼬르뷔제의 제자인 구니오 마에가와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1946년 도쿄대학 건축과 교수로 임명된 이후 계속 대학에 남아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단게 겐조는 그로피우스가 하버드 건축대학원에서 TAC를 설립하여 이론과 실무를 병행한 것에 영감을 받아, URTEC을 설립하여 건축설계와 도시설계 모두를 정력적으로 수행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궁전_1961년

 

 

파키스탄 대법원_1965년_수도 이슬라마바드에 위치해 있다.

 

그는 일본의 전통건축과 서양 현대건축, 그 중에서도 특히 르꼬르뷔제의 모더니즘을 융합한 일본 현대건축의 흐름을 이끌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많은 실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메가스트럭쳐’라 불리우는 도시형 인프라를 내장한 도시스케일의 건축을 시도하였다. 그는 또한 교육자로서도 탁월하여 일본 현대건축 3세대의 대표적 건축가들인 아라타 이소자끼, 키쇼 구로가와, 후미히꼬 마끼 등의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히로시마 피스센터와 메모리얼파크_1955년

 

 

도시와 환경으로 영역 넓힌 일본 현대건축의 기수

단게 겐조는 프로젝트가 가진 사회적, 정치적, 기술적 리얼리티를 표현하려고 한 리얼리즘의 작가였다. 일본에서의 그의 작업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지속된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한 일본 경제성장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일본 전통건축의 현대화에 머물지 않고 일본전통과 현대문명을 아우르는 세계의 건축을 만들고자 한 일본 현대건축의 기수였다.

 

그의 디자인 방법론은 기능주의와 구조주의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그는 정통적 기능주의를 넘어 기능의 구조화와 상징화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가 설계한 도쿄 요요기국립체육관은 육체의 장소를 넘어 정신의 장소를 추구한 형이상학적 미학의 건축이다.

 

 

요요기 국립체육관_1964년_도쿄올림픽을 위해 건설된 실내체육관이다.

 


요요기 국립체육관_1964년_실내모습

 

단게 겐조의 스펙트럼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도시와 환경에도 이른다. 그는 일찍이 건축이 도시의 부분이 아닌 도시의 축도인 것을 간파하였다. 1959년과 1960년 사이 미국 MIT에 초빙교수로 초청받았을 때 학생들과 함께 한 ‘보스턴 베이 프로젝트’와 1960년 출간된 ‘도쿄만 계획 1960: 구조개혁을 향하여’를 통하여 건축과 도시 모두를 포괄하는 구조주의적 접근을 통한 끊임없는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형식을 제안하였다.

 

 

후지TV 빌딩_1994년

 


보스턴 베이 계획_1960년_보스턴 항구 근처에 메가스트럭쳐 하우징을 제안했다.

 

도시 설계 분야에 있어서도 단게 겐조의 업적은 대단히 크다. 그는 도시설계를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의 ‘도쿄만 계획 1960’은 도쿄만 위에 선상으로 확장되는 교통의 기간구조와 건축군으로 이루어진 선형도시의 모델을 제안한 걸작이다. 기간구조는 여러 레벨의 교통라인과 서비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건축군도 어반 인프라와 함께 변화한다.

 

 

도쿄만 계획_1960년_바다 위에 선형의 도시모델을 제안했다.

 

도시의 인프라 스트럭쳐와 건축군이 메가스트럭쳐라는 공간형식으로 통합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의 질서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로부터 이끌어낸 대담한 발상이었다. 단게 겐조는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서구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원리를 원용한 도시를 도쿄만에 세우려 했던 것이다.

 

 

세인트마리 성당_1964년_내부 예배당의 모습

 

 

세인트마리 성당_1964년_도쿄 근교에 위치하고 있다.

 

단게 겐조는 일본의 건축가들이 서양문명에 대해 가지고 있던 문명적 컴플렉스를 벗어나게 한 사람이다. 세계 2차대전 이후의 일본의 현대건축은 단게 겐조 한사람이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로시마 피스센터, 도쿄 도청사, 세인트마리 성당, 도쿄 요요기국립체육관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기라성같은 젊은 건축가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두 번 지은 도쿄 도청사의 경우 두 번 다 현상에 당선되어 두 번 다 설계하였다. 가히 일본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빅루프(Big Roof)_1970년 오사카엑스포의 중앙전시회장이다.

 

단게 겐조의 글은 그의 건축만큼이나 단순 명료하고 정확하다. 단게 겐조는 일본의 전통건축을 연구하여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다. ‘가츠라: 일본건축에서의 전통과 창조’와 ‘이세: 일본건축의 전형’은 일본 건축의 핵심을 알게 하는 명작이다. 그는 전통을 형태가 아닌 정신으로, 양식이 아닌 원리로 이해하였고, 전통의 반복이 아닌 창조적 계승을 강조하였다.

 

 

OUB센터_1986년_싱가포르에 위치해 있다.

 

 

일본 현대건축을 세계의 반열에 올리다

단게 겐조는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그것이 모든 사람이 그에게 매료되게 한 요인이다. 그는 일본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의 흐름을 과감히 받아들여 자기특유의 것으로 만들어 낸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모든 것을 이룬 후에도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도전의 세계로 나아간 점이다.

 

 

야마나시 방송센터_1966년

 

그는 전후 일본의 기적적 성장을 상징하는 건축과 도시를 세계에 널리 알린 다음, 직접 세계로 나아가 새로운 건축과 도시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궁전, 쿠웨이트 국제공항, 나폴리 신도심계획, 나이지리아 신수도도심계획, 국제석유센터 등을 통해 그는 세계의 건축가가 되었다. 역사상 어느 건축가도 그가 이룬 만큼의 세계건축가적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국제적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단게 겐조는 ‘정보화사회의 건축과 도시의 존재방식을 모색하며’를 발표하였다. 그는 일본의 장래에 대해서 공업화 과정, 정보화 과정, 자연생태화 과정의 세 단계를 상정하고 공업화 과정을 물질과 에너지시스템으로, 정보화 과정을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시스템으로, 자연생태화 과정을 자연과 인간시스템으로 명료히 설파하였다.

 

 

미국의학협회 건물_1990년_미국 시카고에 위치해 있다.

 

건축에서 도시설계로, 그리고 세계로 나아간, 반 세기에 걸친 대장정 끝에 돌아온 대가가 “나는 아직 정보화사회의 건축과 도시의 존재방식에 대해 이것이다라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것을 탐구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겸허함, 확고한 신념, 끊임없는 정진과 도전이 일본 현대건축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 세계의 현대건축 모두를 함께 끌고나간 위대한 건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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