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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군 ‘송소고택’]
‘3대 정승’과 ‘9대 만석의 부’를 배출한 명문 사대부가

송소세장(松韶世莊)’. 송소고택의 솟을대문위에 걸린 현판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송소고택이 어떤 집인지를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여러 명의 왕비와 재상을 배출한 조선시대의 명문가인 청송 심씨 가문이면서도, 벼슬에 나서지 않은 채 만석의 부를 쌓은 집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대부의 격식을 갖춘 이 집은 우리나라에 몇채 남지 않은 아흔아홉칸 집이기도 하다.

취재 권혁거 사진 왕규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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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에서 본 송소고택의 모습

 

청송은 조선시대 400년 이상을 도호부(都護府)의 위상을 지켜온 지역이다. 신라때 적선(積善), 고구려때 청송의 일부인 파천면이 청기현(靑己縣)으로 불렸다.

고려때 부이(鳧伊), 운봉(雲鳳) 등으로 불리다가 성종때 (靑鳧)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조선 세종이 즉위하면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됐다.   

  

이때만 해도 지금의 청송은 청보군 외에도 송생현(松生縣), 안덕현(安德縣), 진보현(眞寶縣)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세종 3년에 송생현과 안덕현이 합쳐졌고, 청보군과 송생현이 합쳐졌다. ‘청송(靑松)’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세조때인 1459년 도호부가 설치돼 1895년 갑오경장(甲午更張)때까지 지속됐다.

 


송소고택의 사랑마당. 작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경주 최부자집과 쌍벽을 이룬 영남의 대부호

청송 심씨(沈氏)는 청송을 본관이자 세거지로 하는 조선시대의 명문가문이다. 청송 심씨는 고려시대 위위시승(衛尉侍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한다. 그의 증손인 심덕부(沈德符)와 심원부(沈元符)때 가계의 큰 흐름이 둘로 나뉜다. 형인 덕부는 조선 개국때 공신의 길로 들어선 반면 동생 원부는 벼슬을 마다하고 절개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으로 들어간다.

 

덕부의 가계에서는 왕후 3명과 부마 4명을 비롯해, 13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형 덕부는 고려말 우왕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라는 벼슬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을 거쳐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에 봉해졌다. 청성은 오늘의 청송이다.

 


큰 사랑채. 대청과 사랑방, 건넌방이 퇴로 연결된다. 사랑대청 앞에는 들어열개가 있다.

 

그는 조선조 들어서도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정종1년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로서 세종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인 심회(沈澮)도 세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3대가 연이어 모두 정승에 오른 집안은 조선 전체에 걸쳐 세가문 뿐이다

  

반면 원부의 가계에서는 벼슬에 나서지 않은 대신 9대에 이르는 만석(萬石)의 부()를 이루었다. 동생 원부는 세 아들을 불러 자신과 같이 은둔하지 말며, 학문과 농사에 전념하되 향촌사회를 이끌고 조선왕조의 녹을 먹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의 11세손인 심처대(沈處大)때 부를 이루어 9대를 이어갔다. 각각의 가계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룬 셈이다.

 


널찍하게 조성된 안마당에서 사랑채 중문을 바라본 모습.

 

심씨들이 청송에 입향하게 된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15세기 초엽부터 원부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현재 고택을 지키고 있는 종손 심재오(沈載五, 61)씨에 따르면 원래 청송 덕천리에 터를 잡았으나 분가하면서 이웃마을인 호박골(지금의 지경리)에 옮겼다가 다시 덕천리로 돌아온 것이라고 한다.

 

당초 부를 처음 일군 심처대는 인근 호박골에 살았다. 그러다가 송소세장을 건립한 심호택(沈琥澤) 때 덕천리로 다시 돌아왔다. 송소(松韶)는 그의 호로, 심처대의 7대손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많은데 호박골의 집이 좁아 원래 청송 심씨의 세거지인 덕천리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안동에서 덕천마을을 오자면 먼저 산중턱 쯤에서 호박골을 만나고, 작은 구비 하나를 더 지나서야 덕천마을에 이른다.

 


1 안채의 또다른 측면. 방앗간이 있는 곳이다. 송소고택에서는 공간을 기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2 예스러운 정취를 자아내는 장독대 3, 4 안채에서 사랑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담장에 구멍을 냈다. 안채에서는 3개지만 사랑채에서는 6개다.

 

청송 심씨가 만석의 부를 이룬 것과 관련해 처음 부를 일군 심처대와 관한 일화가 전한다. 심처대가 젊은 시절 한 노스님을 길에서 만나 음식을 주고 개울에 쓰러진 것을 구해주었는데, 그 노스님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부모님의 묏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이후 청송 심씨는 9대 만석을 누리며 경주 최부자집과 함께 영남지역의 양대 부호로 이름을 얻었다. 만석으로 9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주 최부자처럼 청송 심부자 또한 재력을 이용해 권력을 탐하지 않고,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송소고택의 부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구한말 갑오개혁때 화폐가치의 변동이 심해지자 나라에서 세금을 은화로 납부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심호택도 인근 의성군 안계고을에 있던 전답을 처분해 은화로 바꾸었는데, 그 은화를 청송으로 가져오는 행렬이 무려 4(10)나 이어졌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대문채를 바라본 모습. 가운데 헛담이 큰 사랑마당과 아낙네들의 동선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들은 구한말 의병활동 등을 위해 쓰이면서 줄어들었고, 또 해방후 토지개혁으로 많은 땅이 분배되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심호택이 국채보상운동 청송지부장을 역임했고, 경북지방 퇴계학맥 유림들이 주축이 된 병신창의(丙申倡義)’때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의병들의 자금줄이 됐다.

 

또 현 종손의 부친인 심운섭(沈雲燮)은 독립후 장면(張勉)이나 윤보선(尹潽善), 신익희(申翼熙) 등과 교류를 하던 분으로, 이들과 함께 민주당 창당멤버로 활동하면서 정치자금을 댔다. 또 집안 어른들의 사업자금으로도 돈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지금은 집과 농토만 어느 정도 남았다고 한다.

 


작은 야산을 배경으로 선 송소고택의 사랑채. 큰사랑과 작은사랑의 위계가 뚜렷하다.

 

 

청송 심씨의 세거지에 자리잡은 99칸집

송소고택은 덕천리의 한가운데쯤에 낮은 구릉을 뒤로 하고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부호로서 99칸의 위용을 자랑하며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결구수법이나 치장 등도 뛰어나다. 영남 사대부가의 대표적 가옥으로서 집의 구성양식도 다양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을 앞에 두고 커다란 사랑채가 자형으로 서 있다. 이 사랑채는 가운데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사이에 두고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로 나뉜다. 전체 규모가 모두 11칸에 이르는 큰 규모다. 사랑채만 보아도 이 집이 대단한 규모를 가진 사대부가의 대갓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사랑채 대청. 분합문 앞으로 들어열개를 설치했다. 이같은 공간의 개폐는 우리 전통가옥의 지혜다.

 

그런데 사랑채 앞 마당에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큰 사랑과 작은 사랑을 나누어놓은 듯한 나지막한 담장이 그것이다. 기실 이 담은 마당공간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외를 구분하기 위한 이른바 헛담이라는 것이다. 즉 아녀자들이 대문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지나는동안 사랑채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방의 모습

 


건넌방의 모습

 

종손의 설명에 따르면 당초 이 담장의 길이가 지금보다 중문쪽으로 더 길게 뻗어 있었지만, 보수과정에서 짧아졌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담장은 내외를 구분하는 우리나라 전통 사대부가의 유교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담장이 자연스럽게 큰 사랑과 작은 사랑 앞의 마당공간을 기능적으로 나누는 역할도 하게 된다.

 


큰 사랑채의 대청

 

 

전통한옥의 지혜 보여주는 살림집의 구성

사랑채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자형으로 앉아 있다. 정면 6, 측면 2칸 반의 큰 규모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 및 부엌과 건넌방이 놓였고 양쪽 옆으로 날개채가 달려 있다. 부엌 앞으로는 작은 우물이 있고, 뒤쪽으로 나가면 장독대가 있다. 날개채 측면으로는 방앗간이 있다. 안채의 살림살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실용적 배치인 셈이다.

 


별당채 쪽에서 본 사랑마당. 왼쪽으로 큰 사랑채와 오른쪽으로 대문채가 눈에 들어온다. 주위의 산을 배경으로 들어앉은 고택의 모습이 정취를 자아낸다.

 

그런데 안채는 대청이 여느 사대부가의 대청에 비해서는 작게 만들어진 점이 눈에 띈다. 정면 1칸 규모로 폭이 좁고 길이가 긴 모양으로 돼 있다. 방의 형태도 특이하다. 안방의 경우 정면 2, 측면 2칸 등 전체 4칸의 큰 규모중 한쪽의 1칸에 따로 문을 달아 별도의 방으로 구획했다. 건넌방 또한 서로 길이가 다른 방의 공간이 겹쳐 있는데, 전체적으로 겹집의 형태를 띄고 있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의 방들. 방에 따른 창의 문양의 다른 모습이 눈에 띈다.

 

안채에서 또하나 눈에 띄는 것은 담장에 낸 구멍이다. 안채에서 사랑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것으로, 안채에서는 3개지만, 사랑채에서 보면 6개다. 안채쪽 한 구멍에 사랑채쪽으로는 양쪽으로 내놓아 넓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모든 공간을 2층의 다락형태로 만들어 수납공간을 확보했다.

 

별당은 큰 사랑채 옆으로 난 작은 중문을 통해 연결되는데, 중문을 지나면 별당만의 독립된 문을 만난다. 별당대문에는 양쪽에 광이 붙어 있다. 별당채는 가운데 1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배치돼 있는 형태다. 그리고 한쪽 방 앞으로는 1칸을 더 내밀어 누마루를 만들었다. 그래서 집의 전체적인 모양은 자 형태를 띄고 있다.

 


1, 2 굴뚝. 이 집에서는 다양한 굴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3 별당채로 통하는 작은 일각문앞에 해태상이 있다. 아마도 별당채가 손님이 묵는 기능외에 감실이 있었기 때문에 만든 것이 아닌가 보인다.

 

별당채로 통하는 사랑마당의 일각문 앞에는 해태상이 좌우에 놓여 있다. 종손 심재오씨의 설명에 따르면 별당채는 손님이 묵어가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분가하기 전 며느리가 살던 공간이기도 했다. 또 이곳에 감실이 있어 사당인 별묘의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해태상은 바로 이같은 별묘의 기능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별당채 앞으로는 우물이 놓여 있다.

 


별당채의 모습. 대청앞으로 누마루를 내밀어 전체적으로 자 형을 띄고 있다. 마당앞으로 작은 우물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종손 부부가 지키면서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종손도 20여년을 서울생활을 하다 돌아왔다. 집을 비워두고 있는 동안 집도 집이려니와 많은 유물들이 없어지거나 훼손되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 ‘송소세장이라는 대문위의 현판도 없어졌고, 지금 달아놓은 것은 다시 만든 것이다. 심지어 문짝도 뜯긴 것이 많다고 한다.

 


지붕 앞에 막새기와가 있다.

 

종손 심재오씨는 지금도 해방정국 당시 당대의 내노라하는 정객들이 사랑방에 머물던 일을 잊지 못한다. 부친인 심운섭씨가 의친왕과도 친분이 있어 의친왕도 이 집을 더러 찾았다고 한다. 심씨의 얘기처럼 비단 영남의 대부호가 아니라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대부였다 할 만한 셈이다. 마침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낙수가 되어 처마끝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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