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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건축이야기]
교수·학장으로 15년간의 작품

베니스대학에서 시작하여 베이징의 칭화대학과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원의 8년과 명지대학교 건축대학장 7년반에 이르기까지 15년여를 교수로 지내는동안 몇몇 건축작품을 설계하면서 발토 그로피우스와 같은 인문학적 건축가의 길을 걸어왔다.

교수생활이 끝날 즈음 서울 사이버대학 본관설계를 부탁받아 새로운 캠퍼스타운을 구상하고 있다.

글·사진 김석철(명지대학교 건축대학 석좌교수·명예건축대학장, 아키반 건축도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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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뜨롱궁에서 한국건축가를 초청해 한국현대건축 특별전을 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베니스대학의 프랑크 만쿠조 교수가 특강차 교토에 들렀다가 한국건축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한국에 들렀다. 나에게도 연락이 와서 예술의 전당, 영화박물관, 한샘공장 등의 도면과 현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나의 작품만 전시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3년 2월25일부터 한달동안 까뜨롱궁에서 ‘SEOUL, ARCHITETTURA & CITT? L`OPERA DI SEOK CHUL KIM’ 전시회를 열었다.

교수와 학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아 두달을 연장전시를 하고 이를 계기로 베니스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프랑크 만쿠조, 리니오 부르토메소, 돌체타 교수 등과 친해지고 가족끼리도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 마지막 국가관을 두고 중국, 아르헨티나, 한국 등 열일곱 나라가 경쟁할 때 돌체타 교수는 학장으로서 교수사회를 우호적 분위기로 만들고, 베니스 수상도시연구소장이기도 한 리니오 교수는 가장 친한 친구인 베니스시장을 설득하고, 만쿠조 교수는 한국관의 현지설계자로서 문화재청과 공무원 등을 친한파로 만들어 당시 이탈리아 대사가 장관에게 불가능이라고 보고했던 마지막 국가관으로 한국관이 들어설 수 있게 하였다. 그때는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백남준 선생이 앞장서 일을 이끌어 나가던 분위기여서 다른 건축가들의 간접적 참여라도 유도하지 못한 것은 생각이 좁았던 탓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베니스대학초청 포스터

 


베니스대학과 칭화대학, 동양과 서양의 천년도시

베니스대학에서 매년 서너차례 특강을 하는 가운데 총장에게 전임교수로 일하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후 교수회의의 인증을 받아 3학년 설계반을 맡게 되었다. 만쿠조 교수와 지금은 모두 교수가 된 롱기, 야코보, 로베르또 세명의 조교와 24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도시설계 스튜디오를 맡다보니 서울은 뒷전이 되었다. 종묘-남산간 재개발계획과 여의도·한강 마스터플랜 실무책임자로 일하기는 하였으나 5년제 도시대학원에서 도시설계를 가르치게 되자 열두시까지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며 건축설계보다 도시설계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고 베니스의 아름다운 건축보다 도시자체의 질서형식, 역사와 어반 컨텐츠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도시와 동양도시의 비교연구가 알려져 세계유수의 대학에서 여러차례 특강도 하게 되었다.

 

서양도시를 공부할수록 동양도시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베이징 칭화대학의 우량융 교수에게 연락하였다. 우량융 교수와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그분이 나의 서울 도시설계 관련 논문과 예술의 전당에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던 차라 함께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을 지도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우량융 교수가 취푸 옛 도시구역에 공자연구소를 설계하여 막 완공되고 칭화대학 경제학부에서 ‘신취푸 도시경영’에 대한 연구를 끝내고 건축학부가 이를 이어받은 참이라 중국 3황5제의 도시이고 공자의 본향인 중국의 정신적 수도 취푸의 신도시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우량융 교수가 역사도시의 보존과 재개발계획을 총괄하고 내가 신도시 설계를 담당하기로 역할분담이 되었다. 류지안 교수가 총 조교를 맡고 이상현 박사가 조교가 되어 박사과정 8년차 두 여학생, 석사과정 3년차 열두 학생과 함께 역사도시 취푸와 신도시 취푸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우량융 교수는 초대학장 때 쓰던 방을 그대로 쓰고 나에게는 학생 스튜디오에 붙은 30평에 가까운 개인연구실이 배정되어 큰 벽 가득히 도면을 붙인 큰 채 일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취푸를 세차례 다녀왔다. 8년차 박사과정 두 여학생은 박사논문 주제가 ‘취푸 역사도시 현대화‘여서 많은 시간을 함께 하였다. 지금은 칭화대 교수가 된 두 여학생의 ‘3황5제의 본향으로서의 취푸 연구’와 ‘음양오행으로 본 취푸 연구’는 취푸의 역사와 지리와 인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취푸 신도시를 원형의 도시로 구상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저녁 일곱시면 끝나던 베니스 스튜디오와는 달리 매일 밤 서너시까지 일하는 그들에게서 뒤늦게 일어서는 대국의 의지와 열기를 보았다. 중국문명에 대한 그들의 깊은 연구와 자부심은 상상보다 컸으며 현대도시문명에 대한 이해도 해가 갈수록 괄목할만하게 되었다.

천년도시인 베니스와 베이징을 오가다보니 동서양의 천년도시 비교연구를 할 수 있었고 특히 사합원 앞길 후통과 베니스의 캄포를 다루면서 동서양 시장과 인문학 비교연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중국 취푸를 중국 도시화의 모델로 만들자



▲ 취푸조감도

 

 

컬럼비아대학원, 그리고 명지대 건축대학장

칭화대학에서 2년 동안 취푸 신도시를 끝내고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도시설계를 하는 최종목표가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이니 20세기 최고의 도시이며 한반도 자료가 가장 풍부한 뉴욕에서 세계 각국의 학자들과 함께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조창걸 선배의 제안이 있었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는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윤정현 군과 중국, 독일, 타이완, 태국 등 다섯 나라의 열두명을 지도하며 ‘차이나게이트’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유럽학생과 화교들의 관심이 컸다.

그러던 중 명지대학교 선우중호 총장으로부터 5년제 건축대학을 만들게 되었으니 초대학장으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선우총장은 수문학의 대가로서 그분으로부터 한국의 강과 하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서울대학교 마스터플랜 당시 고등학교 선배이자 토목과 교수 후보생으로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5년제 건축대학 최초의 특성화대학이자 최초의 국제인증대학을 만들겠으니 교수임명과 근무시간의 자유를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3년만에 최우수 특성화대학이 되어 50억 연구비를 받게 되고 서울대학보다 앞선 성적으로 국제인증을 받고 졸업생들은 컬럼비아대, 예일대, 하버드대학원 등으로 진학하고 건축상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말도 안되는 조건을 들어준 선우총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초대 건축대학장직을 정년퇴직 때까지 7년반 동안 4번 연임하면서 우수한 젊은 교수를 여덟명 뽑았다. 그 중 셋이 여성교수였다.

베니스대학 3년, 칭화대학 2년, 컬럼비아대학원 3년, 모두 8년 동안 해외교수 생활을 하다가 명지대 건축대학장으로 돌아와 7년반을 지냈으니 15년 동안 건축가로서보다 교수로서 지낸 셈이다. 그러는 동안 두차례의 암수술을 받은 것을 보면 학생들을 지도하는 일이 힘이 든 모양이었다.

 


▲이탈리아 보그지에 게재된 차이나게이트 계획안



▲밀라노디자인시티 조감도와 기공식



▲명지대 채플관

 


오행상생의 스페이스 메트릭스, 캠퍼스 타운

교수생활 8년 후 학장생활을 막 시작할 때 예술의전당 재단이사장이기도 한 신일학원 이세웅 이사장으로부터 사이버대학 본관설계를 부탁받았다. 최고의 대학캠퍼스를 꿈꾸고 산 땅이 대학허가가 나지 않아 1960년대 후반 특별고등학교로 신일고등학교를 지은 이후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야구부 연습장이 있는 도봉산 측 부지는 얕아 북한산을 끌어들인 대학캠퍼스 스케일의 땅으로는 좁아보였다. 대로에서의 진입로가 좁고 긴데다가 주변이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둘러싸여 민원에 시달릴 땅이었다. 야구장 부지와 신일고등학교 사이 1만평 정도가 제대로 된 캠퍼스를 지을만한 땅이나 길 측에 자못 흉측한 예식장이 들어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성신여대 설립자인 이숙종 박사는 미술교육계의 대모이시며 나의 할아버지와 소정 변관식 선생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돈암동 성신여대 본관 자리는 고대보다 나은 땅이었으나 북측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들어서면서 오그라들었다. 미아동의 운정 그린캠퍼스 부지는 돈암동 부지와 짝을 이루는 최고의 제2캠퍼스 자리라 생각했다.

 

성신여대 심화진 총장과 이 이사장과 논의하면서 동측에 코어를 병렬하여 성신여대 운정 그린캠퍼스를 북한산 일대와 오동근린공원과 하나의 공간을 이루게 하고, 세 일자평면 건축물이 운을 맞춰 사이버대학의 두 본관과 오행의 조화를 이루게 하면 상생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하였다. 넉달 동안 세사람 사이에 여러 의견이 오고가는 중 이세웅 이사장이 “큰 틀은 김교수의 영감을 따르되 이 땅을 잘 아는 내가 구체적 사안은 처리하겠다. 심 총장은 내부 공간의 질서체계에 대해서 준비하시오“라 하여 서로의 역할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안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서너차례 모형을 만들고 3D PT를 거듭한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 15년만에 다시 제도판으로 돌아온 건축가와 15년만에 할머니가 세운 대학의 제2캠퍼스를 짓게 된 심 총장과 선친이 대학을 세우려 마련한 미아동 대학캠퍼스의 원주인인 이 이사장의 세구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성적 과정을 천천히 거친 것 같다.

 

아직은 완성이 아니다.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와 사이버대학 캠퍼스 사이에 한옥과 교수회관과 사운드대학이 들어서고 신일고등학교 운동장 측에 버클리음대와 특수학교 신일국제고등학교가 서고 성북구 캠퍼스타운의 전면도로가 지하광장으로 연결되어 지상공원과 하나가 되어야 오행상생의 스페이스메트릭스가 될 것이다. 아직 멀었다. 2년은 더 걸릴 것이다. 내년 여름이면 상상할 수 있는 윤곽이 나올 것이다.

 

학자의 길로 돌아와 만든 작품들이 사이버대학과 성신여대 운정 그린캠퍼스, 밀라노 디자인시티와 트리엔날레다. 다시 제도판으로 돌아왔을 때는 행복하였으나 세 번째, 네 번째 암이 또 찾아온 것을 보니 교수생활과 작가생활의 겹침으로 인한 후유증인지 업보인지 모를 일이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하버드건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를 설립하여 하버드 GSD 신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 맨하탄 파크에비뉴의 팬암 본사를 설계했듯이 세 대학의 건축교수, 대학장을 지내면서 사이버대학, 성신여대, 밀라노 디자인시티와 트리엔날레 등을 설계했으니 비슷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건축의 길을 들어설 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르 꼬르뷔지에와 같은 건축가가 되고자 욕심하였는데 지나고보니 큰 평가를 하지 않았던 발터 그로피우스와 같은 인문학적 건축가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트리엔날레 전시관 및 이탈리아 대통령 방문사진



▲트리엔날레 전시관 내외부



▲조감도(성신운정그린캠퍼스와 사이버대학교)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 전경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 야경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 실내



▲배치개념도(성신운정그린캠퍼스와 사이버대학교)



▲ 서울사이버대학교 캠퍼스안



서울사이버대학교 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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