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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월연대 일원]
자연과 벗한 맑고 밝은 선비의 기상이 깃들어 있는 곳

밀양의 월연대 일원은 전남 담양의 소쇄원에 버금가는 한국의 정원조경과 수려한 풍광을 지닌 곳이다. 

가장 높은 곳에 들어선 정자인 월연대는 물론이려니와 

강학공간인 제헌이나 사랑채인 쌍경당 등 모든 건물이 격식과 위엄을 갖추고 건축수법도 뛰어나다. 

거기에 더해 자연을 벗하며 그대로 자연이 되어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한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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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뒤쪽에서 바라본 월연대 일원. 집의 지붕선이 이루는 건축미가 아름답다. 가장 왼쪽에 보이는 것이 월연대다. 이곳에서는 집앞의 밀양강을 비롯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 년만에 다시 보는 밀양의 산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다. 월연정으로 가는 택시기사의 얘기에 따르면, 밀양은 일찍이 시가 됐음에도 발전이 없이 지금까지 정체돼 있다고 한다. 인구도 여태껏 10만을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그러나 외부인에게는 아직 아름다운 산세와 그 산세속에 묻혀 남아 있는 도시의 모습이 오히려 정겹다.

 

 ▲월연대 앞 바위위에 서 있는 백송. 

흰 소나무 가지가 집주인의 기상을 품고 있는 듯하다.

 

 

밀양역에서 차로 불과 몇분 거리인 시내도로를 지나면 곧 한적한 시골마을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다시 10분 남짓 더 달리면 밀양강을 만난다. 밀양강을 따라 옛 철길이었던 길을 조금 더 달리면 강가에 ‘월연정’과 ‘밀양아리랑길’의 안내판이 서 있다. 한편에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터널이 있다.

 


밀양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월연대 전경. 숲에 가려 지붕만 드러난다. 집 뒤로 보이는 것이 추화산이다.

 

 

담양의 소쇄원과 서로 닮은 별서건축

이곳에서 차를 내려 강옆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면 월연대(月淵臺)를 만난다. 가장 높은 곳에 정자형태인 월연대가 자리잡고 있고 그 옆으로 강학공간인 제헌(齊軒), 그리고 살림채인 쌍경당(雙鏡堂)의 순서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월연정은 그 이름에서 정자를 연상케 하지만, 정자만이 아니라 정자 일원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해발 200여m의 봉수대가 있던 추화산 아래 밀양강과 동천, 서천이 합류하는 지점을 바라보고 들어선 월연대 일원은 담양 소쇄원(瀟灑園)에 비견되는 우리나라 전통조경과 원림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 자체의 풍광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광도 수려하기 그지없다.

 

 


월연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건물로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루를 만든 정자형태의 건물이다.

 

실제로 월연대 앞에는 백송(白松), 곧 흰 소나무가 기품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지금은 묘목이 많아졌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던 희귀소나무다. 백송외에도 집 뒤로는 숲이 울창하고 그 사이사이로 오래된 소나무들과 적송도 눈에 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옆으로는 대나무 숲이 울창한데 흔하게 볼 수 없는 검은 대나무인 오죽(烏竹)이 있다.

 

월연대가 소쇄원과 비견되는 것은 비단 조경이나 원림뿐만이 아니다. 월연대를 건립한 연유또한 소쇄원과 비슷하다. 즉 소쇄원이 조선 중종때 양산보(梁山甫)가 개혁정치를 펼치던 스승 조광조가 유배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살면서 조성한 곳인데, 월연대 또한 당시 문신이었던 이태가 기묘사화를 피해 내려와 조성한 곳이다.

 

1. 월연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건물로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루를 만든 정자형태의 건물이다.

2. 제헌의 대청. 제헌은 강학공간으로 정자를 확대한 모습의 구성이다. 대청과 방 사이에는 분합문을 설치했고, 분합문 앞에 들어열개를 설치해 언제든 개방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조정에 몸담으면서 개혁의 뜻이 좌절되자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낸 점이 서로 닮았다. 이름도 각각의 호를 따 지은 것도 공통점이다. 소쇄원은 양산보의 호가 ‘소쇄옹(瀟灑翁)’이었던 데서 따온 것이고, 월연대 또한 이태의 호 ‘월연(月淵)’에서 따왔다. 현재 소쇄원과 월연대 일원 모두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본관이 여주(驪州)인 이태의 집안이 밀양으로 내려온 것은 그의 아버지때다. 교위(校尉)를 지낸 그의 부친 이사필(李師弼)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밀양으로 내려왔다. 이태는 그의 둘째아들로, 26세때인 중종4년(1509년) 대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봉교(藝文館 奉敎),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 함경도 도사(都事), 삼척부사(三陟府使)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쌍경당의 기둥위에 만든 공포. 장식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건물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당시 권신이었던 김안로(金安老)가 병풍에 글씨를 부탁했지만, 내손이 어찌 권귀(權貴)로 인해 더럽힘을 받겠느냐‘면서 거절한 일도 있다고 한다. 함경도 도사로 있을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월연정을 지은 것도 바로 이때다.

 

벼슬을 뒤로 하고 고향에 내려온 이태는 스스로를 월연주인(月淵主人) 또는 금서자(琴書子)로 이름붙이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면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지은 건물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나무와 돌과 물을 사랑해 영월간(迎月澗), 수조대(垂釣臺), 탁족암(濯足巖), 행단(杏亶) 등 곳곳에 이름을 지었다. 계곡에는 작은 다리를 놓아 쌍청교(雙淸橋)라고 이름붙였다. 

 


제헌의 전면.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대청을 둔 형태다.

 

 

거울처럼 맑고 밝은 달빛의 풍광이 어리는 곳

월연정은 이태가 낙향한 이듬해인 1520년에 건립한 별서(別墅) 형태의 건물이다. 전체 건물이 모두 밀양강을 향하도록 ‘ㅡ’자 형태로 배치돼 있다. 가운데 대문앞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 본채인 월연정이 있고, 가운데 제헌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작은 계곡을 건너서 정자 형태로 된 월연대가 있다.

 

이태의 호나 정자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곳은 달과 유래된 것이 많은 듯하다. ‘월연’이라는 이름도 ‘달을 품은 못’이란 뜻이다. 또 당초 이곳은 ‘월영사(月影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 절의 이름 또한 ‘달에 비친 그림자’라는 뜻이다. 곧 이곳에 달이 비칠 때 그 풍광이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살림집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쌍경당. 이곳에 있는 건물중 건축수법이 가장 뛰어나다

 

쌍경당 중건기를 쓴 하설산인(夏雪山人) 홍성(洪晟)은 “밤이 되어 달빛을 받으면 위아래 허공이 밝아 한 빛으로 둘다 밝으니 거울과 거울이 물에도 있고 달에도 있음으로다. 태사씨(太史氏)의 말에 ‘온 세상이 혼탁하면 청사(淸士)를 볼 수 있다’ 했으니 공이야말로 청사라 일컬을만 하지 않은가”라고 쓰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월연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어 경관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이기도 하거니와 건물의 형태도 정자의 용도로 지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건물로 가운데 사방 1칸의 방을 두고 빙 둘러 마루를 설치한 점이 그렇다. 방에는 4면 모두에 문을 두어 언제든 개방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지금은 월연대 담장에 막혀 언덕 아래에 있는 밀양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이문순(李文淳)씨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담장의 높이가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고 한다. 즉 얕은 담장으로 돼 있어 주위의 풍광이 모두 한눈에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던 셈이다. 지금은 월연대 앞에 있는 백송도 담장에 가려 일부만 눈에 들어온다.
 

 

 1. 제헌의 방 내부 2.이 집의 건축수법과 장식은 격식을 갖추고 있다. 지리산에서 운반해온 적송을 목재로 사용했고, 천장은 모두 우물반자로 처리했다. 

 

 

월연대로 오르는 길은 돌계단이다. 높은 바위 위에 만든 집이어서 바위를 깎아내어 오르는 길을 만든 것이다. 백송도 바위위에 서 있다. 월연대를 내려오면 작은 계곡사이에 만든 다리를 건너 다음 건물인 제헌으로 갈 수 있다. 월연대와 제헌사이에 있는 다리는 지금은 콘크리트로 돼 있지만 원래 이곳도 아치모양의 나무다리였다는 게 이문순씨의 설명이다.

 

제헌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이곳 역시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대청이 놓여 있는 구조다. 이문순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유생들을 가르치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 역시 방에서 대청으로 향하는 분합문에 들어열개를 설치해 언제든 개방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 대청의 전면을 제외하고는 양 옆면과 뒷면에는 판장문을 달았다. 

 

 


쌍경당 너머로 솟을 대문이 있는 대문채가 보인다. 이 대문채가 월연대 전체를 출입할 수 있는 문이다.

 

제헌에서 다시 작은 일각문을 통해 대문채와 살림집을 지나 반대편의 일각문을 지나면 이 집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쌍경당(雙鏡堂)을 만난다. 쌍경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2칸의 대청을 두고, 그 옆으로 역시 2칸의 사랑방이 이어지고 가장 끝에 뒤에 아궁이를 둔 1칸의 방이 내민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역시 언제든 개방이 가능한 형태로 돼 있다.

 

‘쌍경당’이라는 이름은 ‘수월쌍청(水月雙淸)’을 거울에 비유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즉 ‘강물과 달이 맑은 것이 마치 거울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쌍청교인 것도 바로 여기에 연유한다. 밀양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쌍경당 뒤로는 안채격인 살림집이 있다. 

 

 1쌍경당의 기둥위에 만든 공포. 장식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건물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2. 제헌의 마루 아래 연꽃 문양이 새겨진 받침석이 있다.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이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복원

그러나 이들 세건물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후손들이 중건한 것이다. 쌍경당의 경우 중건기(重建記)에 따르면 이태의 6세손인 첨추(僉樞) 지복(之復)이 복구할 마음을 지니고 동생인 지표(之標)와 당질인 수사(水使) 홍(泓)에게 위촉해 그 터에다 중건했다고 한다. 그때가 1757년이다.

 

월연대는 쌍경대보다 더 늦게 중건됐다. 월연대 중건기에 따르면 1866년 봄에 10대손 종술이 자재를 모으고 힘을 길러서 옛 모습을 회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상 마음을 밝고 맑게 하가는 월연의 의미를 담아 좌의정을 지낸 풍산사람 유후조(柳厚祚)가 쓴 것으로 지금도 월연대 누각에 편액이 남아 있다. 

 


▲월연대에서 제헌으로 건너가려면 계곡에 난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쌍청교’라 명명된 이 다리는 당초 아치모양의 나무다리였다.

 

월연대나 쌍경대, 제헌 등 세건물 모두 건축양식이 뛰어나다. 공간구성은 일반 살림집과는 다른 정자의 기본구성을 따르고 있다. 방보다 대청을 중심으로 집의 구조가 이루어진 점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 온돌을 설치해 사계절 주거도 겸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살림집의 용도도 염두에 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세 건물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천장에는 우물반자를 만들었다. 특히 쌍경당은 기둥의 보에 2단 공포를 만들어 화려하면서도 뛰어난 장식효과도 보여준다. 이 집을 지은 목재도 지리산에서 뗏목으로 적송을 운반해 왔다고 한다. 중건한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집이 건재한 것은 우수한 목재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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