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신청 광고문의
  • 주택저널 E-BOOK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 광고 배너1
수익형 주택 하우징
·Home > 인사이드뷰 > 인사이드뷰
[김석철 교수의 도시건축 이야기]
나의 박물관 설계 이야기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축가로서 여러 박물관들을 설계해 왔다. 이번 달의 글에서는, 내가 지난 40여년간 박물관 설계를 해오며 겪었던 좌절과 실패, 보람과 성취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글이 일반 독자들과 건축 후학들의 박물관건축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 김석철(국가건축정책위원장·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장) 

주택저널 기사 레이아웃

 

 


▲ 제주 영화박물관 평면도

 

 

프롤로그 prologue

중학교때부터 시작된 박물관 순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부산국제시장은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국제시장이었다. 자갈치시장 건너 광복동거리를 지나 국제시장에 이르면 바다로부터 저 세계에 닿는 것이었다. 1953년 밤새 부산바다를 붉게 물들이던 대화재 뒤 국제시장은 잿더미위에 바로 다시 일어섰다.

 

주말이면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을 많이도 다녔다. 국제시장의 골동상이 가장 열심히 자주 찾던 곳이다. 밀양 할아버지댁에서 서화골동을 보고 자란 미술체험이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새로운 풍물에 대한 타고난 호기심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빠지지 않고 다녔다. 골동상 아저씨는 열심히 묻고 질문하는 소년이 귀여웠는지 사는 일도 없는데 어떤 때는 과자와 차까지 주며 반겨주었다.

 

새로운 물건이 오면 설명도 해주고 어떤 때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진귀한 골동품을 길게 설명도 해주었다. 중학교 입학때 조그만 선물을 주기도 하고 내가 고등학교때 서울로 가게 되자 그렇게 섭섭해 했다. 방학때 내려가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집에 온 다음날이면 거기엘 가곤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용돈을 모아 오래 눈여겨보던 도자기 한점, 청동병 한점, 서화 한점을 사게 되었다. 그때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국제시장의 골동상은 나에게 작은 박물관이었던 셈이다.

 


온양 민속박물관 전경

 

 

온양 민속박물관

유년시절을 지나, 나의 건축가로서의 본격적인 박물관과의 인연은 온양 민속박물관 설계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친구아버님이 1970년대 중반 온양에 민속박물관을 짓기로 해서 설계하게 된 것으로, 당시 김중업, 김수근 두분 선생께 사사한 후 독립해 쿠웨이트의 자하라 주거단지 설계를 끝낸 직후의 시기였다. 마침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종합병원설계에 참여하게 되어 유럽으로 갈 기회가 있어, 처음으로 박물관을 단순한 관람객이 아닌 박물관을 설계하게 된 건축가의 입장에서 찾아 나서게 되었다.

 

종합병원의 건축설계는 메디컬 엔지니어에 의해 메디컬시스템이 만들어진 후 건축가가 그들의 플래닝 컨셉과 가이드라인을 따라 공간형식으로서의 병원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메디컬 엔지니어들은 의료에 관한 일반적인 지식은 물론 병원장비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기반으로 최고의 메디컬시스템을 제안하고 건축가는 최종적 디자인만을 담당하게 된다. 처음으로 박물관을 설계하게 되었으므로 박물관 설계에도 그런 것이 없는지 궁금했다. 병원의 대상이 사람인데 비해 박물관의 대상은 오브제이므로 메디컬 엔지니어링에서 박물관설계의 플래닝 컨셉에 대한 좋은 암시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온양 민속박물관 로비의 모습

 

그 후 리야드 종합병원팀과 바쁘게 일하며 잠시 박물관 일을 잊고 살았다. 병원설계가 끝나갈 무렵 암스테르담으로 와 릭스 뮤지움과 반고흐 뮤지움을 찾았다. 그때 온양박물관을 설계하면서 보고자 했던 박물관들은 암스테르담의 릭스뮤지움, 런던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퐁피두센터 등 종합박물관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라이덴의 풍차박물관 같은 민속박물관이나 프랑크푸르트의 공예박물관, 우표박물관 등과 같은 특수박물관들을 더 보고자 했다. 헤이그에서 리야드 종합병원의 최종계획안을 그려 서울로 보내고 한달동안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는 물론 지도에서만 보던 작은 도시들의 박물관, 미술관들을 찾아 다녔다.

 

한달 이상 박물관만 보러 다니다보니 박물관 건물보다 박물관 전시품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박물관의 처음과 끝은 모두 전시품이었으며 어떻게 전시기획을 하느냐가 박물관 설계의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병원설계하듯 박물관설계에서도 뮤지움 엔지니어링이 건축설계보다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컬렉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박물관 설립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서 건축주인 친구 아버님을 뵙고 박물관 설계 이전에 전시기획이 선행되어야 함을 이야기 드린 후 설계 이전에 박물관장이 될 분을 모셔와서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온양 민속박물관 전시실

 

모든 것이 흔쾌히 받아들여져 반년 넘게 건축설계가 아닌 전시기획에 몰두할 수 있었다. 박물관 전시기획은 전시내용의 플롯도 중요하지만 관람객과 전시품 사이의 흐름이 단순한 동선으로서만 아니라 하나의 시각형식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계기간은 충분했으나 정작 전시기획에 따른 수장품 구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공사비가 지나치게 낮아 어려움을 겪었다. 단계적으로 짓더라도 작고 완전한 것을 먼저 만들고 차츰 덧지어나가는 방안도 생각해보았으나 70년대 말 한국경제의 수준으로는 그만한 것도 과분한 것이기도 했다.

 

박물관을 설계하면서 전시기획을 먼저하고 박물관의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연결하는 등 설계기법상의 새로운 시도들이 성공적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온양온천과 아산현충사로 온 사람들이 그곳까지 오게 되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온양 민속박물관은 개장 초기부터 많은 관람객들이 방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온양을 대표하는 문화시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제주 영화박물관 전경

 

 

제주 영화박물관

민속박물관을 설계하고 나서 반년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었다. 그동안 잊고 살던 산과 강을 다시 찾았다. 경복궁, 창덕궁, 종묘를 찾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화를 받았다. “김석철 선생이지요, 나 영화배우 신영균입니다. 한번 만나뵙고 상의하고 싶습니다.” 자다가 난데없는 전화를 받았다. 물론 신영균 선생을 모를 리 없다. 웬일일까. 나를 알고 나를 찾는 전화라면 건축가로서 나를 보자는 것인데 무슨 일일까.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을 한 3만 평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 영화박물관을 짓고 싶다. 함께 제주도에 내려가서 둘러보고 상의하자한다. 건축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땅과 환상적인 프로젝트인데 둘다를 은막에서 보던 당대의 대스타가 직접 가져왔다.

일주일 뒤 함께 제주도로 가기로 하고 그간 영화박물관에 대해 공부한다. 바비칸 센터의 시네마테크와 워털루브리지의 국립영화관을 여러번 보았고, 레슬리하드 캐슬이 3년여에 걸쳐 만든 MOM1을 옆에서 지켜보던 중이어서 그간의 자료를 정리했다.

 


제주 영화박물관 영화포스터 전시관

 

영화박물관이 지어질 부지는 제주도에서도 한라산을 지나 서귀포측 남쪽 바다에 면한 남원에 있었다. 길에서는 별 것 같지 않았으나 안으로 들어서니 놀라운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년 된 동백이 가득하고 이국적인 아열대 수목이 끝없는 숲을 이루고 있다. 짙은 숲 사이를 지나자 문득 바다가 나타난다. 하늘과 바다가 인간의 땅에 하나가 되어 만나는 듯한 장소다. 용암이 바다로 흐르다 굳어진 해안의 암벽은 태초의 시간과 공간을 암시하는 듯하다. 바다가 사방에 가득 넘쳐온다. 바로 이곳에 인간의 환상을 담은 영화박물관을 짓자는 것이다. 숲 너머로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라산과 바다뿐이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이런 때일수록 차분히 한걸음 물러서서 토지와 주제에 대한 연구를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옛 제주도 지도와 땅에 얽힌 설화들을 모아보았다. 제주도는 한라산 하나로 이루어진 섬이다. 그런 사실이 옛 지도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땅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자리라는 전설이 있는 땅이었다. 내가 처음 와서 느낀 감상이 수 백 년전부터 있어온 설화였다.

 

땅을 살펴보고 건축에 대해 본격적으로 그려보려 하니 영화박물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 영화박물관이라고 하면, 사우스뱅크의 영화박물관과 프랑크푸르트의 영화박물관, 뉴욕 퀸스의 영화박물관 이외에는 해외에도 영화박물관이라 할 만한 건축물이 달리 없었다. 박물관이라는 주제와 영화라는 명제가 하나가 된 영화박물관의 그림을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제주 영화박물관 영상관

 

영화박물관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영화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엇인가. 영화의 역사,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위대한 작품들을 보여주자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박물관이라는 것은 실물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 곳인데 무엇이 영화의 실물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생각들을 메모로 정리하면서 다시 현장을 찾았다.

 

이 아름다운 3만평을 10년을 목표로 제주도의 보물로 만들어보자. 이런 땅이 다시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 시대의 천년 건축을 짓는 마음으로 일하려 했다. 3만평 전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고 그 속에 영화박물관을 세우는 것을 제안하기로 했다. 한달 안에 제주영상단지라는 이름으로 영화인들의 작업공간인 스튜디오와 콘도미니엄이 영화박물관과 함께 있는 마스터플랜을 만들었다. 스케치와 사업계획서를 갖고 신영균 선생을 만났다.

 

다 알아보고 김교수에게 맡긴 것이니 마음껏 안을 만들어 주시오. 이 땅을 20년 동안 가꾸어 왔지만 내 땅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제주도에 영화와 관련된 명소를 만들려고 한 것이니 예술의 전당 같은 우리 시대의 명작을 기대하오더이상 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영화박물관 안이 자유곡선으로 이루어진 환상형의 형상이어서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제주 영상복합단지 마스터플랜

 

마스터플랜은 영화박물관을 자리잡게 하기 위한 베이스드로잉이지 실제의 안이 아니므로 영화박물관 일에 바로 매달렸다. 영화박물관은 트인 공간과 닫힌 공간, 움직임의 공간과 서있는 공간, 인공조명의 공간과 태양광선의 공간, 자연의 공간과 인공의 공간 등등을 끊임없이 대비시켜 나가는 이중나선의 구성원리를 기본 공간형식으로 했다.

 

이미지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지는 내부공간의 흐름이 이층 테라스로 나서면서 바다로 열리게 했다. 토지가 원초의 형상이면서 바다와 한라산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의 유아독존적인 장소여서 용암 같은 원초의 형상을 시도했다. 도시의 어느 공간과도 다른, 끊임없이 자연과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하는 유기적 형상을 시도했다.

 

모형을 만들면서 차츰 건축이 구체화되어 갔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벽면과 이에 조화하는 공간의 깊이가 하나가 되는 내부공간으로 최종도면을 정리했다. 도면이 다 되었을 때 영화인들을 초대해 설명회를 가졌다. 예상외로 다들 좋아한다.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내용, 독특한 형상의 집인데 다들 쉽게 이해한다. 신회장도 그 땅에 보통 집을 지을 수 없지 않느냐. 이상하고 신비로운 집이지만 제주도 그 땅에는 잘 어울릴 것 같고 영화라는 것이 원래 비현실적인 꿈을 만드는 일이므로 환상적인 내부공간도 영화박물관으로 잘 맞을 듯하다한다. 직선이 없는, 모두가 곡선인 자연의 집이다. 자를 대지 않는 도면을 오랜만에 그린다. 정릉에서 3년 동안 일할 때 그리던 그런 집을 그 이후 25년만에 드디어 땅 위에 실현하게 되었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전경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영화박물관 설계 이후 한동안 박물관 설계에선 떨어져 있었다. 잠시 한가한 사이 그동안 미뤄왔던 책을 내기로 했다. 베네치아 대학에 교수로 초빙되어 일하게 되어 그간의 일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고 작품집도 만들어야 했다. 반년에 걸쳐 천년의 건축, 천년의 도시’, ‘세계건축기행’, ‘김석철 드로잉 스케치라는 세권의 책을 내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철스님의 수제자로서 백련암을 물려받은 원택스님의 방문을 받았다. 성균관대학교의 이상해 교수가 해인사 실측조사 일을 2년동안 수행하면서 두분이 서로 알게 되었고 성철스님이 해인사 창건 1200년을 기해 발원한 해인사 신불교단지마스터플랜을 시작하게 되자 원택스님에게 나를 추천한 것이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외부

 

해인사 신불교단지는 신라시대에 허덕사라는 옛 절터가 있던 해인사 경내에 일제가 지은 해인초등학교가 폐교된 채 남은 3000여평의 터에 팔만대장경을 위시한 성보유물을 모시는 박물관과 대중에게 불법(佛法)을 말할 대법당과 선수행을 위한 선수련원과 가야산 정기를 받은 야외대불로 이루어진 대역사였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내부의 모습

 

2002년이면 가야산에 해인사가 자리한지 1200년이 되는 해이고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을 모시게 된 600년이 되는 해다. 성철스님이 불교의 진리를 눈으로 알게 하는 박물관과 말을 통해 알게 하는 대법당과 수련을 통해 몸으로 알게 하는 수련원과 대자연의 힘으로 불가의 이치를 알게 하는 야외법당 등으로 신불교단지를 발원한 안의 마스터플랜을 하게 된 것은 건축가로서도 큰 계기였다. 이상해 교수와 함께 마스터플랜을 성안했다.

 


합천 해인사 신불교단지 마스터플랜

 

마스터플랜의 윤곽이 선 후 바로 박물관 설계에 착수했다. 박물관은 팔만대장경의 제작과정과 그 내용을 시각형식으로 알게 하는 팔만대장경실, 1200년동안 모아온 성보유물전시실과 불교미술실의 세공간으로 구분했다.

 

백남준선생께 팔만대장경의 제작과 그 내용을 미술형식으로 대중에게 전할 수 있는 작품을 부탁했다. 미술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종교화가 아닌가. 한국 고미술의 정수도 대부분 불교미술인 터에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박물관에 팔만대장경을 미술형식으로 표현하는 일은 핵심적인 일이었다. 백선생이 쓰러지신 후 나를 찾으셨을 때 아마 내가 비디오부다를 만든 일로 해서 살아난 것 같다 하셨는데 이번 일을 불공하듯 하시겠다 하여 크게 기대했다.

 


합천 해인사 성보박물관 로비에 위치한 백남준선생의 작품

 

주지스님이나 관장스님 모두 마음을 함께 하여 박물관건립이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외환위기로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박물관 완공이 지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법당과 수련원은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성보박물관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어, 수장고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불교문화와 체험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불교문화박물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에필로그 epilogue

그러고보니 지난 40여년 동안 여러 박물관들을 설계한 셈인데, 그동안 기회는 많았으나 내 스스로 100퍼센트 만족할만한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신 박물관설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작년 여름 경 미국을 방문하며 미국의 여러 뮤지엄들을 다녀오면서 박물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좋은 기회를 가졌다.

 


1 암스테르담 릭스뮤지엄 2 뉴욕 영화박물관 3 뉴욕 현대미술관 옆에 위치한 미국민속박물관 4 싱가포르 불교박물관

 

같은 전시회가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과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열렸었는데 박물관의 공간으로 인해서 전시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체험을 하며 다시금 박물관 설계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박물관도 이제는 한단계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이제 박물관은 단순한 미술 전시장이 아니라 문화의 한 광장이다. 우리도 우리의 문화수준에 맞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박물관을 가져야 할 때이다.

 

 

왼쪽으로 이동
오른쪽으로 이동